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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미판왕(麛坂王)과 인웅왕(忍熊王)의 반란

이때 미판왕(麛坂王;카고사카노미코)과 인웅왕(忍熊王;오시쿠마노미코)주 001
번역주 001)
『日本書紀』 중애천황 2년 정월조 忍熊皇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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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천황이 죽고(崩)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였으며, 황자(후에 응신천황)를 새로 낳았다는 말을 듣고 “지금 황후에게는 황자가 있고 군신이 모두 따른다. 반드시 함께 의논하여 어린 주인을 세울 것이다. 우리들이 어찌 형(이복형)으로서 아우를 쫓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몰래 모의하였다. 그리고 거짓으로 천황을 위해 능을 만든다고 한 후 파마(播磨;하리마)에 가서 산릉을 적석(赤石;아카시)주 002
번역주 002)
『和名類聚抄』에는 播磨國 明石郡 明石(安加之)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兵庫縣 明石市 明石町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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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세웠다. 그리하여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담로도(淡路嶋)로 건너가서 그 섬의 돌을 옮겨와 만들었다. 그때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게 하고 황후를 기다렸다. 이에 견상군(犬上君;이누카미노키미)의 선조 창견별(倉見別;쿠라미와케)주 003
번역주 003)
犬上君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경행천황 51년 8월조 犬上君 참조. 倉見別은 여기에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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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길사(吉師;키시)주 004
번역주 004)
吉師는 ‘吉士’라고도 하며 대부분 한반도제국과 왜국의 대외교류에서 활약하던 도래계 씨족들이다. 대표적인 씨족으로는 日鷹吉士, 難波吉士, 調吉士, 三宅吉士 등이 있다. 이 길사계 씨족들의 출처에 대해서는 ‘吉士’라는 성에 주목하여 신라계로 보거나(신라관위 17관등 가운데 제14위에 길사가 있음), 길사집단이 주로 任那문제와 관련하여 한반도로 파견되고 있기 때문에 任那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古事記』 응신천황단에는 아직기와 왕인을 阿知吉師와 和邇吉師로 표현하였고, 『新撰姓氏錄』 攝津國 諸蕃條에서는 汗汜吉志가 백제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調吉士도 백제국 努理使主의 후예로 나온다. 고고학적으로도 부여에서 발견된 ‘那尒波連公’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는 목간이나 오사카의 四天王寺가 난파길사의 氏寺라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길사집단 가운데는 백제계 도래씨족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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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선조 오십협모숙녜(五十狹茅宿禰;이사치노스쿠네)가 함께 미판왕을 따랐다. 그래서 장군으로 삼아 동국(東國)에서 병사를 모으도록 하였다. 이때 미판왕인웅왕이 함께 토아야(菟餓野;토가노)주 005
번역주 005)
현재 大阪市 北區 兎我野町 부근, 神戶市 灘區의 都賀川, 同市 兵庫區 夢野町 부근 등의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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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서 사냥으로 전쟁의 승부를 점치면서주 006
번역주 006)
원문은 祈狩이다. 수렵으로 내기를 해서 싸움의 승패를 점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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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狩는 우케히가리(于氣比餓利)라고 읽는다.], “만약 일이 성공한다면 반드시 좋은 짐승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두 왕은 각각 임시로 만든 제단에 있었다. 그런데 붉은 돼지가 갑자기 나와서 제단에 올라가 미판왕을 물어 죽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인웅왕창견별에게 “이것은 불길한 징조다. 여기서는 적을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여 주길(住吉;스미노에)주 007
번역주 007)
현재 大阪市 住吉區이다. 神戶市 東灘區의 住吉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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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였다.

  • 번역주 001)
    『日本書紀』 중애천황 2년 정월조 忍熊皇子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2)
    『和名類聚抄』에는 播磨國 明石郡 明石(安加之)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兵庫縣 明石市 明石町 일대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犬上君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경행천황 51년 8월조 犬上君 참조. 倉見別은 여기에서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吉師는 ‘吉士’라고도 하며 대부분 한반도제국과 왜국의 대외교류에서 활약하던 도래계 씨족들이다. 대표적인 씨족으로는 日鷹吉士, 難波吉士, 調吉士, 三宅吉士 등이 있다. 이 길사계 씨족들의 출처에 대해서는 ‘吉士’라는 성에 주목하여 신라계로 보거나(신라관위 17관등 가운데 제14위에 길사가 있음), 길사집단이 주로 任那문제와 관련하여 한반도로 파견되고 있기 때문에 任那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古事記』 응신천황단에는 아직기와 왕인을 阿知吉師와 和邇吉師로 표현하였고, 『新撰姓氏錄』 攝津國 諸蕃條에서는 汗汜吉志가 백제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調吉士도 백제국 努理使主의 후예로 나온다. 고고학적으로도 부여에서 발견된 ‘那尒波連公’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는 목간이나 오사카의 四天王寺가 난파길사의 氏寺라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길사집단 가운데는 백제계 도래씨족이 많았다고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현재 大阪市 北區 兎我野町 부근, 神戶市 灘區의 都賀川, 同市 兵庫區 夢野町 부근 등의 설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원문은 祈狩이다. 수렵으로 내기를 해서 싸움의 승패를 점치는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현재 大阪市 住吉區이다. 神戶市 東灘區의 住吉이라는 설도 있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미판왕, 인웅왕, 창견별, 오십협모숙녜, 미판왕, 미판왕, 인웅왕, 미판왕, 인웅왕, 창견별
지명
파마, 적석, 담로도, 토아야,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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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판왕(麛坂王)과 인웅왕(忍熊王)의 반란 자료번호 : ns.k_0017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