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구지 기록 필사 이유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 상중하전집서
이 기록 및 관련된 문건(冊)들
대대로 번주님 곁에 두고 소중하게 보관해 온 기록인데, 원본에 벌레로 인한 손상이 있으니 다시 기록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부재중이어서 관청에도 필사해 두고 싶어, 그 내용을 이번 달 담당인 이쿠도 하치로자에몬(幾度八郞左衛門)에게 말씀드리고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쓰메노마(詰間)주 001 에서 거두신 다음에 내려주신 것을, 관계자들을 모아 필사하여 비치해 두었다.
1724(文政 7)년 갑술 9월
단 위에 기록한 것 외에 야나가와 사건(柳川一事)을 기록한 것은 1636(寬永 13)년 통신사기록의 변무(辯誣)에 대한 문건, 또 상자에 넣어 맡겨 둔주 002 보초로(方長老)주 003
대대로 번주님 곁에 두고 소중하게 보관해 온 기록인데, 원본에 벌레로 인한 손상이 있으니 다시 기록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부재중이어서 관청에도 필사해 두고 싶어, 그 내용을 이번 달 담당인 이쿠도 하치로자에몬(幾度八郞左衛門)에게 말씀드리고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쓰메노마(詰間)주 001 에서 거두신 다음에 내려주신 것을, 관계자들을 모아 필사하여 비치해 두었다.
1724(文政 7)년 갑술 9월
단 위에 기록한 것 외에 야나가와 사건(柳川一事)을 기록한 것은 1636(寬永 13)년 통신사기록의 변무(辯誣)에 대한 문건, 또 상자에 넣어 맡겨 둔주 002 보초로(方長老)주 003
각주 003)
와 시치에몬(七右衛門)주 004 문답의 문건 등이다.기하쿠 겐포(規伯玄方, 1588~1661). 일명 보초로(方長老). 규슈 하카타(博多) 무나가타(宗像)군 출신으로 출가한 시기 등은 알 수 없으나 쓰시마로 건너가 외교승으로 활약했던 동향(同鄕) 출신의 선승(禪僧)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의 제자가 되었다. 겐소는 쓰시마의 후추(府中)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설하였고, 1611년 10월 겐소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겐소의 뒤를 이어 대조선 외교문서를 기초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1621년과 1629년에 조선에 건너와 교섭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으며, 특히 1629년에는 이례적으로 도읍 한양에 상경하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절이 한양 상경을 허가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야나가와 잇켄 때에 실무자로서 실책이 있었음이 인정되어 난부(南部)에 유배되었다가 1658년, 사면되어 에도로 돌아왔다.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 中』에 의하면, 야나가와 잇켄의 편결이 내려진 후 보초로(기하쿠 겐포)가 소지하던 서적류는 몰수되어 타인에게 맡겨졌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기하쿠 겐포(規伯玄方, 1588~1661). 일명 보초로(方長老). 규슈 하카타(博多) 무나가타(宗像)군 출신으로 출가한 시기 등은 알 수 없으나 쓰시마로 건너가 외교승으로 활약했던 동향(同鄕) 출신의 선승(禪僧)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의 제자가 되었다. 겐소는 쓰시마의 후추(府中)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설하였고, 1611년 10월 겐소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겐소의 뒤를 이어 대조선 외교문서를 기초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1621년과 1629년에 조선에 건너와 교섭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으며, 특히 1629년에는 이례적으로 도읍 한양에 상경하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절이 한양 상경을 허가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야나가와 잇켄 때에 실무자로서 실책이 있었음이 인정되어 난부(南部)에 유배되었다가 1658년, 사면되어 에도로 돌아왔다.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 中』에 의하면, 야나가와 잇켄의 편결이 내려진 후 보초로(기하쿠 겐포)가 소지하던 서적류는 몰수되어 타인에게 맡겨졌다.
- 각주 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