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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일본사료집

문위행(問慰行)의 도일(渡日)

텐류인공(소 요시자네)의 재임 축하 및 레이코인공(靈光院公) 주 001
각주 001)
레이코인공(靈光院公): 쓰시마번 4대 번주 소 요시쓰구(宗義倫). 官位는 右京大夫, 靈光院은 戒名. 寛文 11년(1671) 3월 26일 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貞享 원년(1684) 12월 従四位下, 右京大夫에 서임되었다. 요시자네의 장남이 일찍 사망하여 世子로 지명되었고, 元禄5년 (1692) 6월 27일 요시자네의 隠居로 家督을 상속하고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요시쓰구는 나이가 어려서 실권은 요시자네가 섭정으로서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元禄7년(1694) 9월 27일, 번주 재위 2년 만에 부친 요시자네보다 먼저 에도에서 향년 24세로 사망하였다. (『人名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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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조문을 겸하여 역관 양사(兩使) 변동지(卞同知)·송판사(宋判事)가 도해하였다.주 002
각주 002)
변동지(卞同知)·송판사(宋判事)는 각각 당상관(堂上官) 변정욱(卞廷郁)·당하관(堂下官) 송유양(宋裕養)을 가리킨다. 이들 문위행은 1696년 10월 쓰시마에 건너갔다. 한편 문위행이란 조선이 대마번의 번주 소오씨에게 파견한 외교사절로, 왜학역관(倭學譯官, 일본어를 통역하는 고급역관)이 사절의 정사(正使)였으므로 역관사(譯官使) 또는 도해역관사(渡海譯官使)라고도 한다. 통신사가 막부의 쇼군에게 파견된 외교사절이라면 문위행의 임무는 대마번주의 경조사 참여와 번주 소오씨가 참근교대(參勤交代)를 하고 에도에서 쓰시마로 귀환한 것에 대한 축하였다. 이런 이유로 파견된 사례가 1632년의 문위행이고, 이후 문위행이 정례화된 것으로 보인다. 문위행이 정식 외교사절이 된 것은 대륙에서 여진족(淸)이 흥기하여 북방의 군사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이와 더불어 일본 정세의 탐색이 긴급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위행은 번주가 에도에서 머물다 쓰시마로 돌아온 후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동정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문위행은 평균 4~5년에 한 번씩, 1860년까지 약 50여 회 파견되었다. 20~30년마다 한 번씩 파견되는 통신사보다 훨씬 빈번하게 파견된 탓에 양국의 통교에서 파생되는 실질적인 현안문제에 관해 교섭하고 해결하는 데는 더 효과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문위행의 구성은 통신사행의 축소판으로, 최소 45명에서 최대 150여 명까지 인원 수에서 큰 편차를 보였으며, 당상역관(堂上譯官), 당하역관(堂下譯官), 군관, 반당(伴倘), 선장, 도훈도(都訓導), 서계색(書契色), 소동(小童), 소통사(小通事), 예단색(禮單色), 반정색(盤纏色), 주방색(廚房色), 호방색(戶房色), 급창(及唱), 포수(砲手), 사령(使令), 취수(吹手), 기수(旗手), 사공, 격군(格軍)으로 구성되었다. 문위행의 쓰시마 체재는 짧으면 보름, 길면 4개월 정도 걸렸으며, 쓰시마에 체재하는 동안 본래의 업무인 대마번주와 쇼군가(將軍家)와 관련된 경조사에 대해 문위하거나 또는 통신사 파견에 앞서 외교문서의 양식, 회답양식, 예단의 수량 등 실무상의 제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또한 문위행은 부산 왜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쟁이나 분규에 대해서도 대마번청과 직접 상의하기도 했다. 문위행은 외교 이외에 무역에도 참여하여 정식 무역통로를 통해 조달하기 어려운 물품을 쓰시마에 갔을 때 직접 구해오기도 했는데, 무역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자 문위행 일행과 쓰시마 사람 사이에 밀무역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위행의 파견이 가장 빈번했던 때는 대조선 무역이 가장 번성하여 대마번의 재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까지의 시기이다. 이후 무역의 쇠퇴와 더불어 대마번의 재정이 악화되자 파견횟수도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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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번주의 저택에서 텐류인공이 양사(兩使)와 대면하고, “竹嶋이나바(因幡)·호키(伯耆)에 속하지 않으며 빈 섬(空嶋)인데 호키 백성들이 건너가서 어획을 했다. 최근에는 조선인이 도항하여 [양국인이] 뒤섞여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다시는 우리 어민들이 건너가지 못하도록 막부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을 양사(兩使)에게 직접 전하셨다.

  • 각주 001)
    레이코인공(靈光院公): 쓰시마번 4대 번주 소 요시쓰구(宗義倫). 官位는 右京大夫, 靈光院은 戒名. 寛文 11년(1671) 3월 26일 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貞享 원년(1684) 12월 従四位下, 右京大夫에 서임되었다. 요시자네의 장남이 일찍 사망하여 世子로 지명되었고, 元禄5년 (1692) 6월 27일 요시자네의 隠居로 家督을 상속하고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요시쓰구는 나이가 어려서 실권은 요시자네가 섭정으로서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元禄7년(1694) 9월 27일, 번주 재위 2년 만에 부친 요시자네보다 먼저 에도에서 향년 24세로 사망하였다. (『人名辞典』) 바로가기
  • 각주 002)
    변동지(卞同知)·송판사(宋判事)는 각각 당상관(堂上官) 변정욱(卞廷郁)·당하관(堂下官) 송유양(宋裕養)을 가리킨다. 이들 문위행은 1696년 10월 쓰시마에 건너갔다. 한편 문위행이란 조선이 대마번의 번주 소오씨에게 파견한 외교사절로, 왜학역관(倭學譯官, 일본어를 통역하는 고급역관)이 사절의 정사(正使)였으므로 역관사(譯官使) 또는 도해역관사(渡海譯官使)라고도 한다. 통신사가 막부의 쇼군에게 파견된 외교사절이라면 문위행의 임무는 대마번주의 경조사 참여와 번주 소오씨가 참근교대(參勤交代)를 하고 에도에서 쓰시마로 귀환한 것에 대한 축하였다. 이런 이유로 파견된 사례가 1632년의 문위행이고, 이후 문위행이 정례화된 것으로 보인다. 문위행이 정식 외교사절이 된 것은 대륙에서 여진족(淸)이 흥기하여 북방의 군사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이와 더불어 일본 정세의 탐색이 긴급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위행은 번주가 에도에서 머물다 쓰시마로 돌아온 후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동정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문위행은 평균 4~5년에 한 번씩, 1860년까지 약 50여 회 파견되었다. 20~30년마다 한 번씩 파견되는 통신사보다 훨씬 빈번하게 파견된 탓에 양국의 통교에서 파생되는 실질적인 현안문제에 관해 교섭하고 해결하는 데는 더 효과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문위행의 구성은 통신사행의 축소판으로, 최소 45명에서 최대 150여 명까지 인원 수에서 큰 편차를 보였으며, 당상역관(堂上譯官), 당하역관(堂下譯官), 군관, 반당(伴倘), 선장, 도훈도(都訓導), 서계색(書契色), 소동(小童), 소통사(小通事), 예단색(禮單色), 반정색(盤纏色), 주방색(廚房色), 호방색(戶房色), 급창(及唱), 포수(砲手), 사령(使令), 취수(吹手), 기수(旗手), 사공, 격군(格軍)으로 구성되었다. 문위행의 쓰시마 체재는 짧으면 보름, 길면 4개월 정도 걸렸으며, 쓰시마에 체재하는 동안 본래의 업무인 대마번주와 쇼군가(將軍家)와 관련된 경조사에 대해 문위하거나 또는 통신사 파견에 앞서 외교문서의 양식, 회답양식, 예단의 수량 등 실무상의 제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또한 문위행은 부산 왜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쟁이나 분규에 대해서도 대마번청과 직접 상의하기도 했다. 문위행은 외교 이외에 무역에도 참여하여 정식 무역통로를 통해 조달하기 어려운 물품을 쓰시마에 갔을 때 직접 구해오기도 했는데, 무역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자 문위행 일행과 쓰시마 사람 사이에 밀무역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위행의 파견이 가장 빈번했던 때는 대조선 무역이 가장 번성하여 대마번의 재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까지의 시기이다. 이후 무역의 쇠퇴와 더불어 대마번의 재정이 악화되자 파견횟수도 감소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텐류인공, 소 요시자네, 레이코인공(靈光院公), 텐류인공
지명
竹嶋, 이나바(因幡), 호키(伯耆), 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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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위행(問慰行)의 도일(渡日) 자료번호 : ud.k_0001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