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남월왕(南粤)주 001
각주 001)
왕 조타(趙佗)
주 002는 진정(眞定)주 003사람으로 성은 조씨(趙氏)이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양월(揚粵)
주 004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
주 005, 남해군(南海郡)
주 006, 상군(象郡)
주 007南粤 : 粤은 越과 통용자. 古音은 Wut, Wat, Wet으로 읽었다.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말을 이렇게 발음하였다. 越은 즉 ‘人’이라는 뜻이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史記』에는 南越로 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각주 007)
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죄를 지은 자들을 천사시켜[以適徙民]주 008象郡 :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각주 008)
월나라 사람과 섞여 살게 하였다. 그러기를 어언 13년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세가 즉위했을 즈음주 009남해위(南海尉)주 100였던 임오(任囂)
주 011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해서 당시 용천령(龍川令)주 012以適徙民 : 『史記』에는 ‘謫民’으로 되어 있다.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문의 ‘適’은 ‘謫’, 즉 유배를 보내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므로 죄를 지은 자들을 월나라 땅에 옮겨 살게 해서 그 땅의 토착민과 서로 섞여 살게 하였다(適讀曰謫. 謫有罪者, 徙之於越地, 與其土人雜居)로 해석된다. 秦漢代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築城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 많았는데, 秦始皇이 만리장성 축조에 刑徒를 동원한 일이나 漢武帝 때 이광리에게 죄수를 징발하여 대완을 정벌한 일(『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 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颜师古注, “庶人之有罪讁者也.”)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각주 012)
인 조타(趙佗)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진승(陳勝)
주 013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오.주 014또 호걸들은 진(秦)에게서 등을 돌려 잇달아 독립하고 있소. 남해군(南海郡)은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치우쳐 있다 하나, 도적떼 같은 저들의 군대가 언제 이곳까지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소. 그래서 나는 군사를 일으켜 신도(新道)주 015를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코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게 되었소. 우리 번우(番禺)는 뒤로는 험한 산세를 등지고 있고[負山險阻],주 016남북으로 동서로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소.주 017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 또한 한 주(州)주 018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세울 만하오. 군에 있는 장리(長吏)주 019들과는 이런 일을 함께 의논할 수가 없어 공을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리고는 조타에게 조서를 주어[被佗書]주 101남해위(南海尉)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주 021
임오가 죽자 조타는 곧바로 횡포관(橫浦關)주 022, 양산관(陽山關)주 023, 황계관(湟谿關)주 024龍川令 : 顔師古注는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각주 024)
에 격문을 돌려 포고하기를,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 터이니 빨리 도로를 끊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각자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진(秦)이 임명한 관리들 [吏]주 025을 법망에 얽어 죽여 없애고 자신의 일당을 수(守) 또는 가(假)로 삼았다[守假].주 026얼마 후 진이 멸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
무왕(武王)
주 027에 즉위하였다.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 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시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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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南粤 : 粤은 越과 통용자. 古音은 Wut, Wat, Wet으로 읽었다. 고대 강남 토착인들은 ‘人’이라는 말을 이렇게 발음하였다. 越은 즉 ‘人’이라는 뜻이다(黃現璠, 『壯族通史』, 廣西民族出版社, 1988). 『史記』에는 南越로 되어 있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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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象郡 : 『索隱』에 따르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汉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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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以適徙民 : 『史記』에는 ‘謫民’으로 되어 있다. 顔師古注에 따르면, 원문의 ‘適’은 ‘謫’, 즉 유배를 보내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므로 죄를 지은 자들을 월나라 땅에 옮겨 살게 해서 그 땅의 토착민과 서로 섞여 살게 하였다(適讀曰謫. 謫有罪者, 徙之於越地, 與其土人雜居)로 해석된다. 秦漢代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築城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 많았는데, 秦始皇이 만리장성 축조에 刑徒를 동원한 일이나 漢武帝 때 이광리에게 죄수를 징발하여 대완을 정벌한 일(『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 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颜师古注, “庶人之有罪讁者也.”)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 각주 009)
- 각주 10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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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龍川令 : 顔師古注는 “龍川은 南海郡 소속의 縣으로, 현재 순주(龍川, 南海之縣也, 卽今之循州)”라고 하였다.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史記正義』에 인용)에,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龍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史記』「主父偃傳」에 따르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閩越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 ‘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101)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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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4)
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따르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황계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안사고주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 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 [南粵傳] 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실제로 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된다. 첫째, 지금 河南省 陳平縣 서쪽과 鄧縣 東越河이고, 둘째, 지금의 山西省 武鄕縣 서쪽이며, 셋째, 지금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이다. 남월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한데,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의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청대 전조망은 용천이 날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으로 약칭). 황수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는데, 첫째, 하남성 공의시 서쪽, 둘째, 洭水로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 셋째, 洛都水, 樂都水 또는 西寧河로 靑海省 동부의 황하 상류의 지류이다. 이중 남월과 비교적 근접한 것은 두 번째 洭水로 여기에서 말하는 湟谿關은 廣東 連州시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색인어
- 이름
- 조타(趙佗), 임오(任囂), 조타(趙佗), 진승(陳勝), 조타, 임오, 조타, 조타, 무왕(武王)
- 지명
- 진(秦), 양월(揚粵),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 월나라, 진(秦), 남해군(南海郡), 번우(番禺), 진(秦), 진,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