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여정에 대한 보고
간에이(寬永) 원년 갑자년(1624)
조선 삼사(三使)가 내빙했을 때의 각서(覺書)주 003
간에이 원년(1624)
一. 9월 14일에 통신사가 부산포에 도착했다고 아비루 헤이하치(阿比留平八)가 다음 날 15일에 이 소식을 알려왔다.
一. 이 일을 9월 17일자로 에도(江戶)에 보고하는 서한으로 작성해서 오가와 하치자에몬(小川八左衛門)이 다음 날 18일에 배를 타고 출발했다. 오사카부교(大坂奉行)주 004 시마다 세이자에몬(嶋田淸左衛門)주 005님과 구가이 추자에몬(久貝忠左衛門)주 006님께서 이 서한을 역참 파발(次飛脚)주 007로 에도에 전달할 것이다.
〃하치자에몬이 시마다 세이자에몬님과 구가이 추자에몬님 두 사람에게 서한 1통을 전달했다.주 008
〃하치자에몬이 이타쿠라 스오노카미(板倉周防守)주 009님에게도 같은 서한 1통(교토와 오사카의 숙소에 관해 기재된 것)을 전달했다.
〃하치자에몬이 마쓰라 히젠노카미(松浦肥前守)주 010님에게도 같은 것 1통을 전달했다[간자에몬(勘左衛門)님에게].
〈간자에몬이란 도노모(主殿)님이라고 한다〉
〃데라자와 시마노카미(寺澤志摩守)주 011님에게 같은 것을 1통 보냈다. 단, 루스이(留守居)주 012에게 [전하고], 또한 쓰시마야 젠베에(善兵衛)에게도 서한을 첨부하여 보냈다. 사자(使者)는 규에몬(久右衛門).
〃구로다 우에몬노스케(黑田右衛門佐)주 013님에게 같은 것을 1통. 단, 오가와 구라(小川內藏)님에게 [전하고], 구라모토(藏本)주 014까지 하카타(博多) 배로 보냈다.
〃모리 나가토노카미(毛利長門守)주 015님·가이노카미(甲斐守)주 016님에게 같은 것을 1통씩, 루스이들에게 [전달했다]. 단, 통신사 건에 관해서는 요코야마 하치자에몬(横山八左衛門)님이라는 사람을 보낼 것이므로 이 서한을 [그 편으로] 발송했다. 또한 그쪽에서 서한의 회신도 하셨다. 하치자에몬 담당.
〃미즈노휴가노카미(水野日向守)주 017님에게 서한 1통. 단, 루스이들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아사노 단바노카미(淺野但馬守)주 018님에게 서한 1통. 단, 루스이들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마쓰다이라 구나이쇼유(松平宮內少輔)주 019님에게 서한 1통. 단, 아라오 다쿠미(荒尾內匠)님에게 전했다. 하치자에몬 담당.
이상은 세토우치(瀨戶內) 지역에서 [통신사를] 접대를 맡은 분들이므로, 향응에 관한 안내는 부젠노카미(豊前守)주 020
각주 020)
가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 쓰시마번 번주 소씨의 중신(重臣).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 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렸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 신장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주군(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천8백 석(石) 중 1천 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臣, 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津輕藩)에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竄)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소씨가 승리한 후, 쓰시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同『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서한을 보냈다.
一. 마쓰라 다쿠미(松浦內匠)님으로부터 칙사(勅使, 통신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비찰(飛札)이 왔다. 부산포까지 도착했다고, 부젠노카미(豊前守)가 회신을 보냈다.
一. 도요사키(豊崎)주 021에서는 통신사의 배가 분명히 보이면 불을 2개 피울 예정이다. 평상시에는 불을 하나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부젠노카미가 도요사키의 부교(奉行)주 022에게 서한으로 알렸다.
一. 9월 19일, 다나카 가쿠타유(田中格太夫)가 부산포에서 출항하여 동 20일 다이후(對府, 후추[府中]주 023)에 도착했다. 통신사는 9월 28일 부산포에서 승선할 예정이고, 순풍이 불면 그 날 도해할 거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一. 9월 21일, 도요사키에 통신사의 배가 분명히 보이면 마음껏 피우도록 했다. 가령 밤새도록 불을 피우더라도 무방하다.
보통 때에는 매일 밤 불을 하나씩 피우도록 정했다. 불 피우는 규정이 또다시 바뀌어 이와 같이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一. 9월 28일, 조선에서 우치야마 사나이스케(內山左內介)가 귀국(歸國)주 024했다. [쓰시마의] 후추(府中)에는 낮 7시분(時分)주 025쯤에 도착했다. 어제 부산포를 출선했다고 한다. 지난 27일에 야로쿠자에몬(彌六左衛門)주 026이 배를 타고 마루야마(丸山)의 성하(城下)주 027를 돌았다고 한다. 통신사도 지금 28일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전해왔다.
一. 도요사키에 통신사 도착을 알리는 부교 사자로 산슈(讚州)를 와니우라(鰐浦)주 028에 내려 보냈다. 또한 부젠노카미의 도착을 알리러 핫토리 야에몬(服部彌右衛門)을 보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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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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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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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0)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 쓰시마번 번주 소씨의 중신(重臣).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 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렸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 신장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주군(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천8백 석(石) 중 1천 석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직신(直臣, 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쓰가루번(津輕藩)에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竄)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소씨가 승리한 후, 쓰시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同『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