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포(程包)의 조를 받들어 조겸(曹謙)을 보내 판순만(板楯蠻)을 사면하니 모두 투항함
후한에 이르러서도 군 태수들은 매번 이들을 이끌고 정벌하였다. 환제(桓帝) 때에 판순만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태수인 촉군(蜀郡)의 조온(趙溫)이 은혜와 신뢰로 복종시켰다. 영제(靈帝) 광화(光和) 2년(179) 파군(巴郡) 판순만이 다시 반역하여, 삼촉(三蜀)주 001과 한중(漢中)
주 002의 여러 군들을 노략질하였다. 영제는 어사중승(御史中丞)주 003
소원(蕭瑗)으로 하여금 익주의 병사를 도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으나, 몇 해가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주 004황제는 크게 군사를 징발하려고 익주의 계리(計吏)들에게 토벌방략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한중의 상계(上計)주 005
정포(程包)가 대책을 올렸다. “판순의 7성(姓)은 백호를 사살하는 공을 세워, 선대에 부역을 면제받아 의인(義人)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날래어 전투에 능합니다. 옛적 영초(永初)연간(107~113, 후한
안제)에 강족이 한천(漢川)
주 006을 침입하여 군현이 파괴되었을 때 판순만의 구원을 받았는데, 강족 대부분이 패해 죽어 신병(神兵)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강족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종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 남쪽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건화(建和) 2년(148, 桓帝)에 이르러 강족이 다시 대규모로 침입하였는데, 판순만에 의지하여 연속적으로 격파하였습니다.주 007전에 거기장군(車騎將軍) 풍곤(馮緄)이 무릉(武陵)으로 남정(南征)하였을 때, 비록 단양(丹陽)에 정예부대의 예리함이 있었다고 하나,주 008역시 판순만에 의지하여 그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근자에 익주군이 혼란해졌을 때, 태수 이옹(李顒) 역시 판순만을 이용하여 토벌하여 평정하였습니다.주 009충성스러운 공을 세운 것이 이와 같으니, 본래 악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군현의] 장리(長吏)주 485와 향(鄕)과 정(亭)의 갱부(更賦)주 011가 지독히 무겁고, 종처럼 부리는 것이 가혹하여 노비나 포로보다 심하였습니다. 또한 처를 바치거나 자식을 파는 경우도 있었으며, 혹은 스스로 목을 매는 경우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주군(州郡)에 억울함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지방수령들은 사태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궁궐은 멀리 떨어져 있어, 스스로 이를 알릴 수 없었습니다. 원한에 사무쳐 하늘에 외치고 깊은 계곡에서 가슴을 쳤습니다. 부역으로 고통을 받다가 끝내 혹형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읍락에 서로 모여들게 되어 반역의 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의를 주모한 자가 제호(帝號)를 참칭하면서 불경스러운 일을 도모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단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지방수령을 선발하면 자연히 안정될 것으로, 번잡스럽게 정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황제는 그 말에 따라 태수 조겸(曹謙)을 보내 조서를 내려 사면하자 모두가 투항하여 복종하였다.주 012중평(中平) 5년(188)에 이르러 파군(巴郡)에서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판순만이가 이를 기화로 다시 반란을 일으켜 성읍(城邑)을 노략질하자,주 013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주 014
각주 014)
의 상군별부(上軍別部)주 015의 사마(司馬)주 016
조근(趙瑾)을 보내 토벌하였다.西園八校尉: 『後漢書』 권8, 「靈帝紀」에 따르면 中平 5년(188) 가을 8월 처음으로 西園八校尉를 설치하였다. 李賢注에서 인용한 樂資의 「山陽公載記」에 따르면 小黃門 騫碩이 上軍校尉, 虎賁中郞將 袁紹가 中軍校尉, 屯騎校尉 鮑弘이 下軍校尉, 議郞 曹操가 典軍校尉, 趙融이 助軍左校尉, 馮芳이 助軍右校尉, 諫議大夫 夏牟가 左校尉, 淳于瓊이 右校尉로 모두 8校尉를 두었는데, 전체는 騫碩이 통솔하였다. 武帝 때에도 司禮校尉를 비롯한 여덟 명의 교위를 8교위라고 하였으나 명칭과 통솔관계를 고려할 때 이전의 8교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西園은 황궁에 속하는 구역이고 宦官이 총책임자라는 사실로 볼 때, 급변에 대비하여 궁성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황실의 친위군사조직이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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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西園八校尉: 『後漢書』 권8, 「靈帝紀」에 따르면 中平 5년(188) 가을 8월 처음으로 西園八校尉를 설치하였다. 李賢注에서 인용한 樂資의 「山陽公載記」에 따르면 小黃門 騫碩이 上軍校尉, 虎賁中郞將 袁紹가 中軍校尉, 屯騎校尉 鮑弘이 下軍校尉, 議郞 曹操가 典軍校尉, 趙融이 助軍左校尉, 馮芳이 助軍右校尉, 諫議大夫 夏牟가 左校尉, 淳于瓊이 右校尉로 모두 8校尉를 두었는데, 전체는 騫碩이 통솔하였다. 武帝 때에도 司禮校尉를 비롯한 여덟 명의 교위를 8교위라고 하였으나 명칭과 통솔관계를 고려할 때 이전의 8교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西園은 황궁에 속하는 구역이고 宦官이 총책임자라는 사실로 볼 때, 급변에 대비하여 궁성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황실의 친위군사조직이었다.
- 각주 015)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환제(桓帝), 조온(趙溫), 영제(靈帝), 영제, 소원(蕭瑗), 정포(程包), 안제, 桓帝, 풍곤(馮緄), 이옹(李顒), 조겸(曹謙), 조근(趙瑾)
- 지명
- 후한, 촉군(蜀郡), 파군(巴郡), 한중(漢中), 익주, 익주, 한중, 후한, 한천(漢川), 무릉(武陵), 단양(丹陽), 익주군, 파군(巴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