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옥저(東沃沮)의 문화와 역사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주 001. 동쪽은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 예맥과 잇닿아 있다. 그 지형은 동서는 좁고, 남북으로 길다주 002. 사방 가히 1천 리쯤 된다.
토지는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농사를 잘 지으며, 읍락마다 장수가 있다. 사람들의 성격이 질박하고 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손에 쥐고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에 능하다.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구려와 거의 비슷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에 큰 목곽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한쪽 끝을 열어 놓아 문을 만들었다. 새로 죽은 자가 있으면, 먼저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가죽과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이에 뼈를 취하여 목곽 안에 놓아두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하나의 목곽을 쓰며, 나무에 생전의 모습을 새겼는데, 죽은 사람의 수대로 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夷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주 003. 다시 옥저를 현(縣)으로 삼고 낙랑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주 004.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주 005. 그 나라의 영토는 좁고 작았으며,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어 마침내 구려에 복속되었다. 구려는 다시 그 [지역 인물] 중에 대인을 뽑아 사자로 삼고 [토착 거수와] 서로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주 006. 그 조세로서 담비가죽주 007, 생선, 소금, 해초류를 부과하였고, 미녀를 징발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다주 008.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고 부른다. 남옥저로부터 거리가 800여 리였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경계의 남쪽주 009은 읍루와 잇닿아 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북옥저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곧 바위굴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이르러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면 이에 내려와 읍락에 거처하였다. 그 기로들이 말하기를, “일찍이 바다에서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신체에 마치 중국인과 같은 옷을 입었고, 그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해안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에 탄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이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한 “바다 가운데 남자가 없고 여자만이 사는 나라가 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그 나라에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곧 아들을 낳는다.’라고 일렀다.”고 말하였다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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