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무제가 격파하니 야량(夜郞)이 입조함
남월(南越)이 반란을 일으키자,주 001
무제(武帝)는 치의후(馳義侯)
주 002에게 건위군을 통하여 남이(南夷)의 군대를 동원하게 하였다. 차란주 003군(且蘭君)은 군대를 멀리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주변의 국(國)들이 [남은] 노약자들을 사로잡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무리와 함께 배반하여, 사자 및 건위 태수를 죽였다. 한은 이에 일찍이 파촉의 죄인을 징발하여 남월을 공격하던 여덟 교위(校尉)로 이들을 격파하였다. 마침 월이 이미 격파되었기 때문에주 004
한의 여덟 교위는 남하하지 않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두란(頭蘭)주 005을 주멸하였다.주 006
각주 006)
두란은 늘 전(滇)으로 향하는 길을 막던 자였다. 이미 두란을 평정한 뒤, 마침내 남이를 평정하여 장가군(牂柯郡)을 설치하였다. 야랑후는 처음에 남월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남월이 이미 멸망하고, 때마침 [한군이] 돌아와 이반한 자들을 주멸하니, 야랑이 마침내 입조(入朝)하였다. 상(上)이 야랑왕(夜郞王)으로 삼았다.『漢書』 「西南夷傳」에서는 이때 남이 정벌에 참여한 인물로 ‘中郞將郭昌·衛廣’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곽창의 경우는 『한서』에 입전되어 있는데, “郭昌은 雲中人이다. 校尉로서 大將軍 衛靑을 종군하였다.元封 4年에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었으며 朔方에 둔수하였다. 昆明을 쳤으나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하였다(『漢書』 卷55 「郭昌傳」, 2492). 『漢書』 「武帝紀」에 따르면, 곽창은 元封 6년(전105) 삼월에 일어난 益州郡의 昆明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는데(『漢書』 卷6 「武帝本紀」, 198),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때의 일인 듯싶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漢書』 「西南夷傳」에서는 이때 남이 정벌에 참여한 인물로 ‘中郞將郭昌·衛廣’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곽창의 경우는 『한서』에 입전되어 있는데, “郭昌은 雲中人이다. 校尉로서 大將軍 衛靑을 종군하였다.元封 4年에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었으며 朔方에 둔수하였다. 昆明을 쳤으나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하였다(『漢書』 卷55 「郭昌傳」, 2492). 『漢書』 「武帝紀」에 따르면, 곽창은 元封 6년(전105) 삼월에 일어난 益州郡의 昆明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는데(『漢書』 卷6 「武帝本紀」, 198), “功이 없어 인수를 회수당하였다.”라고 한 것은 이때의 일인 듯싶다.
색인어
- 이름
- 무제(武帝), 치의후(馳義侯)
- 지명
- 남월(南越), 건위군, 한, 파촉, 남월, 월, 한, 전(滇), 장가군(牂柯郡), 남월, 남월, 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