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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일본사료집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귀국과 쓰시마번의 논의

眞重 등은 번(藩)으로 돌아가서 곧 杉村眞顯(主稅를 이른다)를 정관(正官)으로 하고 幾度貞直(나중에 方命으로 개명하였다. 六右衛門을 이른다)를 부관(副官)으로 하고 陶山存을 도선주(都船主)로 하여, 다시 바다를 건너가 서계를 고쳐 쓰게 하여 받아내고자 보내려고 하였다.주 001
각주 001)
『竹嶋紀事』에 의하면, 1695년 6월 말 前 번주 요시자네는 울릉도 쟁계와 관련하여 조선 측이 발급한 ‘再度返簡’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家老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를 正使로 하는 대차왜(부관 幾度六右衛門, 도선주 陶山庄右衛門)를 조선에 파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使行은 7월이 되자 연기가 되었다. 그것은 조선과의 직접교섭을 재개하기 전에 막부와의 협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번론(藩論)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이는 杉村眞顯는 바로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이다. 본 사료 말미의 《고이(攷異)》에도 “어떤 본에서는 ‘우네메(采女)를 이른다[稱采女]’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내 생각에는 처음에는 우네메(采女)라고 칭했다가 후에 치카라(主稅)로 바꾼 것 같다.”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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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顯은 사람 됨됨이가 조심스럽고 꿋꿋하고 바른 사람이라 절개와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저 나라의 서계에 국경을 넘어왔다느니 침범하였다느니 하는 등의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명령을 받고 나서는 동행들과 비밀스럽게 서로 의논하여 말하였다.
“저 나라가 고집스럽고 혼미하여 수긍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곧장 동래(東萊)로 가서 성문(城門)에서 할복하여 더러운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보이겠다.”
소문이 자자하게 전해지자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眞顯 등이 바다를 건너갔다가 일이 만약 잘 되지 않는다면 재앙이 생길 틈을 초래하게 되어 아무리 후회하여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연유를 갖추어 진계(陳啟)하는 것만 못합니다. 일단 웃전의 재결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에 멈추었다.

  • 각주 001)
    『竹嶋紀事』에 의하면, 1695년 6월 말 前 번주 요시자네는 울릉도 쟁계와 관련하여 조선 측이 발급한 ‘再度返簡’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家老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를 正使로 하는 대차왜(부관 幾度六右衛門, 도선주 陶山庄右衛門)를 조선에 파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使行은 7월이 되자 연기가 되었다. 그것은 조선과의 직접교섭을 재개하기 전에 막부와의 협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번론(藩論)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이는 杉村眞顯는 바로 스기무라 우네메(杉村采女)이다. 본 사료 말미의 《고이(攷異)》에도 “어떤 본에서는 ‘우네메(采女)를 이른다[稱采女]’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내 생각에는 처음에는 우네메(采女)라고 칭했다가 후에 치카라(主稅)로 바꾼 것 같다.”고 덧붙이고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眞重, 杉村眞顯, 幾度貞直, 方命, 六右衛門, 陶山存, 眞顯, 眞顯
지명
동래(東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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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귀국과 쓰시마번의 논의 자료번호 : ud.k_0004_0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