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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김시습(金時習)의 문집기록에 등장하는 우산도

사료해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은 삼척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자신이 쓴 「청사열전」에서 김시습(金時習)은 전국의 경승을 둘러보던 중, 동이(東暆), 즉 강릉에 가서 풍악산과 오대산에 올랐고 바닷가를 유람하였으며, 월송정(越松亭)을 거닐었고, 울릉도와 우산도를 멀리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이는 육지에서 바라본 울릉도와 우산도를 기술하고 있는 곳으로, 당시인들은 이미 울릉도와 우산도를 별개의 섬으로 확실히 구별하여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金時習者本滄海人。生八月能知書。五歲通大學中庸。長者師之。集賢學士崔致雲見之曰。奇才。乃命名時習。字悅卿。世宗聞之。欲召見之不可。令承政院召見之。厚賜其家曰。善養之。當大用也。於是四方號之曰。五歲童子。而不名也。至文宗時。時習稍長成。旣博達異能。名譽益多。及魯陵遜位。時習悉燒其書。因亡去。逃於浮屠。以絶跡於世也。楊州水落,壽春史呑,海上雪岳,寒溪,月城金鰲。皆時習樂居其間者也。自號贅世翁。或曰淸寒子。或曰東峯。時習早得大名。逢世故。一朝逃世絶俗。佯狂自隱。乖詭譎奇。以取怪而不悔也。以爲居治世。潔身亂倫。恥也。遇亂世。離群遠引。善也。慨然長往。行名山澤。遊摩阿岬。開京觀古國學。薩水問七翁仲。平壤觀井田畎。遂登普賢神岳八萬四千。其外漠北之墟多異草木怪獸奇禽。至江南海陽。見珍異物產之饒曰。百濟以此強。亦以此亡。其志曰。其俗尙強悍報仇。有百濟遺風。出東暆。登臨楓嶽,五臺。窮海堧。遊越松。望鬱陵于山。至成宗時歸俗。客勸之仕。則不應放跡。玩戲自恣。以適意也。其書曰。十三。通經史百家。磊落慷慨。十九。學孫吳兵法。今已消亡矣。仍言天地萬物之化以自廣。或云無欲而遊方之外。能通氣機運化之法術。有自畫惟肖。其讚曰。爾形至藐。爾心大侗。宜爾置之溝壑之中。妻死不更娶。作頭陀形。東遊海上。適四方。終於鴻山無量寺。年五十九。遺命無燒。殯於寺傍。三年將葬。發其殯。面如生。浮屠人以爲佛也。旣茶毗。爲之立浮圖。有四方志一千六百。紀山紀地二百。又有詩卷。傳於世。陰崖公讀其文曰。跡佛而儒行者也。
번역문
결연히 속세를 벗어나 유명한 산천을 두루 다녔으니, 마아갑(摩阿岬)을 유람하고 개성의 옛 국학(國學)을 구경하고 살수(薩水)에서 칠옹중(七翁仲)을 읊고 평양에서는 정전(井田)의 옛 자취를 살펴보았다. 드디어 보현봉(普賢峯)에 오르니 신령스러운 봉우리가 8만 4000개나 되었다. 그 너머 아득한 북녘 땅에는 기이한 초목과 괴상한 금수가 많이 있었다. 강남(江南 전라북도)과 해양(海陽 전라남도)에 이르러 진귀하고 특이한 토산물이 풍부한 것을 보고는 “백제(百濟)는 이 때문에 강해졌고 또한 이 때문에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의 기록에 “이곳 풍속은 강하고 사나우며 원수 갚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이것은 백제의 유풍(遺風)이다.”라고 하였다. 동이(東暆 강릉)로 나가 풍악산(楓嶽山)과 오대산(五臺山)에 올랐고 바닷가를 유람하였으며 월송정(越松亭)을 거닐었고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를 멀리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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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의 문집기록에 등장하는 우산도 자료번호 : sd.d_0033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