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구저(久氐)를 천웅장언(千熊長彦)에 딸려 보냄
50년 여름 5월에 천웅장언, 구저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이에 황태후는기쁘게 맞이하며 구저에게 “바다 서쪽에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게 주었다. 지금은 무슨 일로 빈번히 또 오느냐?”라고 물었다. 구저 등이 “천조의 큰 은택은 멀리 폐읍(弊邑)주 001까지 미치니 우리 왕(근초고왕)이 매우 기뻐하여 춤을 추면서 마음에만 담아둘 수가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다시 정성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만세에 이를 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는 칙을 내려 “너의 말이 훌륭하도다주 002. 이것은 짐도 생각하고 있던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다사성(多沙城)주 003
번역주 003)
을 더해주고 왕래하는 길의 역(驛)으로 삼도록 하였다. 현재 경남과 전남의 경계인 섬진강 하구 부근(하동 지방)에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河東郡. 本韓多沙郡…岳陽縣. 本小多沙縣. 」이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계체기에 보이는 帶沙江, 多沙津은 모두 같은 지역이다.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50년 하5월조는 왜가 백제에 多沙城을 준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同 계체천황 23년(529) 3월조에서 백제가 왜에 加羅의 多沙津을 요구하자 왜가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는 내용과 비슷하다.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것은 6세기경의 사실로, 여기에는 이론이 없다. 따라서 왜가 백제에게 多沙城을 하사하였다는 신공황후 섭정 50년 하5월조의 기사는 6세기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역사적 사실이 4세기 중엽의 사실처럼 소급, 투영되어 삽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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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3)
현재 경남과 전남의 경계인 섬진강 하구 부근(하동 지방)에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河東郡. 本韓多沙郡…岳陽縣. 本小多沙縣. 」이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계체기에 보이는 帶沙江, 多沙津은 모두 같은 지역이다.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50년 하5월조는 왜가 백제에 多沙城을 준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同 계체천황 23년(529) 3월조에서 백제가 왜에 加羅의 多沙津을 요구하자 왜가 이를 허락하였다고 하는 내용과 비슷하다.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것은 6세기경의 사실로, 여기에는 이론이 없다. 따라서 왜가 백제에게 多沙城을 하사하였다는 신공황후 섭정 50년 하5월조의 기사는 6세기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역사적 사실이 4세기 중엽의 사실처럼 소급, 투영되어 삽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색인어
- 이름
- 천웅장언, 구저, 구저, 구저, 근초고왕
- 지명
- 다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