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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江原道[號關東] 蔚珍

사료해설
1864년(고종 1)경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에는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섬으로 울릉도에 관한 기술이 들어 있다. 주된 내용은 김정호가 실학자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술한 『여도비지(輿圖備志)』와 거의 유사하다.
먼저 울릉도는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위치하며, 동으로는 일본의 은기주(隱岐州)와 와 가깝다고 기술하고, 우산국(于山國) 땅으로 울릉(蔚陵)·우릉(芋陵)·우릉(羽陵)·무릉(武陵)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면서 울릉도의 지형적 특성과 특산물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울릉도의 역사에 대한 기술로 이어지는데, 우산국이 이사부의 정복으로 신라에 복속되었고, 고려 왕조에도 조공을 바쳤고, 현종대에는 우산국이 동북 여진(女眞)의 침략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며 농기구를 보냈다는 사실도 기술하였다. 그리고 고려 의종대와 최씨 무인집권기 명종대에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이 살 수 있는지 조사하게 하였으며, 울릉도를 다녀온 관리들이 진기한 나무와 해산물을 많이 가져와 바쳤다고 하였다. 충목왕 때에도 울릉도 사람이 내조(來朝)하였으며, 1379년(우왕 5)에 울릉도에 왜적이 침입하여 반달이나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 태종과 세종대에 울릉도로 도망간 백성이 많다는 말을 듣고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를 파견하여 거주민을 쇄출해오면서 울릉도가 빈 섬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 성종대에 박원종(朴元宗)을 보내 삼봉도(三峯島)를 탐색하게 했으나 풍랑으로 배를 대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큰 대나무(大竹)와 큰 전복(大鰒)을 채취해 온 사실로 삼봉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조선 전기에도 정부가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였다. 숙종대인 1702년에는 삼척영장(三陟營將) 이준명(李浚明)이 울릉도에서 돌아와 섬 지형도와 특산물을 바쳤으며, 영조 1735년(영조11)에 강원도 관찰사 조최수(趙㝡壽)는 울릉도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이 살던 옛터가 있으며, 그 서쪽에 또 우산도(于山島, 독도)가 있는데 또한 넓다는 보고를 중앙에 하였다. 위 사료는 통해서 역사 속에서 울릉도는 물산이 풍부한 풍요로운 땅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기록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원문
沿革本于珍也一云御珍一云古弓伊新羅景德王十六年改
蔚珍郡領縣海曲隸溟州高麗顯宗降縣令 本朝因之
邑號仙槎官員縣令兼江陵鎭管兵馬節制都尉一員
古邑海曲南三十里德新驛地本波旦一云波豐新羅景德王十六年改海曲爲蔚珍郡領縣
高麗初仍屬
坊面下縣內東終七里上縣內西初五終十七近南南初七終十五遠南
南初十五終四十近北北初十七終二十三遠北北初二十三終四十五近西西初
二十終四十遠西西初四十終八十
山水安逸王山西北四十里潘伊山西五十五里蠶山南四十里梅
山西南四十里乽非山西北四十三里三方山安逸王之北有龍潭蓑笠山
西北六十里白屛山東支竹津山東八里全友仁山南二十里竝道邊白蓮
山南十七里○聖留寺在石崖下長川上崖石壁立千尺壁有少竇謂之聖留窟古名撑天窟窟幽深
炬燭而入步步而進或狹或闊石狀殊異或若幢幡浮屠佛像高僧五色燦然漸入漸奇不可名狀○劍
山寺聖留庵天糧庵佛影山西南三十里飛鳳山西二十里生達山西五十里
(黃腸封山一)白屛山西北七十里三陟界蔚然山 劍磨山 琵琶山俱西八十
里英陽界白巖山西南四十五里平海○佛歸寺新羅僧義相所創眞觀寺凌虛臺
(竹邊串北二十里)在縣東前有小湖酒泉臺南十里臨漪臺在平海望津亭畔嶺路葛嶺北四十里
四八十里通英陽安東大路直峙西北八十里通安東小川建伊峙西十里廣峴西二十五里內島嶺西四十里
山水安逸王山西北四十里潘伊山西五十五里蠶山南四十里梅
山西南四十里乽非山西北四十三里三方山安逸王之北有龍潭蓑笠山
西北六十里白屛山東支竹津山東八里全友仁山南二十里竝道邊白蓮
山南十七里○聖留寺在石崖下長川上崖石壁立千尺壁有少竇謂之聖留窟古名撑天窟窟幽深
炬燭而入步步而進或狹或闊石狀殊異或若幢幡浮屠佛像高僧五色燦然漸入漸奇不可名狀○劍
山寺聖留庵天糧庵佛影山西南三十里飛鳳山西二十里生達山西五十里
(黃腸封山一)白屛山西北七十里三陟界蔚然山 劍磨山 琵琶山俱西八十
里英陽界白巖山西南四十五里平海○佛歸寺新羅僧義相所創眞觀寺凌虛臺
(竹邊串北二十里)在縣東前有小湖酒泉臺南十里臨漪臺在平海望津亭畔嶺路葛嶺北四十里
三陟界大路高草嶺西八十里英陽界中路頗險廣庇嶺島城內
嶺一云造召嶺西六十里右四處高草嶺路鼎峙西北三十里竇巖北二十里或稱門巖
通海路通三陟○海東八里北自三陟界南至平海界沿海百餘里前川出安逸王山東流經
縣前入海興富川出三方山東流經興當驛入海守山川南十一里出白屛蔚然劍磨諸
山東流至西南十五里左過錦溪川經白蓮山之陰左過遠南川東流經守山驛入海錦溪川
出琵琶山之吉谷東流爲飛小入于守山川遠南川出白巖山之東東流入守山川骨長
浦北十一里藥師津東八里溫泉縣北周仁里水徵溫島嶼鬱陵島在本縣正
東海中右于山一云武陵一云羽陵一云艼陵周二百餘里東西七十餘里南北五十餘里三峯岌嶪聳空
(倭舡漁探者時到)純是石山自本縣天晴而登高望見則如雲氣便風二日可到倭人謂之竹島與日本隱岐州相近自中
峯至正東海濱三十餘里正西海濱四十餘里正南海濱二十餘里正北海濱二十餘里川溪六七竹田
五六居址數十有楮田洞孔巖米土窟石葬古址船泊處待風所島之南有四五小島島中皆石壁石澗
洞壑甚多有狙鼠極大不知避人亦有桃李桑拓菜茹之屬珍木異草不知名者甚多○新羅智證王十
三年于山國恃險不服遣何瑟羅軍主金異斯夫擊降之 高麗太祖十三年芋陵島遣白吉土豆貢方
物 顯宗九年以于山國被東北女眞所寇廢農業遣李元龜賜農器 十年于山國民曾彼女眞虜掠
來奔者悉令歸之 德宗元年羽陵城主遣子獻土物 仁宗十九年秋七月溟州道都監倉使李陽實
遣人入蔚陵島取菓核木葉異常者以獻 毅宗十三年王聞鬱陵地廣土肥可以居民遣溟州道監倉
使金柔立往視柔立回奏云島中有大山從山頂東至海一萬餘步西至海一萬三千餘步南至海一萬
五千餘步北至海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或有石佛鐵鍾石塔多生柴胡本石南草然多巖石民
不可居遂寢其議 明宗時崔忠獻獻議以武陵土壤膏沃多珍木海錯遣使往觀之移東郡民以實之
及使還多以珍木海錯進之後屢爲風濤所蕩覆舟因還其民居 忠穆王二年東界芋陵島人來朝
辛福五年倭人武陵島留半月而去○本朝 太宗朝聞流民逃于鬱陵島者甚多再命三陟人金麟雨
爲安撫使刷出空其地麟雨言丰土地饒沃竹大如杠鼠大如猫桃核大於升凡物稱是 世宗元年武陵
島民男婦共十七人行到京畿 平邱驛飢頓 上遣人救之 二十二年遣縣人萬戶南顥率數百人往
搜連民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還其地遂空 成宗二年有告別有三峯島者及遣朴宗元往覓之因
風濤不得泊而還同行一舡泊鬱陵島只取大竹大鰒魚回啓云島中無居民矣肅宗二十八年三陟
營將李浚明還自鬱陵島獻其圖形及紫檀香靑竹石間朱魚皮等物浚明乘舡于竹邊串兩晝夜而還
英宗十一年江原監司趙冣等啓言鬱陵地廣土沃有人居舊址而其西又有于山島亦廣闊○土産
藿鰒可支魚大小雜魚柏木香木冬柏側柏黃柏梧桐楓檜欕桑楡篁竹朱土鷹烏鷰鳲貍鼠
城池邑城周二千五百六十尺井四古邑城東五里周一千二百十尺古城北七
里周六百四十尺安逸王山城周七百五十三尺 高麗穆宗十年
城蔚珍 麗末連年倭寇人民流散閭里荒墟恭讓
王三年於世麟爲縣令修葺城堡撫安遺民 古邑
城在平地太祖五年爲倭寇焚蕩張巡烈倡議移邑
於山城至今居之
鎭堡革廢蔚珍浦鎭一云古縣東南十里 中宗七年築城周七百五十尺舊有水軍
萬戶
驛站興富驛古云興府北三十里守山驛古云壽山南十里德新驛南三
十里革廢祖召驛西六十里今造召院
土産弓幹桑漆海松子五味子紫草蜂蜜松蕈石蕈
(邑內二七興富三三市梅野一三市)箭竹鰒紅蛤海蔘藿海衣鹽魚物十三種
壇壝髮岳新羅祀典在于珍也郡以名山載小祀
典故高麗神宗二年溟州盜陷蔚珍 辛禑七年倭寇
蔚珍縣權玄龍與戰敗之斬二十級獲馬七十匹
八年倭入蔚珍取吾斤畓谷兩倉之穀不克而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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