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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우산국의 신라복속 사실부터 조선시대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미상
  • 출전
사료해설
본 사료는 우산국의 신라복속 사실부터 조선시대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다.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 울릉도는 우산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조건을 믿고 신라에 복종하지 않다가 지증왕 대에 이사부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 조공을 해왔다. 그리고 조선 성종대에는 별도로 삼봉(도)가 있다고 해서 박종원(朴宗元)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으나 풍랑으로 정박하지는 못하고 울릉도에 들러 큰 대나무와 큰 복어를 채취하여 가져왔으며,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정부가 ‘울릉도 쟁계’이전에도 이미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鬱陵島在蔚珍縣東海中三峯岌嶪撑空南峯稍平風日淸明則峯頭樹木及山根沙渚歷歷可見風便則二日可到一說于山鬱陵本一島地方百里新羅時恃險不服智證王十二年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國人愚悍難以威服可以計服乃多以木造獅子分載戰艦抵其國誑之曰汝若不服卽放此獸踏殺之國人恐懼來降 麗太祖十三年其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毅宗聞鬱陵地廣土肥可以居民遣溟州道監倉金柔立往視柔立回奏云島中有大山從山頂向東行至海一萬餘步向西行一萬三千餘步向南行一萬五千餘步向北行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或有石佛鐵鐘石塔多生柴胡藁本石南草後崔忠獻獻議遣使往觀之有屋基破礎宛然不知何代人居也於是移東郡民以實之及使還多以珍木海錯進之後屢以風濤所蕩覆舟人多物故因還其居民本朝 太宗時聞流民逃其島者甚衆再命三陟人金麟雨刷出空其地麟雨言土地饒沃竹大如杠鼠大如描桃核大如升凡物稱是 世宗朝遣南灝往搜逋民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還其地遂空 成宗二年有告別有三峯[島]者乃遣朴宗元往覓之因風濤不得泊而還一船泊鬱陵島只取大竹大鰒魚回啓云島中無居民云矣近聞倭人占据礒竹島或謂蔚陵島也海浪島於我國爲近中朝及我國人逃入本島漸至滋蔓 燕山朝遣田霖搜括島內遼東人六十四名本國人四十八名自頃年來海賊出沒寇抄兩西至湖南無月不被其害朝廷於白翎島安興梁設鎭以備之其禍稍息然後患可慮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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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의 신라복속 사실부터 조선시대 연산군대에 이르기까지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 자료번호 : sd.d_0049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