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의 성립과 제도, 문화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주 001·예맥주 002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접한다. 그 나라는 사방 2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에 음식을 아끼는데, 궁실은 잘 지어 갖추었다. 동이에서 대대로 전해오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속이 [부여와] 닮은 점이 많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리듯이 빨리 간다. 5부가 있는데,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주 003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지만, 점차 [세력이] 미약해져서 이후에 계루부에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 나라에서는 관직을 두었는데, 상가·대로·패자·고추대가주 004·주부주 005·우태·사자·백의·선인주 006이 있다.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고주 007,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취기인(鼓吹伎人)을 하사하였다. 그 습속은 음란하였으나, 모두 스스로 정결하기를 좋아했고, 밤에는 늘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 부른다. 귀신·사직·영성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였다주 008.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어 크게 모였는데,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신(禭神)이라고 부르며, 또한 10월에 수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그 공회(公會)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 꾸몄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을 쓰는데, [중국의] 관책과 같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뇌옥이 없고, 죄인이 있으면 제가가 평의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부인과 자식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았다. 그 나라에서는 혼인할 때 모두 처가로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이후에 [남편의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다. [결혼 후] 곧 장례에 쓸 물건을 조금씩 준비한다. [장례를 치리는 데] 금은과 재물을 모두 써 후하게 장사 지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은 성질이 흉악하고 포악한데, 기력이 있고 전투에 익숙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가 모두 복속하였다. 구려는 일명 맥이(貊耳)이다. 별종(別種)이 있는데주 009,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름하여 소수맥이라고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주 010.
왕망(재위: 8~23) 초에 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를 치고자 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가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강압해 보냈는데, 모두 도망쳤고 새를 나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서 그들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엄우는] 구려후 추(騶)를 꾀어 새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참수하고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주 011.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의 명칭을 고쳐서 하구려후라고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방을 침구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25~57)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켜 주었다주 012. [건무] 23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군에 내속하였다주 013. [건무] 25년(49) 봄에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했는데,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써 초유하니 모두 귀순하였다주 014. 이후 구려왕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보니, 국인이 그를 꺼려하였다주 015. 장성하자 용맹하고 건장해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105) 봄에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군]을 침입하여 여섯 현을 침구하였으므로, 태수 경기가 격파하고, 그 거수를 참수하였다주 016. 안제 영초 5년(111)에 궁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보내오고 현도군에 속하기를 구하였다주 017. 원초 5년(118)에 예맥과 함께 다시 현도군을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주 018. 건광 원년(121) 봄에 유주자사 풍환주 019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새를 나가 그들을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붙잡아서 참수하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주 020. 궁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궁이] 사자(使者)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지에 자리잡고, 한나라의 대군을 막았다. [궁은] 몰래 3천여 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워 2천여 명을 살상하였다주 021. 이에 한나라는 광양·어양·우북평·탁군·요동속국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징발해 함께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 명과 함께 요대를주 022 침공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주 023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 경모·병조연 용단주 024·병마연 공손포가 몸을 바쳐 채풍을 막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포위하였다주 025.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주 026를 보내 2만여 명을 이끌고 주·군과 힘을 합하여 그를 쳐서 격파하고 5백여 명의 수급을 참수하였다. 이해(121)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요광이 상서하여 그 초상을 틈타 군사를 징발해 공격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주 027. [한나라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좋다고 여겨서 허락하였다. 그러나 상서 진충이 말했다. “궁이 생전에 사납고 교활하여 요광이 토벌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마땅히 사절을 보내어 조문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고 그 죄를 용서하여 벌을 주지 않고, 그들이 이후 선(善)해지는 것을 취하십시오.” 안제가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122)에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를 돌려보내고 현도군에 와서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렸다. “수성 등이 포악무도하므로 목을 베고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한데, 다행히 마침 사면을 받고자 죄를 빌며 항복을 청했다. 그러나 선비·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하고 백성을 내몰아 움직인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이제 수백 명을 보냈으니, 교화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후 현관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친히 귀부하여 포로를 보내면, 모두 값을 치를 것이니 한 사람당 비단 40필, 아이[小口]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 그 이후에 예맥이 복속하니, 동쪽 변방의 일이 줄어들었다. 순제 양가 원년(132)에 현도군에 둔전(屯田) 6부를 설치하였다. 질제(재위: 145~146)·환제(재위: 146~167)의 시대에 고구려는 다시 요동군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현령주 028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주 029. 건령 2년(169)에 현도태수 경림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니, 백고가 항복하여 현도군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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