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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사마숙녜(斯摩宿禰)가 이파이(爾波移)를 다시 백제로 파견하여 백제가 일본에 오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받음

사마숙녜는 곧바로 겸인(傔人)주 001
번역주 001)
시종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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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이(爾波移;니하야)주 002
번역주 002)
여기에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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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탁순인 과고(過古)주 003
번역주 003)
여기에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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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을 백제국에 파견하여 그 왕을 위로하였다. 그때 백제의 초고왕(肖古王)주 004
번역주 004)
백제의 제13대왕 近肖古王(재위:346~375)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제5대 肖古王(166~214)도 보이나 『日本書紀』의 초고왕은 제13대왕인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日本書紀』에는 肖古王 이외에 速古王으로, 『古事記』 應神段에는 照古王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續日本紀』 延曆 9年(790)의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近肖古王이 보이고, 『新撰姓氏錄』에는 肖古王, 速古王, 速古大王, 近速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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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오색채견(五色綵絹)주 005
번역주 005)
오색채견은 다양한 색깔의 비단으로, 백제 염색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8년조에 왕의 의관에 관해 「王服紫大袖袍 靑錦袴 金花飾烏羅冠 素皮帶 烏韋履. 」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기사를 통해서 미루어 볼 때 紫, 靑, 黑色의 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견직물 생산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其民土著種植 知蠶桑 作緜布」에서 확인되며, 궁남지에서는 베틀에 사용된 비경이가 출토된 바 있다. 왜에서도 비단은 생산하고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卑彌呼가 「上獻生口 倭錦絳靑縑緜衣白布 丹木拊 短弓矢. 」라 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그런데 백제는 오색채견을 선물하였던 것이다. 『日本書紀』 응신기에서 백제가 왜에 縫衣工女 眞毛津을 보냈다고 한 것도 백제가 직조기술, 특히 견직물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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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한필과 각궁전(角弓箭)주 006
번역주 006)
角을 재료로 한 弓箭이다. 안쪽에는 牛筋을, 바깥에는 牛角을 붙인 활을 말한다. 이것이 위세용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국가 간에 무기를 선물한 것은 『송서』 백제전에도 보인다. 「(元嘉) 二十七年(450년, 비유왕 24) 毗上書獻方物 私假臺使馮野夫西河太守 表求曆林式占腰弩」라는 기사에서 송이 백제의 요청에 응해 요노를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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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철정주 007
번역주 007)
무기나 주술구의 원료로 사용한 철판 또는 철편이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서는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라고 적고 있다. 이후 4~5세기대에 이르러 한반도 남부에서 鐵鋌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철 소재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鐵鋌의 용도에 대해서는 철 소재 이외에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이 시기 신라와 가야 지역 고분에서 널리 출토되는 다량의 철정과 망치, 집게 등의 철 鍛冶具는 바로 철정이 철 소재 보급의 보편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백제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의 사신에게 주었다는 위의 기록과 충북 진천 石帳里 철 생산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4세기 백제지역에서도 철 생산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열도 내에서 철정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九州에서 關東지방까지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특히 近畿지방에 집중되고 있는데, 大和와 河內를 중심으로 5세기대의 고분에서 길이 15~40cm의 철정이 다수 출토되었다. 일본열도에서 철의 생산과 제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6세기 이후의 일로서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의 철정과 같은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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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매를 이파이에게 선물하였다. 게다가 다시 보물 창고를 열어서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진귀한 보물들이 많다. 귀국에 조공하고자 하여도 길을 알지 못하여 뜻은 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자에게 부탁하여 공물을 계속해서 바치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파이는 그 일을 맡아 돌아가 지마숙녜(志摩宿禰)에게 보고하였다. 지마숙녜는 탁순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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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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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3)
    여기에서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백제의 제13대왕 近肖古王(재위:346~375)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제5대 肖古王(166~214)도 보이나 『日本書紀』의 초고왕은 제13대왕인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日本書紀』에는 肖古王 이외에 速古王으로, 『古事記』 應神段에는 照古王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續日本紀』 延曆 9年(790)의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近肖古王이 보이고, 『新撰姓氏錄』에는 肖古王, 速古王, 速古大王, 近速王이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오색채견은 다양한 색깔의 비단으로, 백제 염색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8년조에 왕의 의관에 관해 「王服紫大袖袍 靑錦袴 金花飾烏羅冠 素皮帶 烏韋履. 」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기사를 통해서 미루어 볼 때 紫, 靑, 黑色의 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견직물 생산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其民土著種植 知蠶桑 作緜布」에서 확인되며, 궁남지에서는 베틀에 사용된 비경이가 출토된 바 있다. 왜에서도 비단은 생산하고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卑彌呼가 「上獻生口 倭錦絳靑縑緜衣白布 丹木拊 短弓矢. 」라 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그런데 백제는 오색채견을 선물하였던 것이다. 『日本書紀』 응신기에서 백제가 왜에 縫衣工女 眞毛津을 보냈다고 한 것도 백제가 직조기술, 특히 견직물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角을 재료로 한 弓箭이다. 안쪽에는 牛筋을, 바깥에는 牛角을 붙인 활을 말한다. 이것이 위세용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국가 간에 무기를 선물한 것은 『송서』 백제전에도 보인다. 「(元嘉) 二十七年(450년, 비유왕 24) 毗上書獻方物 私假臺使馮野夫西河太守 表求曆林式占腰弩」라는 기사에서 송이 백제의 요청에 응해 요노를 선물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무기나 주술구의 원료로 사용한 철판 또는 철편이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서는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라고 적고 있다. 이후 4~5세기대에 이르러 한반도 남부에서 鐵鋌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철 소재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鐵鋌의 용도에 대해서는 철 소재 이외에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이 시기 신라와 가야 지역 고분에서 널리 출토되는 다량의 철정과 망치, 집게 등의 철 鍛冶具는 바로 철정이 철 소재 보급의 보편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백제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의 사신에게 주었다는 위의 기록과 충북 진천 石帳里 철 생산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4세기 백제지역에서도 철 생산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열도 내에서 철정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九州에서 關東지방까지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특히 近畿지방에 집중되고 있는데, 大和와 河內를 중심으로 5세기대의 고분에서 길이 15~40cm의 철정이 다수 출토되었다. 일본열도에서 철의 생산과 제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6세기 이후의 일로서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의 철정과 같은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었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사마숙녜, 이파이, 과고, 초고왕, 이파이, 이파이, 지마숙녜, 지마숙녜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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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숙녜(斯摩宿禰)가 이파이(爾波移)를 다시 백제로 파견하여 백제가 일본에 오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받음 자료번호 : ns.k_0017_011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