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영토해양국제사법판결선집

태국의 착오

* * *
비판은 태국을 향할 것이고 태국에게 불리한 추론은 1908년-1909년 후 수년 동안의 기회에서 태국이 그 Map Sheet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캄보디아가 신뢰한 태국의 바로 그 행위에 직접적으로 기여를 하였고, 재판소는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합동경계획정위원회의 결정에 근거했든 조약상의 선에 근거했든―분수령선이 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입증할 목적이었던 Map Sheet 부속서 1을 제출하는데 있어 프랑스의 행위였기 때문에, 태국이 부속서 1에서 보인 선이 정확하게 그려졌다고 믿을 것을 유발했다.
관련된 법률적 문제뿐만 아니라 이 사실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은 재판소의 접근방식과는 다르다. 나는 사실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내 질문은 다른 결론을 향해있다. 즉 프랑스와 시암 간 부속서 1에서의 선이 두 국가간 국경으로 확정되기로 되어있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 * *
몇 가지 일반적인 평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부속서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조그만 사원지역에 대한 관심 집중은 다른,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을 안 보이게 하거나 불분명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판소가 부속서 1에 보이는 선이 그 지도에 의해 적용되는 지역에 국경선이라고 선언할 것을 캄보디아에게 요청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청서에서 언급한 청구, 즉 사원에 대한 주권이 캄보디아에 있는지 여부에 대해 선언할 것만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부속서 1의 국경선이 두 국가에게 법률적으로 구속력 있는 선으로서 어느 쪽으로든 결론에 먼저 도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이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핵심적인 단계이다. 내 생각에는 부속서 1상 지도를 보면 사원이 국경선의 캄보디아 측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실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강조한 것 같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는 분명하다. 더 큰 지도상의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보면 볼수록 아마도 더욱 끈질기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사원과 사원에 대한 주권을 누가 취득하였는지가 1908년-1909년에 두 국가의 주요 관심사항이었고, 태국이 지도를 수령하였을 때 태국이 기대했던 가장 첫 번째 일이 사원지역에 대한 주권이 자국에게 속한다고 보이기를 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오에 빠지기 쉽다. 내 생각에, 이 모든 것은 현실과는 관련이 없다.
사원이 1908년-1909년에 어느 나라에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1904년 조약 하에서 두 국가가 염려하는 것은 상당한 길이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이었다. 국경선의 한쪽 부분, 즉 DangRek에 관한 한, 국경선은 분수령선이 되기로 되어 있었다. 만약 그 분수령선이 두 국가 간 사원이나 영토의 다른 부분을 한 쪽이나 다른 쪽에 두었다면, 그것은 조약의 결과였고 항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사임 국경 지역의 지도를 제작하는데 기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Map Sheet을 제작하였다. 시암이 프랑스의 기술적 능력을 믿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내 생각에, 프랑스는 Map Sheet 부속서 1을 제작함으로써, 자국이 사암에게 그것을 송부했을 때, Map Sheet이 정확하게 그려졌고, 거기에 나타나는 국경선은 합동경계획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랐으며 또는 그러한 결정이 없었다면, 조약의 선을 따랐다고 표현하였다. 프랑스는 특히, 그렇게 그려진 국경선은 분수령의 진정한 선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만, 동 사건에 어떤 접근법을 취하든, 태국이 부속서 1을 받은 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시간 내에 프랑스가 분수령선을 정확히 나타내는 것으로 제시한 경계선이 정확한지 여부를 스스로 확인했어야만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반박하지 못함으로써 태국이 사실상 경계선의 정확성을 알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태국이 그 경계선을 정확한 것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태국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결정은 구속력을 가진다.
일반적 성격의 두 번째 관측 및 평가는 관련 기간에 당사국들이 놓인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04년 이전에 태국은 절벽면 DangRek 오른쪽의 전체 지역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였다. 그러한 행정행위는 1904년 이전에서의 행위와 같았고, 그 지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고 확신한다. 분명, 사원에 대한 본 분쟁이 주장될 때인 1949년까지, 이러한 행정행위들은 산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행사된 행위보다 덜 산발적이고 정부 활동의 더 큰 부분을 포함하였다. 비록 이 사건에서 최종적이고 정착된 국경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Damrong 왕자가 사원지역에 방문한 사건을 제외하고, 두 국가 모두 상대 국가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원지역과 인접한 캄보디아 지방의 주지사가 국경선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알았던 것은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캄보디아 평원에 우뚝 솟은 경사면의 바로 북쪽 지역은 황량하였고 황량한 채로 남아있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거기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DangRek에서의 경사면을 따른 전체 지구는 빈약한 숲과 성장이 잘 안 된 나무로 덮여 있었고, Bernard가 볼 때, “절망적으로 단조로웠다.” 여름에 비가 내린 후, 사냥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그곳이 건기에는 “더 황량한 풍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은 메말랐고 “물은 모든 야생동물이 물을 마시기 위해 오는 기분 나쁜 웅덩이에서만 발견되었다.”
요약하면, 프랑스나 태국이 영토에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분명 금세기 초반이 아니었다. 이 기간에 특히 국경을 나타내는 지도에 대한 합의된 선을 가지거나 그 선의 어느 쪽에 사원을 둘 것인가를 아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프랑스나 태국의 상황은 나에게는 진정한 상황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생각에, 훨씬 후에 사원과 가까운 제한된 지역은 고고학적 그리고 군사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수준에서 진정한 중요성을 획득하였다.

색인어
지명
DangRek, DangRek, DangRek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태국의 착오 자료번호 : nj.d_0002_0020_0070_0030_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