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가야 7국 평정 기사’에 대해서는 백제가 근초고왕대 가야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견해와 백제가 남부가야에 대한 교역권을 장악했거나 혹은 공납관계를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 근초고왕의 일시적인 군사활동은 인정하지만 영역화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이 기사에는 6세기 전반 가야제국을 사이에 두고 백제가 신라와 주도권 싸움을 한 사실이 소급, 반영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梁職貢圖』에서 백제의 ‘傍小國’으로 나오는 제국과 신공기의 국명이 유사하다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두 사람은 『日本書紀』 응신천황 15년 추8월조에 王仁을 데리러 백제로 갔다는 上毛野君의 선조인 荒田別, 巫別과 동일한 인물로서 『新撰姓氏錄』 河內國 臣別 止美連條에 「豐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之君.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續日本紀』 연력 9년(790) 추7월 신사조의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上毛野氏遠祖荒田別’이 백제로 파견되어 有識者를 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은 河內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와의 교섭에 관여한 上毛野氏의 조상으로서, 『日本書紀』 편찬자가 상모야씨의 계보 또는 家記에서 인용한 인명으로 여겨진다. 上毛野氏는 지통천황 5년(691) 「墓記」 제출 18씨족 중의 하나이다.
사백과 개로 2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지비궤 등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인명은 네 글자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백과 개로는 붙여서 사백개로 1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沙白은 성이 되며, 『남제서』 백제전에 魏虜를 격파한 장군의 하나인 沙法名의 沙法과 상통한다.
현재 경남 昌寧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今昌寧郡. 」이라고 나온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婆娑尼師今 29년조(108)에 比只國이 나오는데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남 金海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金海小京. 古金官國[一云伽落國. 一云伽耶]. 」이라고 나온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狗邪韓國이 김해지역으로 비정된다. 『日本書紀』 흠명기에는 下加羅로 나온다.
현재 경남 咸安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咸安郡. 法興王以大兵滅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 」이라고 나오며,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 安邪國을 가리킨다. 「광개토왕비」에는 ‘安羅人’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日本書紀』 계체, 흠명기에 자주 보인다.
『日本書紀』 계체천황 2년(508) 12월조에 보이는 南海의 ‘耽羅’와 ‘忱彌多禮’가 음이 비슷하고, ‘南海’라는 방위도 백제에서 忱彌多禮를 볼 때의 ‘南蠻’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을 근거로 忱彌多禮를 제주도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한편 忱彌多禮를 古奚津의 요충지인 강진으로 보거나, 『三國志』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新彌國으로 보고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 왜가 백제에게 영토를 할양했다는 기사는 『日本書紀』에 종종 언급되고 있다.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9년 춘3월조를 비롯해서 同50년 5월조의 多沙城 사여, 응신천황 8년 춘3월조의 枕彌多禮, 峴南, 支侵, 谷那 등 東韓之地의 奪取, 웅략천황 21년 춘3월조의 久麻那利 사여, 계체천황 6년 12월조의 任那 4縣사여, 同7~10년 己汶, 帶沙 사여, 同23년조 多沙津 사여 등의 예가 있다. 『日本書紀』의 영토 하사와 같은 표현은 율령제하의 일본의 국가관에 기초한 역사 서술로, 백제왕은 천황의 外臣으로 백제왕의 통치지역과 백성은 모두 천황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규정한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백제 제14대왕 近仇首王(재위:375~383)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近仇首王 즉위조에 「一云諱須」라는 표현이 있다. 『日本書紀』에는 貴首王으로 나오기도 하며, 『續日本紀』 延曆 10年(791) 夏四月 戊戌條에는 久素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新撰姓氏錄』左京諸蕃下에는 近貴須王으로 나온다.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 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곳으로 비정되어 왔는데, 크게 현재 전라남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와 충남 및 전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4邑을 比利, 辟中, 布彌, 支半, 古四의 5읍으로 끊어 읽어 이를 각각 保安, 金堤, 井邑, 扶安, 古阜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각 지명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比利:『삼국사기』 지리지의 「完山[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완산(현재 전북 전주)으로 보거나 同 지리지의 ‘發羅郡’(현재 전남 나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卑離國을 비롯하여 卑離라는 명칭이 붙은 여러 마한소국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광개토왕비」에는 永樂 6年條(396)와 守墓人條에 고구려군이 공파한 58城의 하나이자 광개토왕릉의 수묘를 담당케 하였던 新來韓濊의 출신지로 比利城이 보인다.
辟中:『삼국사기』 지리지에 「金堤郡. 本百濟碧骨縣. 」이라는 기사를 참고하면 현재 전북 김제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辟骨, 辟城縣, 碧骨郡, 碧骨縣 등은 모두 辟中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되며, 후문에서 백제와 왜가 맹약하였다는 辟支山이 辟中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밖에 『日本書紀』 천지천황 원년(662) 12월조에는 避城으로 나온다.
布彌支:현재 전남 나주 근방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淸音縣. 本百濟伐音支縣, 今新豐縣.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伐音支가 布彌支를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공주시 維鳩(新豐)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不彌國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半古:『삼국사기』 지리지의 「潘南郡. 本百濟半奈夫里縣. 」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현재 전남 나주시 반남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여기서 半奈와 潘南은 서로 音이 통한다. 한편 布彌支와 半古를 布彌와 支半으로 끊어 읽고, 支半은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나오는 支半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전북 부안, 태인 방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상의 지명 비정을 기초로 신공 49년 춘3월조의 4읍 항복 기사를 백제의 근초고왕이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이 기사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5세기 후반, 즉 웅진시대 이후의 사실이 투영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였던 周留城(州柔, 豆率城)이다. 『日本書紀』 천지기에 疏留城, 州桑城, 『삼국사기』에 周留城, 豆率城이 보인다. 현재 부안 위금암산성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북 정읍 古阜에 있던 산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 36년조에 「築古沙夫里」라는 기사와 同지리지에 「古阜郡. 本百濟古眇夫里郡.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磐石 위의 맹약기사는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 나당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한 뒤 백제에서 행해진 就利山 會盟을 모방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磐石 위에서 이루어지는 맹약 의식을 백제의 전통 의식으로 이해하여 위의 맹약 기사는 원래 근초고왕 부자가 맹주로서 맹약한 기사였는데 대화정권을 맹주로 한 기사로 윤색되었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