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중만(澧中蠻)의 진종(陳從) , 누중만(漊中蠻)의 담아건(覃兒健) 등이 반란을 일으킴
숙종(肅宗)
주 001건초(建初) 원년(76) 무릉 예중만(澧中蠻)주 002
진종(陳從) 등이 반란을 일으켜 영양만(零陽蠻) 지역에 들어왔다.주 003그 해 겨울 영양만의 오리(五里) 정부(精夫)가 군(郡)을 위해 진종을 격파하자, 진종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3년 겨울(78) 누중만(漊中蠻)주 004
담아건(覃兒健)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영양(零陽), 작당(作唐), 잔릉(孱陵)
주 005의 경계지역을 불살랐다. 이듬해 봄 형주의 7군과 여남(汝南)
영천(潁川)의 형도(刑徒)와 이사(吏士)주 006
각주 006)
5,000여 인을 징발하여 零陽에서 막아 방비하며, 충중(充中) 오리만(五里蠻) 정부(精夫)로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자 4,000인을 모집하여 예중(澧中)의 적을 격파하였다.주 0075년(80) 봄 담아건 등이 항복을 청하였으나 허용하지 않았다. 군(郡)에서는 이어서 군대를 진격하여 굉하(宏下)
주 008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격파하고, 담아건을 참수하였다. 나머지는 군영을 버리고 누중으로 도망가 다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구걸하니,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무릉에 주둔하였던 군사를 해산하고 각각 공의 등차에 따라 상을 내렸다.주 009
刑徒와 吏士: 刑徒는 漢代 徒刑을 받은 죄수로서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吏士는 중국 고대 官兵을 의미하는데, ‘將’과 대비되어 상설군사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官府의 屬吏를 통칭하기도 하여 단순히 軍士만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방관청은 물론 중앙관청에서도 보유하고 있으면서, 단순한 군사적 활동 외에 행정 보조에도 종사하는데, 상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徵發된 兵士와는 다르며, 고된 활동과 책임이 부과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분적으로 賤民이나 罪人은 아니라는 점에서 刑徒와도 구별된다. 일부에서 ‘刑徒’ 앞에 ‘弛’가 있다고 하여, ‘弛刑徒’를 ‘馳刑徒’로 파악하여 ‘馳刑徒’를 刑具를 차지 않은 刑徒로 해석하기도 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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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刑徒와 吏士: 刑徒는 漢代 徒刑을 받은 죄수로서 강제노역에 종사하고, 吏士는 중국 고대 官兵을 의미하는데, ‘將’과 대비되어 상설군사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官府의 屬吏를 통칭하기도 하여 단순히 軍士만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방관청은 물론 중앙관청에서도 보유하고 있으면서, 단순한 군사적 활동 외에 행정 보조에도 종사하는데, 상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徵發된 兵士와는 다르며, 고된 활동과 책임이 부과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분적으로 賤民이나 罪人은 아니라는 점에서 刑徒와도 구별된다. 일부에서 ‘刑徒’ 앞에 ‘弛’가 있다고 하여, ‘弛刑徒’를 ‘馳刑徒’로 파악하여 ‘馳刑徒’를 刑具를 차지 않은 刑徒로 해석하기도 한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숙종(肅宗), 진종(陳從), 진종, 진종, 담아건(覃兒健), 담아건, 담아건
- 지명
- 무릉, 영양, 영양, 영양(零陽), 작당(作唐), 잔릉(孱陵), 형주, 여남(汝南), 영천(潁川), 零陽, 충중(充中), 예중(澧中), 굉하(宏下), 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