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

글 : 박정애 (숙명여자대학교)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실시했던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이용했던 성폭력 제도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난징대학살을 일으킨 1937년 12월부터 본격화되어 일본군의 병참 부속시설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위안소는 피로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군인들에게 ‘성병으로부터 안전한 성적 위로’를 제공할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성병을 예방하는 한편,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인 여성, 식민지 조선 및 대만 여성, 그리고 점령지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민족 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가난하면서도 교육기회나 직업기회에서 차별받은 여성들일수록 조직적인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및 가부장제를 이념적 배경으로, 일본이 전쟁을 통해 획득한 식민지와 점령지가 있었기 때문에 시행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년이 흐른 뒤였다. 1980년대 후반에 ‘성폭력’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성’이란 공론화하기 어려운 수치스런 화제로 치부되었고, 성적 피해는 가해자 못지않게 그 피해자 역시 가해자보다 더 사회적 냉대를 받기도 하였다. 성적 피해자에게 도덕적 비난을 돌리고 사회적 불이익을 주는 분위기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비난을 감수하거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여성운동이 고양되던 해인 1988년, 일본의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관광(일명 기생관광)을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매매 관광의 역사적 뿌리이며, 어느 세력에 의한 정치침탈, 경제침탈, 군사침탈이 일어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오늘날의 문제임을 역설하였다. 여성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연구모임을 꾸리고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정부의 사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한일 정부로부터 성의 있는 답변을 얻지 못한 여성단체들은 1990년 11월, 36개 여성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정신대’는 일제가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했던 ‘근로정신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엄격히 따지자면 일본군 ‘위안부’와는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정신대’를 ‘위안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에 마을을 떠난 여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정신대’라는 ‘처녀공출’을 한다는 소문과 전쟁터에서 여성들이 ‘몹쓸 짓’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정신대’= ‘위안부’라는 오해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근로동원’이나 ‘공출’, ‘취업’의 외피를 쓰고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은밀한 성격은 일본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책임을 부정하는 하나의 핑계가 됐다. 여성단체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정부나 군이 관여한 바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렸다. 우리나라 정부 또한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문제가 다시 잊혀질 것만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여성 김학순은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로부터 용기를 얻은 다른 피해생존자들도 한 명, 두 명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생존자들은 문헌자료가 감추었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이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위안소 생활의 실태뿐만 아니라 군의 관여 또한 하나하나 드러났다. 해방 후에 겪은 외로움과 생존위기의 이야기 속에서는 성적 피해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심함을 돌아보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일본정부와 군의 관여를 입증하는 문헌자료가 발견되고 1993년에는 고노(河野)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한 것’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위안부’ 피해생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과 생활지원을 시작했으며, 일본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배상이 아닌 ‘위로금’ 지급을 시도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일본국회의 의결을 거친 공식적인 사죄와 일본정부 차원의 배상금 지급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계속해서 외쳐왔지만, 2014년 현재 일본 정부의 태도는 ‘고노담화’에서도 후퇴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혔던 한국여성 238명 가운데, 2014년 10월 현재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하다. 집회, 강연, 재판 등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현장마다 중심을 지켜주던 생존자들이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일본정부가 느끼는 압박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생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 왜곡반대, 전쟁반대 및 평화요구,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등 오늘날의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단지 과거에 끝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문제이며, 어쩌면 다음 세대가 겪어야할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록하고 전하지 않으면 역사는 잊혀지기 마련이다. 망각 속에서 역사의 비극은 되풀이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은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평화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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