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국(夫餘國)
부여국은 현도군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와, 동쪽으로 읍루와,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주 001
번역주 001)
가 있다주 002. 땅은 사방 2천 리로, 본래 예의 땅이었다 약수: 嫩江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과 黑龍江으로 보는 설(井上秀雄, 1974; 張博泉, 1998)이 있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 營州 柳城縣 동쪽에 饒樂水가 있는데,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北史』에서 “登國 3년 道武가 친히 庫莫奚를 토벌하여 弱水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魏書』, 「太祖紀」에서 “弱落水를 건넜다.”고 하였고, 「蠕蠕傳」에서 “북쪽으로 弱洛水를 넘었다.”고 하였다. 즉 弱水는 省文(글자나 문구를 생략한 것)이다. 『唐書』, 「北狄傳」에서 “太宗이 奚의 족장 可度를 內附로 삼아 饒都督府를 두었고, 阿會部를 弱水州로 삼았으며, 奧失部를 洛瓖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에서 말하길, 『庫典』에서 “庫莫奚를 5부로 나누고, 饒樂水의 북쪽을 다스리는데, 즉 鮮卑의 옛 땅으로 일명 洛瓖水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는] 饒樂의 잘못된 글자로서, 네 개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니, 그것들은 실은 하나를 말한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 營州 柳城縣 동쪽에 饒樂水가 있는데,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北史』에서 “登國 3년 道武가 친히 庫莫奚를 토벌하여 弱水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魏書』, 「太祖紀」에서 “弱落水를 건넜다.”고 하였고, 「蠕蠕傳」에서 “북쪽으로 弱洛水를 넘었다.”고 하였다. 즉 弱水는 省文(글자나 문구를 생략한 것)이다. 『唐書』, 「北狄傳」에서 “太宗이 奚의 족장 可度를 內附로 삼아 饒都督府를 두었고, 阿會部를 弱水州로 삼았으며, 奧失部를 洛瓖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에서 말하길, 『庫典』에서 “庫莫奚를 5부로 나누고, 饒樂水의 북쪽을 다스리는데, 즉 鮮卑의 옛 땅으로 일명 洛瓖水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는] 饒樂의 잘못된 글자로서, 네 개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니, 그것들은 실은 하나를 말한다.
옛적에 북이 색리국주 003의 왕이 출행하였는데주 004, 그 시녀가 이후에 임신하자,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주 005. 시녀가 말하였다. “전에 하늘 위를 보니 기운이 있었는데, 큰 달걀 같았습니다. 저에게 내려와서 임신하였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었는데, 이후에 [시녀가]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도록 명하였는데주 006, 돼지가 입으로 기운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겼는데주 007,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은 신이(神異)하다고 여기고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동명이라고 이름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자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사수주 008
번역주 008)
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 위에 떠올라 모였으므로, 동명이 그것을 타고 [엄사수를] 건널 수가 있었다주 009. 이 때문에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論衡』에는 掩㴲水, 『魏略』에는 施掩水, 『梁書』에는 淹滯水, 『隋書』에는 淹水, 「扶餘隆墓誌」에는 㴲水 등으로 나온다. 嫩江, 松花江 또는 그 지류로 추정된다(國史編纂委員會, 1987).
原註 지금 高麗 땅에 蓋斯水가 있는데, 아마도 이 강을 말하는 것 같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라고 썼다.”고 하였다. 沈欽韓은 “『魏志』의 注에서 施掩水라고 썼고, 『隋書』, 「百濟傳」에서는 掩水라고 썼으며, 이에 대한 注에서는 蓋斯水로 썼는데, 이는 곧 『漢書』, 「地理志·玄菟郡」條의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써 지금의 鴨淥江이다.
原註 지금 高麗 땅에 蓋斯水가 있는데, 아마도 이 강을 말하는 것 같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라고 썼다.”고 하였다. 沈欽韓은 “『魏志』의 注에서 施掩水라고 썼고, 『隋書』, 「百濟傳」에서는 掩水라고 썼으며, 이에 대한 注에서는 蓋斯水로 썼는데, 이는 곧 『漢書』, 「地理志·玄菟郡」條의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써 지금의 鴨淥江이다.
[부여는]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고, 토지는 오곡을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명마와 적옥, 담비와 놜(豽)주 010
번역주 010)
[의 가죽], 대추만한 큰 구슬이 생산된다. 둥근 책을 성으로 삼고주 011, 궁실·창고· 뇌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신체가 크고, 굳건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후덕해 노략질하지 않는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삼는다.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삼으니, 마가·우가· 구가가 있다. 읍락들은 제가(諸加)에 복속되어 있다. 먹고 마시는 데 조두주 012를 사용하고, 회동하여 배작세작(拜爵洗爵)할 때는 예를 갖추어 오르내린다주 013. 납월(臘月: 음력 12월)주 014에 하늘에 제사하여 크게 모인다. [이날]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라고 이름한다주 015. 이때 형옥을 시행하고, 죄수를 풀어준다. 전쟁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하는데, 소를 죽여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친다주 016. 행인은 밤낮없이 노래 부르고 읊조리기를 좋아해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습속은 형벌의 운용에 매우 엄격하다. 사형 죄수는 모두 그 가족을 몰수해서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하나에 열두 배의 책임을 묻는다. 남녀가 음행(淫行)하면 모두 죽이지만, 특히 투기한 부인을 죄악으로 다스려 죽인 다음에 산 위에다가 시신을 둔다주 017.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죽으면 곽을 사용하고, 관은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으면 백 명을 헤아린다주 018. 그 왕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주 019을 사용하는데, 한나라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현도군주 020에 맡겨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부여에서는 옥갑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다. 놜: 『三國志』 부여전에는 狖로 나온다.
原註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集解: 洪頤煊이 말하길, “『爾雅』,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고 했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豽로 적었다고 한다.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다고 하였다. 여기서[후한서]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은 짐승이 아니다. 『說文』에서는 貁는 쥐에 속하는 부류인데, 도는 것을 잘 한다고 했다.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소리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어,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와전되어 注한 것이 잘못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東夷考略』에서 長白山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에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서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 안에서 東珠가 나오니, 귀한 것은 천금이나 한다.”라고 하였다.
原註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集解: 洪頤煊이 말하길, “『爾雅』,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고 했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豽로 적었다고 한다.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다고 하였다. 여기서[후한서]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은 짐승이 아니다. 『說文』에서는 貁는 쥐에 속하는 부류인데, 도는 것을 잘 한다고 했다.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소리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어,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와전되어 注한 것이 잘못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東夷考略』에서 長白山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에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서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 안에서 東珠가 나오니, 귀한 것은 천금이나 한다.”라고 하였다.
건무 연간(25~56)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공헌하고 알현하였다. 건무 25년(49)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주 021. 광무제(재위: 25~57)가 후히 보답하였다. 이때부터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안제 영초 5년(109)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주 022 보병과 기병 7천~ 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군을 노략질해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다주 023. 이후에 다시 귀부하였다. 영령 원년(120)에 부여왕이 사자(嗣子) 위구태를 보내 궁궐에 와서 공헌하였다주 024.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순제 영화 원년(136)에 그 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입조하였다주 025.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열어주고 보냈다. 환제 연희 4년(161)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 조하하고, 공헌하였다주 026. 영강 원년(167)에 부여왕 부태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노략질하였다. 현도태수 공손역이 그를 격파하여 천여 급을 참수했다주 027. 영제 희평 3년(174)에 이르러 부여왕이 다시 장(章)을 올리고 공헌하였다주 028.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으나, 헌제(재위: 189~220) 때에 그 왕이 요동군에 속하기를 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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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약수: 嫩江으로 보는 설(白鳥庫吉, 1970)과 黑龍江으로 보는 설(井上秀雄, 1974; 張博泉, 1998)이 있다.
原註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 營州 柳城縣 동쪽에 饒樂水가 있는데,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北史』에서 “登國 3년 道武가 친히 庫莫奚를 토벌하여 弱水의 남쪽에 이르러, 크게 이들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魏書』, 「太祖紀」에서 “弱落水를 건넜다.”고 하였고, 「蠕蠕傳」에서 “북쪽으로 弱洛水를 넘었다.”고 하였다. 즉 弱水는 省文(글자나 문구를 생략한 것)이다. 『唐書』, 「北狄傳」에서 “太宗이 奚의 족장 可度를 內附로 삼아 饒都督府를 두었고, 阿會部를 弱水州로 삼았으며, 奧失部를 洛瓖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에서 말하길, 『庫典』에서 “庫莫奚를 5부로 나누고, 饒樂水의 북쪽을 다스리는데, 즉 鮮卑의 옛 땅으로 일명 洛瓖水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이는] 饒樂의 잘못된 글자로서, 네 개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니, 그것들은 실은 하나를 말한다. - 번역주 002)
- 번역주 003)
- 번역주 004)
- 번역주 005)
- 번역주 006)
- 번역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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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8)
『論衡』에는 掩㴲水, 『魏略』에는 施掩水, 『梁書』에는 淹滯水, 『隋書』에는 淹水, 「扶餘隆墓誌」에는 㴲水 등으로 나온다. 嫩江, 松花江 또는 그 지류로 추정된다(國史編纂委員會, 1987).
原註 지금 高麗 땅에 蓋斯水가 있는데, 아마도 이 강을 말하는 것 같다. 集解: 惠棟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라고 썼다.”고 하였다. 沈欽韓은 “『魏志』의 注에서 施掩水라고 썼고, 『隋書』, 「百濟傳」에서는 掩水라고 썼으며, 이에 대한 注에서는 蓋斯水로 썼는데, 이는 곧 『漢書』, 「地理志·玄菟郡」條의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써 지금의 鴨淥江이다. - 번역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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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0)
놜: 『三國志』 부여전에는 狖로 나온다.
原註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다. 음은 ‘奴’와 ‘八’의 반음이다. 集解: 洪頤煊이 말하길, “『爾雅』,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고 했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豽로 적었다고 한다.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다고 하였다. 여기서[후한서]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은 짐승이 아니다. 『說文』에서는 貁는 쥐에 속하는 부류인데, 도는 것을 잘 한다고 했다.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소리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어,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와전되어 注한 것이 잘못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集解: 沈欽韓이 말하길, “『東夷考略』에서 長白山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에 있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서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 안에서 東珠가 나오니, 귀한 것은 천금이나 한다.”라고 하였다. - 번역주 011)
- 번역주 012)
- 번역주 013)
- 번역주 014)
- 번역주 015)
- 번역주 016)
- 번역주 017)
- 번역주 018)
- 번역주 019)
- 번역주 020)
- 번역주 021)
- 번역주 022)
- 번역주 023)
- 번역주 024)
- 번역주 025)
- 번역주 026)
- 번역주 027)
- 번역주 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