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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일본사료집

동래부(東萊府)의 회답

  • 발신자
    동래부(東萊府)
  • 수신자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
  • 발송일
    1695년 6월 (음)(을해년(1695) 6월 일)
이에 이 서한을 재판에게 보내고 그날 배에 올라 바람을 기다렸다. 12일에 역관이 동래에서 의문에 답한 서신을 가지고 왔는데,주 001
각주 001)
다다 요자에몬 일행은 4가지 조항의 의문점에 대한 동래부의 회신을 받지 못한 채 6월 10일 왜관을 출발, 귀국길에 올랐다. 동래부의 회답서를 받은 것은 6월 12일 그들의 배가 부산 앞 바다의 절영도에 계류(繫留) 중이었을 때이고, 17일에 쓰시마 후추(府中)에 도착했다. (『竹嶋紀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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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의심하여 물은 4개 조항의 일을 한 단 한 단 밝혀서 깨뜨리려고 하면 매우 자질구레해질 것이니, 지금은 우선 그 대략을 취해서 말하겠습니다. 일찍이 82년 전 갑인년(甲寅年)주 002
각주 002)
16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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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귀주에서 두왜(頭倭)주 003
각주 003)
두왜란 쓰시마번이 파견한 사절단의 우두머리, 즉 정사(正使)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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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과 사공(格倭) 13명이 의죽도의 크기와 실태를 탐사하는 일로 서계를 가지고 왔는데, 조정에서는 외람되게 국경을 넘었다 하여 접대를 허락하지 않았고, 다만 본부(本府)의 부사(府使) 박경업(朴慶業)을 시켜 답서를 쓰게 하였으니, 그 대략은 이렇습니다.
‘이른바 의죽도란 실은 우리나라의 울릉도로서, 경상도강원도 두 도의 바다에 끼여 있습니다. 이것은 『여도(輿圖)』에 실려 있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신라와 고려 이래로부터 일찍이 방물(方物)주 004
각주 004)
지방의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임금께 바치는 그 고장의 산물(産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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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아 취한 일이 있었고,주 005
각주 005)
(1) 『삼국사기(三國史記)』권4, 新羅本記 4, 智證麻立干 13년 6월 조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복(歸復)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伊湌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師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2) 『고려사(高麗史)』권1, 世家 1, 태조 13년(930) 8월 병오 조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기에 백길(白吉)을 정위(正位)로, 토두(土豆)를 정조(正朝)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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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거듭 도망간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황폐하게 버려져 있으나,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여 시끄러운 틈이 생기는 단서를 열겠습니까? 귀주와 우리나라가 왕래하고 통행하는 방법은 오직 이 한 길밖에 없으니, 이 밖에는 표류한 선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다 적의 선박으로 보고 논하여 판단하겠습니다. 우리 진(鎭)과 연해 지역의 장관(將官)들은 오직 약속을 엄중히 지킬 뿐이니, 오직 바라건대 귀주에서는 국토를 구획하는 데에 분간이 있음을 살피고 국토의 경계를 침범하기 어려움을 알아서 각각 신의를 지켜 사리에 어그러지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주 006
각주 006)
『通航一覽』第4, 21~22쪽에 수록된 동래부사 윤수겸과 박경업의 서계는 다음과 같다.
【1】 윤수겸 서계(萬曆 42년[1614] 7월)

【2】 박경업 서계(萬曆 42년[1614]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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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서신의 내용은 보내온 서신의 질문 네 번째 조항에 또한 실려 있는데, 상세함과 간략함은 비록 다르지만 큰 뜻은 동일합니다. 만약 이 일의 전말을 알고자 한다면 이 한 장의 서신으로 충분할 것이니, 어째서 허다하게 많은 갈등의 말들을 쓰겠습니까? 그 후에 일본에서 세 차례 표류해 왔던 왜인들은 어떤 이는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왔다고 하고 어떤 이는 죽도(竹島)에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하였는데, 예조에서는 서계를 보내며 아울러 표류해 온 왜인들을 돌아가는 배에 태워서 귀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경을 넘어 침범한 일을 가지고 질책하지 않았던 것은 전후의 일들이 각각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왜(頭倭)가 왔을 때 신의(信義)로써 질책했던 것은 형지(形止)를 탐색하려고 침범하여 넘어온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표류한 배가 정박하였을 때에 그냥 돌아가는 편에 딸려 보낸 것은 물에 빠져 죽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속히 돌려보내 주기를 원했기에 살려 보내는 일이 급해서 다른 일은 물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맹을 맺은 나라와 교류하는 예의로서 당연한 일이니, 그것이 어찌 우리 국토를 허용하는 뜻이 있어서였겠습니까? 박경업의 답서가 시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말뜻도 가장 상세하니 실제 근거로 삼을만한 글입니다. 지금 앞뒤 일의 상황이 각기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회답한 편지에서 말을 얽은 차이와 다른 점만을 뽑아내어 마치 따져 물어 속속들이 밝히려는 듯하니, 이 어찌 정성과 신의로 서로 교류하는 의리겠습니까? 수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왕래하며 수색하고 검사한 일은 우리 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라는 책에 신라와 고려, 그리고 본조의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에서 여러 차례 관인을 섬에 파견하였던 일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전날 접위관 홍중하(洪重夏)가 내려왔을 때에 귀주의 소헤에(總兵衛) 주 007
각주 007)
아비루 소헤에(阿比留總兵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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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는 사람이 역관 박재흥(朴再興)에게 말하기를 ‘『여지승람』에 보면, 울릉도는 과연 귀국의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책을 귀주의 사람들이 일찍이 보았기에 분명히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요사이 관리가 자주 왕래하지 않은 것과 고기 잡는 백성들을 멀리 들어가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은 대개 바닷길이 험한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예전부터 기재했던 서적을 버리고 믿지 않은 채 도리어 저 나라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섬에서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의심거리를 삼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박경업의 서신 가운데 이미 ‘의죽도(礒竹島)는 사실 우리나라의 울릉도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박재흥이 정관왜(正官倭)와 만났을 때에 정관이 우리나라의 『지봉유설(芝峯類說)』내용을 발설하면서,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의죽도가 바로 울릉도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섬에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설은 본래 우리나라 서적에 실려 있었던 것이나, 이번에 그 말의 실마리를 발설한 것은 사실 귀주 정관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회답한 서계 가운데 이른바 ‘하나의 섬인데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 서적에 기재되어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귀주의 사람들도 또한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의심을 두어 질문을 청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계유년(癸酉年)의 첫 번째 답서에서 이른바 ‘귀주의 죽도’와 ‘우리 경계의 울릉도’라는 말을 했던 것은 마치 죽도울릉도를 두 개의 섬으로 여기는 듯한 점이 있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바로 당시 예조의 관원이 이전의 제도에 밝지 못했던 소치로 조정이 바야흐로 그 잘못된 말을 문책하였습니다. 그런 즈음에 귀주에서 그 서신을 내보내어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청에 따라 고쳐서 첫 번째 서계의 잘못을 바로잡았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오직 마땅히 고쳐 보낸 서계 하나만을 상고하여 믿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서계는 이미 착오가 있어서 고쳤는데, 어찌 족히 오늘날에 증거로 삼아 의문을 제기하는 단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밖에 번다한 이야기는 다 말하지 못하오니, 아울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을해년(1695) 6월 일.”

  • 각주 001)
    다다 요자에몬 일행은 4가지 조항의 의문점에 대한 동래부의 회신을 받지 못한 채 6월 10일 왜관을 출발, 귀국길에 올랐다. 동래부의 회답서를 받은 것은 6월 12일 그들의 배가 부산 앞 바다의 절영도에 계류(繫留) 중이었을 때이고, 17일에 쓰시마 후추(府中)에 도착했다. (『竹嶋紀事』) 바로가기
  • 각주 002)
    1614년. 바로가기
  • 각주 003)
    두왜란 쓰시마번이 파견한 사절단의 우두머리, 즉 정사(正使)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지방의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임금께 바치는 그 고장의 산물(産物). 바로가기
  • 각주 005)
    (1) 『삼국사기(三國史記)』권4, 新羅本記 4, 智證麻立干 13년 6월 조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복(歸復)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伊湌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師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2) 『고려사(高麗史)』권1, 世家 1, 태조 13년(930) 8월 병오 조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기에 백길(白吉)을 정위(正位)로, 토두(土豆)를 정조(正朝)로 삼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通航一覽』第4, 21~22쪽에 수록된 동래부사 윤수겸과 박경업의 서계는 다음과 같다.
    【1】 윤수겸 서계(萬曆 42년[1614] 7월)

    【2】 박경업 서계(萬曆 42년[1614]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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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아비루 소헤에(阿比留總兵衛).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박경업(朴慶業), 박경업, 홍중하(洪重夏), 소헤에(總兵衛), 박재흥(朴再興), 박경업, 박재흥
지명
의죽도, 의죽도, 울릉도, 경상도, 강원도, 울릉도, 죽도(竹島), 울릉도, 의죽도(礒竹島), 울릉도, 의죽도, 울릉도, 죽도, 울릉도, 죽도, 울릉도
서명
『여도(輿圖)』, 『여지승람(輿地勝覽)』, 『여지승람』, 『지봉유설(芝峯類說)』, 『지봉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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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東萊府)의 회답 자료번호 : ud.k_0004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