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욕혼((吐谷渾)의 계승
그 뒤 토욕혼(吐谷渾)
주 001
각주 001)
의 손자 섭연(葉延)은 자못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증조인 혁락간(奕洛干)이 처음 창려공(昌黎公)에 봉(封)해졌으니, 자신은 바로 공손(公孫)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예(禮)에 따르면, 왕(王)이 된 조상의 자(字)를 국씨(國氏)로 삼는다 하여, 성(姓)을 토욕혼이라 하고, 또한 국호(國號)로도 삼았다. 섭연의 후손 아시(阿豺) 대(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관작(官爵)을 받았다. 아시의 동생의 아들인 모연(慕延)은 유송(劉宋) 원가 연간(元嘉, 424∼453) 말에 또 스스로 [중국 국가의 책봉 없이] 하남왕(河南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모연이 죽고 그의 종제(從弟) 습인(拾寅)이 섰는데, 마침내 문자를 사용하였고, 성을 쌓고 해자를 두르고, 궁전을 건축하였으며, 그 [수하의] 소왕(小王)들 또한 모두 저택을 세웠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다. 습인이 죽고, 아들 도역후(度易侯)가 섰으며, 역후가 죽자, 역후의 아들 휴류대(休留代)가 섰다. 제(齊) 영명(永明) 연간에 휴류대를 사지절(使持節) 도독서진·하·사삼주(都督西秦河沙三州) 진서장군(鎭西將軍) 호강교위(護羌校尉) 서진·하이주자사(西秦河二州刺史)로 삼았다.吐谷渾: 吐渾이라고도 한다. 본디 鮮卑의 한 지족으로 지금의 遼寧省 凌海市 서북 지대에서 유목하였다. 西晉 말(4세기 초)에 수령 토욕혼이 그 부를 이끌고 서쪽으로 옮겨 감숙성과 청해성 사이에 이르렀다. 그 손자 葉延이 비로소 토욕혼을 國名으로 삼았다. 北魏·北周 사이에 전하여 夸呂에 이르자, 스스로 可汗이라 칭하고 伏俟城(靑海 共和縣 서북, 청해호 서안의 鐵卜卡 古城)에 도읍하였다. 관할 지역은 동서로 약 3,000리이며, 남북으로 천여 리로, 지금의 청해성과 사천 서북 宋潘縣 땅에 상당한다. 隋 開皇 연간에 그 왕 世伏이 隋의 光化公主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唐代에는 왕 諾曷鉢이 駙馬가 되어 靑海王에 책봉되었다. 咸亨 3년(672) 이후 部를 이끌고 靈州로 옮겨가서, 安樂州刺史를 맡겼다. 8세기 중엽에 그 자손이 朔方으로 옮겨 부락이 분산하였으며, 河東에서는 그것을 칭하여 退渾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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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吐谷渾: 吐渾이라고도 한다. 본디 鮮卑의 한 지족으로 지금의 遼寧省 凌海市 서북 지대에서 유목하였다. 西晉 말(4세기 초)에 수령 토욕혼이 그 부를 이끌고 서쪽으로 옮겨 감숙성과 청해성 사이에 이르렀다. 그 손자 葉延이 비로소 토욕혼을 國名으로 삼았다. 北魏·北周 사이에 전하여 夸呂에 이르자, 스스로 可汗이라 칭하고 伏俟城(靑海 共和縣 서북, 청해호 서안의 鐵卜卡 古城)에 도읍하였다. 관할 지역은 동서로 약 3,000리이며, 남북으로 천여 리로, 지금의 청해성과 사천 서북 宋潘縣 땅에 상당한다. 隋 開皇 연간에 그 왕 世伏이 隋의 光化公主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唐代에는 왕 諾曷鉢이 駙馬가 되어 靑海王에 책봉되었다. 咸亨 3년(672) 이후 部를 이끌고 靈州로 옮겨가서, 安樂州刺史를 맡겼다. 8세기 중엽에 그 자손이 朔方으로 옮겨 부락이 분산하였으며, 河東에서는 그것을 칭하여 退渾이라고 하였다.
색인어
- 이름
- 토욕혼(吐谷渾), 섭연(葉延), 혁락간(奕洛干), 공손(公孫), 토욕혼, 섭연, 아시(阿豺), 아시, 모연(慕延), 모연, 습인(拾寅), 습인, 도역후(度易侯), 역후, 역후, 휴류대(休留代), 휴류대
- 지명
- 중국, 유송(劉宋), 중국, 제(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