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 요자에몬의 조선 도해
○ 5월 25일
○ 이조참판·이조참의·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한주 001
一. 전에 받아온 이조참판·이조참의의 답서를 조선으로 가져가므로 요자에몬에게 건네주었다.
一. 요자에몬에게 서한을 건네주고, 첨관(僉官)들과 아비루 소헤에(阿比留惣兵衛)에게 도시요리(年寄)의 근무소에서 일즙삼채(一汁三菜)주 002의 요리를 냈다.
一. 5월 28일, 다다 요자에몬과 첨관들이 탄 배가 출항했다. 전례대로 조선(漕船)주 003을 딸려 보내고, 파도가 센 곳에서는 노젓는 배를 붙여 사스나(佐須奈) 포구까지 가도록 곳곳에 지시하라고 군(郡) 쪽에 전했다.
一. 다다 요자에몬의 조선 도해가 늦어지고 있다고 에도(江戸)에서 연락이 와서 임(壬) 5월 15일의 서장으로 요자에몬에게 빨리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전했다. 요자에몬이 와니우라(鰐浦)에 머물고 있어 파발을 내려보냈다. 서찰의 내용을 적는다.
말씀 올립니다. 부내(府内)가 별 탈 없고, 前 번주님께서 안녕하시다니 안심이 됩니다. 에도에서 이번에 돌아오셨고, 번주님께서도 날로 강녕하시다 하니 삼가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귀하는 와니우라에 체류하면서 아직도 도해하지 않으셨는지요? 출발하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래 머무셔서 안타깝습니다. 이번에 에도 쪽에서 말씀하시기를, 귀하가 조선에 건너가는 일이 점점 연기되어 답서가 도착했다는 보고가 늦어질 것을 매우 염려하십니다. 에도에 보고하는 것이 늦어지면 좋지 않으니 반드시 도해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날씨가 좋지 않아서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지만, 그 사이에 적당한 때를 보아 조속히 도해하도록 하십시오. 이 점을 말씀드리려고 연락드립니다.
각주 001)
을 다다 요자에몬에게 건네주었다. 이조참판에게 보내는 서한을 담은 대(臺)는 전백목(槇白木)이다. 서한대(御書翰臺)는 모두 상자 하나에 넣어서 건네준다. 관수·재판 및 조선·사스나(佐須奈) 요코메(横目)들에게도 서한을 보내지만, 다름 점이 없어서 이를 적지 않는다.2차 도해 시에 다다가 조선에 제출한 서계는 『竹嶋紀事』元祿 7년 3월 綱, 『竹島紀事本末』등에 수록되어 있다. 서계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拾遺) 平義倫은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閤下)의 편지를 받들어 보았습니다.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회답을 받들어 여러 차례 되풀이 하여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귀국의 어민이 우리나라의 죽도에 들어온 것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서계에서는 蔚陵島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금 (조선의) 답신에는 蔚陵島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정관(正官) 橘眞重(多田與左衛門)과 도선주(都船主) 藤成時를 보내니, 바라건대 ‘울릉’이라는 이름을 제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행(東行) 일정이 가까워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사신의 입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산물로 부족하나마 이렇게 멀리서 정성을 알리오니 웃으며 받아주십시오. 삼가 이만 줄입니다. 元祿 7년(1694) 갑술 2월 일. (『竹島紀事本末』)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拾遺) 平義倫은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閤下)의 편지를 받들어 보았습니다.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회답을 받들어 여러 차례 되풀이 하여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귀국의 어민이 우리나라의 죽도에 들어온 것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서계에서는 蔚陵島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금 (조선의) 답신에는 蔚陵島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정관(正官) 橘眞重(多田與左衛門)과 도선주(都船主) 藤成時를 보내니, 바라건대 ‘울릉’이라는 이름을 제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행(東行) 일정이 가까워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사신의 입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산물로 부족하나마 이렇게 멀리서 정성을 알리오니 웃으며 받아주십시오. 삼가 이만 줄입니다. 元祿 7년(1694) 갑술 2월 일. (『竹島紀事本末』)
一. 전에 받아온 이조참판·이조참의의 답서를 조선으로 가져가므로 요자에몬에게 건네주었다.
一. 요자에몬에게 서한을 건네주고, 첨관(僉官)들과 아비루 소헤에(阿比留惣兵衛)에게 도시요리(年寄)의 근무소에서 일즙삼채(一汁三菜)주 002의 요리를 냈다.
一. 5월 28일, 다다 요자에몬과 첨관들이 탄 배가 출항했다. 전례대로 조선(漕船)주 003을 딸려 보내고, 파도가 센 곳에서는 노젓는 배를 붙여 사스나(佐須奈) 포구까지 가도록 곳곳에 지시하라고 군(郡) 쪽에 전했다.
一. 다다 요자에몬의 조선 도해가 늦어지고 있다고 에도(江戸)에서 연락이 와서 임(壬) 5월 15일의 서장으로 요자에몬에게 빨리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전했다. 요자에몬이 와니우라(鰐浦)에 머물고 있어 파발을 내려보냈다. 서찰의 내용을 적는다.
말씀 올립니다. 부내(府内)가 별 탈 없고, 前 번주님께서 안녕하시다니 안심이 됩니다. 에도에서 이번에 돌아오셨고, 번주님께서도 날로 강녕하시다 하니 삼가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귀하는 와니우라에 체류하면서 아직도 도해하지 않으셨는지요? 출발하셨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래 머무셔서 안타깝습니다. 이번에 에도 쪽에서 말씀하시기를, 귀하가 조선에 건너가는 일이 점점 연기되어 답서가 도착했다는 보고가 늦어질 것을 매우 염려하십니다. 에도에 보고하는 것이 늦어지면 좋지 않으니 반드시 도해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날씨가 좋지 않아서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지만, 그 사이에 적당한 때를 보아 조속히 도해하도록 하십시오. 이 점을 말씀드리려고 연락드립니다.
임(壬) 5월 15일
히구치 사에몬
스기무라 우네메
히라다 하야토
스기무라 우네메
히라다 하야토
다다 요자에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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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2차 도해 시에 다다가 조선에 제출한 서계는 『竹嶋紀事』元祿 7년 3월 綱, 『竹島紀事本末』등에 수록되어 있다. 서계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拾遺) 平義倫은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閤下)의 편지를 받들어 보았습니다. 사신이 돌아오자 바로 회답을 받들어 여러 차례 되풀이 하여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귀국의 어민이 우리나라의 죽도에 들어온 것을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서계에서는 蔚陵島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금 (조선의) 답신에는 蔚陵島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정관(正官) 橘眞重(多田與左衛門)과 도선주(都船主) 藤成時를 보내니, 바라건대 ‘울릉’이라는 이름을 제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행(東行) 일정이 가까워 하나하나 거론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는 사신의 입에 부쳐 보내겠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산물로 부족하나마 이렇게 멀리서 정성을 알리오니 웃으며 받아주십시오. 삼가 이만 줄입니다. 元祿 7년(1694) 갑술 2월 일. (『竹島紀事本末』) - 각주 002)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다다 요자에몬, 요자에몬, 요자에몬, 아비루 소헤에(阿比留惣兵衛), 다다 요자에몬, 다다 요자에몬, 요자에몬, 요자에몬, 히구치 사에몬, 스기무라 우네메, 히라다 하야토, 다다 요자에몬님
- 지명
- 사스나(佐須奈), 사스나(佐須奈), 에도(江戸), 와니우라(鰐浦), 에도, 와니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