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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번의 구상서(口上書) 2통

 
前 번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구상서(口上書)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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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번은 막부의 죽도 도해 금지 결정을 양사(兩使)에게 구두로 전달했으나 본문에도 있듯이 양사는 이 문제가 구두만으로는 결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문서로 만들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에 쓰시마번은 구상서 2통과 眞文(한문체) 2통을 교부했다. 본문에 기재된 총 4건의 ‘口上之覺’과 ‘眞文’이 이에 해당한다. 진문이 추가로 교부된 것도 구상서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양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서 2통과 진문 2통 모두 발신자, 수신자,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정식 외교서한이 아닌 문건을 양사에게 발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쓰시마번은 이 전달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식 답서를 요구했다. 조선은 이 건에 대해 답서를 발급하기는 했지만, 그 답서는 양사가 쓰시마에서 받아온 4통의 문건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쓰시마번은 막부가 ‘구두로 전달할 것’이라고 지시한 점을 의식하여, 조선의 답서에서 ‘쓰시마번이 이 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먼저 서한을 보냈다’는 구절을 삭제, 수정하기 위해 다시 조선 정부와 긴 교섭을 벌여야 했다. (『池內敏』)


 

口上之覺

 

몇 해 전 쓰시마번주가 다케시마 건에 관해 사자(使者: 多田與左衛門)를 보내 전했는데, 그때 중간에서 전달한 사람이 사자에게 들려준 내용을 [사자가] 귀국하여 내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에도에서 로주에게 말씀드렸더니 “그 섬은 이나바(因幡)·호키(伯耆)에 부속된 곳도 아니고 일본이 취한 적도 없다. 빈 섬이므로 호키 사람이 건너가서 고기를 잡았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조선인이 건너와 뒤섞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서 앞에서 쓰시마번주님이 통보하기는 했지만 조선이 거리도 가깝고 호키에서는 멀다고 하니, 다시는 이쪽 어민이 건너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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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막부가 돗토리번에 ‘죽도 도해 금지령’을 하달하기 직전 쓰시마번의 前 번주 소 요시자네에게 그 의향을 전한 상황을 말한다.
1693년 울릉도에 도항한 오야 가문의 선원들에 의해 돗토리번으로 연행된 안용복과 박어둔은 그 해 나가사키(長崎), 쓰시마번을 거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송환 사자로 임명된 다다 요자에몬(多田與左衛門)은 안용복과 박어둔을 12월에 조선 측에 인도하는 한편, 외교교섭에도 착수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조선은 ‘울릉도와 竹島는 한 개의 섬이며 그러한 섬에 조선인의 도해를 금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양국 誠信의 道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발급했다. 이것은 당초 쓰시마번이 조선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했던 답변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교섭이 점차 고착상태에 빠지자 쓰시마번은 그간의 교섭 경과를 막부에 보고한 뒤 막부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 교섭하기로 했다. 1695년 10월 前 번주 소 요시자네가 에도에 도착하여 그간 조선과 주고받은 문서들을 제출하고 로주 아베 마사타케(阿部正武)와 교섭방침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쓰시마번이 외교문서로 인해 조선과 장기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한편에서 1695년 로주 아베 마사타케는 돗토리번에 12월 24일부로 일종의 ‘질의서’를 보내 다케시마의 소속에 관해 문의했다. 그러자 돗토리번은 ‘竹島는 이나바(因幡), 호키(伯耆)에 속하지 않는다. (중략) 竹島(울릉도), 松島(독도) 그 외 兩國(이나바, 호키)에 부속된 섬은 없다’고 회답했다. 이 회답이 막부의 인식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듬해인 1696년 1월 로주 아베 마사타케는 쓰시마번의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에게 ‘竹島에 일본인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없고 일본의 것이었다는 증거도 없는 이상 竹島에 관해서는 이쪽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중략) 위광(威光)이나 무위(武威)를 배경으로 하여 조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 또한 로주 도다 타다마사(戸田忠昌)는 에도에 체재 중이던 쓰시마번 소 요시자네에게 竹島에 관한 覺書를 1통 건네며 ‘예전부터 호키 요나고의 町人 2명이 竹島에 가서 어로를 해왔는데, 조선인도 그 섬에 와서 일본인과 섞여 어로를 하게 되어 일본인의 어로가 무익해졌으므로 향후 요나고 町人이 도해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전했다. 곧이어 막부는 돗토리번에도 번주 이케다 쓰나키요(池田綱淸)를 수신자로 하여 1696년 1월 28일부로 죽도 도해를 금지하는 老中連署奉書를 전달했다. (『館守每日記』, 『竹島紀事』, 『竹嶋之書附』, 『御用人日記』, 『鳥取藩史』, 『竹島考證』)

성신(誠信)의 뜻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이처럼 예상했던 것보다 훌륭한 결정을 내려 주셨으니 그 답례로 예조(禮曺)에서 이쪽[쓰시마]으로 서한을 보내야 합니다. 막부(東武)에 자세히 보고해야 하므로, 이러한 뜻을 구체적으로 조정에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口上之覺

 

금년 여름에 조선인 11명이 배 1척을 타고 호소할 것이 있다면서 이나바로 건너왔는데, 조선과 관련된 업무는 오로지 이쪽[대마번]에서만 전담하고 다른 번에서는 과거에 다루지 않는 것이 국법(國法)이므로, 그들의 호소 내용을 듣지 않고 추방한다고 로주(老中)님이 우리 쪽에 말씀하신 것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예로부터 정한 약속도 있는데, 우리를 제쳐두고 다른 번에 건너가서 소송하겠다고 하는 것을 쇼군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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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쇼군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됩니다. 이 일이 조선 조정(朝廷)의 의도로 파견된 것이라면 참으로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반드시 사신(使臣)을 보내서 시비를 가려야겠지만 혹시 아랫사람들이 한 짓일 수도 있어서 삼가고 있습니다. 향후 이와 같은 일이 생기면 조선을 위해서도 결코 좋지 않으므로 이 뜻을 조선 조정에 반드시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주 001
쓰시마번은 막부의 죽도 도해 금지 결정을 양사(兩使)에게 구두로 전달했으나 본문에도 있듯이 양사는 이 문제가 구두만으로는 결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문서로 만들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에 쓰시마번은 구상서 2통과 眞文(한문체) 2통을 교부했다. 본문에 기재된 총 4건의 ‘口上之覺’과 ‘眞文’이 이에 해당한다. 진문이 추가로 교부된 것도 구상서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양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서 2통과 진문 2통 모두 발신자, 수신자,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정식 외교서한이 아닌 문건을 양사에게 발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쓰시마번은 이 전달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식 답서를 요구했다. 조선은 이 건에 대해 답서를 발급하기는 했지만, 그 답서는 양사가 쓰시마에서 받아온 4통의 문건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쓰시마번은 막부가 ‘구두로 전달할 것’이라고 지시한 점을 의식하여, 조선의 답서에서 ‘쓰시마번이 이 건과 관련하여 조선에 먼저 서한을 보냈다’는 구절을 삭제, 수정하기 위해 다시 조선 정부와 긴 교섭을 벌여야 했다. (『池內敏』)
주 002
이것은 막부가 돗토리번에 ‘죽도 도해 금지령’을 하달하기 직전 쓰시마번의 前 번주 소 요시자네에게 그 의향을 전한 상황을 말한다.
1693년 울릉도에 도항한 오야 가문의 선원들에 의해 돗토리번으로 연행된 안용복과 박어둔은 그 해 나가사키(長崎), 쓰시마번을 거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송환 사자로 임명된 다다 요자에몬(多田與左衛門)은 안용복과 박어둔을 12월에 조선 측에 인도하는 한편, 외교교섭에도 착수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조선은 ‘울릉도와 竹島는 한 개의 섬이며 그러한 섬에 조선인의 도해를 금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양국 誠信의 道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발급했다. 이것은 당초 쓰시마번이 조선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했던 답변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교섭이 점차 고착상태에 빠지자 쓰시마번은 그간의 교섭 경과를 막부에 보고한 뒤 막부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 교섭하기로 했다. 1695년 10월 前 번주 소 요시자네가 에도에 도착하여 그간 조선과 주고받은 문서들을 제출하고 로주 아베 마사타케(阿部正武)와 교섭방침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쓰시마번이 외교문서로 인해 조선과 장기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한편에서 1695년 로주 아베 마사타케는 돗토리번에 12월 24일부로 일종의 ‘질의서’를 보내 다케시마의 소속에 관해 문의했다. 그러자 돗토리번은 ‘竹島는 이나바(因幡), 호키(伯耆)에 속하지 않는다. (중략) 竹島(울릉도), 松島(독도) 그 외 兩國(이나바, 호키)에 부속된 섬은 없다’고 회답했다. 이 회답이 막부의 인식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듬해인 1696년 1월 로주 아베 마사타케는 쓰시마번의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에게 ‘竹島에 일본인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없고 일본의 것이었다는 증거도 없는 이상 竹島에 관해서는 이쪽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중략) 위광(威光)이나 무위(武威)를 배경으로 하여 조리에 맞지 않는 일을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 또한 로주 도다 타다마사(戸田忠昌)는 에도에 체재 중이던 쓰시마번 소 요시자네에게 竹島에 관한 覺書를 1통 건네며 ‘예전부터 호키 요나고의 町人 2명이 竹島에 가서 어로를 해왔는데, 조선인도 그 섬에 와서 일본인과 섞여 어로를 하게 되어 일본인의 어로가 무익해졌으므로 향후 요나고 町人이 도해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전했다. 곧이어 막부는 돗토리번에도 번주 이케다 쓰나키요(池田綱淸)를 수신자로 하여 1696년 1월 28일부로 죽도 도해를 금지하는 老中連署奉書를 전달했다. (『館守每日記』, 『竹島紀事』, 『竹嶋之書附』, 『御用人日記』, 『鳥取藩史』, 『竹島考證』)
주 003
당시의 쇼군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
 
지명
이나바(因幡) , 호키(伯耆) , 호키 , 호키 , 이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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