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周) 이후 전국시대 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유왕(幽王)
주 001에 이르러 [그는] 포사(襃姒)
주 002라는 총희(寵姬)로 인해 신후(申侯)
주 003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신후는 화가 나서 견융과 함께 쳐들어와 주나라
유왕을 여산(麗山)
주 004기슭에서 죽이고 마침내 주나라 땅을 취하였다. [견융이 땅을] 노획하여주 005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주 006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였다. [한편] 진(秦)나라
양공(襄公)
주 007이 주나라를 구원하였으므로 이에 주나라
평왕(平王)
주 008이 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옮겨 갔다. 당시에주 009
진나라
양공이 [견]융을 쳐서 기[산]에주 010이르게 되어 비로소 제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주 011이후 65년이 지나주 012산융주 013
각주 013)
이 연(燕)나라
주 014를 넘어 제(齊)나라
주 015를 공격하니 제나라
희공(釐公)
주 016이 [산융과] 제나라의 국경에서 싸웠다. 이후 44년이 지나주 017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는 위급함을 제나라에 알렸고, 제나라
환공(桓公)
주 018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주6) 참조).
각주 018)
이 북쪽으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이 도망갔다.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나 융적(戎翟)주 019이 낙읍까지 와서 주나라
양왕(襄王)
주 020을 치니주 021, 양왕이 나와 정(鄭)나라
주 022의 범읍(氾邑)
주 023으로 달아났다. 이전에 주나라
양왕이 정나라를 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융]적 [추장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주 024[융]적의 군사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양왕이 적후(翟后)를주 025멀리하게 되자 적후가 왕을 원망하게 되었다.주 026그런데 양왕의 계모를 혜후(惠后)라고 하였는데, [그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어 그를 [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혜후가 적후, 자대와 함께 [몰래 융적과] 내통해 융적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융적은 [도성 안으로] 들어와 [결국] 양왕을 격파하고 내쫓은 다음에 자대를 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융적이 더러 육혼(陸渾)
주 027에 살게 되면서 동쪽으로는 위(衛)나라
주 028齊 桓公(재위 전685~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인근 종족들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1494).
각주 028)
에까지 이르러 중국을 침입해 약탈하는 것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이나 살다가주 029, 사신을 진(晉)나라
주 030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진(晉)나라
문공(文公)
주 031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패업(覇業)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쳐서 내쫓은 다음 자대를 죽이고 양왕을 맞아들여주 032
낙읍에 살게 하였다.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에게서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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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주6) 참조).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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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8)
齊 桓公(재위 전685~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인근 종족들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1494).
- 각주 019)
-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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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에게서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 각주 029)
- 각주 030)
- 각주 031)
- 각주 032)
색인어
- 이름
- 유왕(幽王), 포사(襃姒), 신후(申侯), 신후, 유왕, 양공(襄公), 평왕(平王), 양공, 희공(釐公), 환공(桓公), 양왕(襄王), 양왕, 양왕, 양왕, 양왕, 혜후(惠后), 자대(子帶), 혜후, 자대, 양왕, 자대, 양왕, 문공(文公), 자대, 양왕
- 지명
- 주나라, 여산(麗山), 주나라, 경수(涇水), 위수(渭水), 진(秦)나라, 주나라, 주나라, 풍호, 낙읍, 진나라, 기[산], 연(燕)나라, 제(齊)나라, 제나라, 제나라, 연나라, 연나라, 제나라, 제나라, 낙읍, 주나라, 정(鄭)나라, 범읍(氾邑), 주나라, 정나라, 정나라, 육혼(陸渾), 위(衛)나라, 주나라, 진(晉)나라, 진(晉)나라, 낙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