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 연간, 성조(成祖)가 먼 지방까지 신복(臣服)시키려 했기 때문에 서역과 여러 번국의 조공사절로 인한 폐단이 극심하였다는 글
이보다 앞서 영락 연간(1403~1424)에는, 성조(成祖)가 먼 지방의 각국을 신복(臣服)시키지 않음이 없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에 서역의 사신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여러 번국에서는 중국의 재화와 비단을 탐하였고, 또 교역을 이롭게 여겨 도로상에 왕래하는 자가 끊임이 없었다. 상인들은 대개 거짓으로 조공사절이라 칭하면서 말·낙타·옥석을 많이 휴대하고 [이를] 진헌한다고 공언하였다. 입관(入關)한 뒤에는 일체의 배와 수레 등 수상과 육상의 교통비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비를 모두 담당 관원에게 취하였다. 우전(郵傳)은 공급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군민(軍民)은 수송으로 인해 피폐하였다. 서방으로 돌아갈 때에는, 번번이 연도에서 체류하며 화물(貨物)을 다량 매입하였다. 동서 간 수천 리 사이에 소란스럽게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들어 관민(官民) 상하 간에 원망과 한탄을 하지 않음이 없었다. 조정의 대신 가운데 [이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고, 천자도 [군민(軍民)을] 구휼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급사중 황기(黃驥)
주 001가 그 해로움을 극력으로 아뢰었다. 인종(仁宗)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예부의 관원 여진(呂震)
주 002을 불러 질책하였다.주 003 이로부터 다시 서역으로 출사하지 않았고, 조공사신 역시 점차 줄어들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성조(成祖), 황기(黃驥), 인종(仁宗), 여진(呂震)
- 지명
- 서역, 중국, 서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