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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해양국제사법판결선집

합동경계위원회 최종 공식행위 이후 부속서 1지도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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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0월 초부터 Bernard는 자신의 상사로부터 “모든 구 캄보디아 지방”을 획득하기 위하여 시암정부와 협상에 들어갈 것을 지시받았다. 이것이 달성되었다면, 인도차이나의 서쪽 국경이 서쪽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달에, 그는 자신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활동은 주로 이 목적을 향해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했고 이후 합동경계획정위원회를 해산시키려 한 것은 명백하다.
3월 첫째 주에, 시암정부의 고문인 Strobel이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 그의 활동은 증가하였다.
파리를 통한 여행에서 Strobel은 Great Lake의 북쪽 국경에 대한 어려움을 통보받았다. Strobel의 도착 순간부터,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합동경계획정위원회의 작업이 끝나는 상황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규명하였다.
프랑스 지형공무원은 다른 시간인 2월 18일과 3월 4일 사이에 방콕에 도착하였고, 이 분야에 대한 그들의 작업을 3월 4일까지 완료하였다. 국경지역의 잠정지도는 3월 5일까지 완성되지 않았고 최종 지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합동경계획정위원회 회의는 Bernard는 3월 8일에 합동경계획정위원회 회의를 잠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암과 새로운 국경조약을 협상하기 위한 Strobel과의 논의에서 Bernard는 1차 조치를 취하였다. 동일한 날에 소집된 합동경계획정위원회 회의는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Strobel과 Bernard의 대화는 6일간 계속되었다.
이 시점에, 시암왕은 방문차 프랑스로 떠나려고 하였다. Strobel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구 캄보디아 지방”의 흡수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연기하려 하였으나, Bernard는 왕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그는 Strobel을 설득하였다. 많은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유능하고 탁월한 공무원이었다.
그 순간부터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조약 초안은 3월 14일에 처음 작성되고, 3월 23일에 서명되었다. Bernard는 26일에 방콕을 떠났고, 4월 5일에 사이공에서 그가 체류했던 프랑스로 향해 항해했다.
더 이상 합동경계획정위원회의 회의는 개최되지 않았고, 합동경계획정위원회는 해산되었다.
Bernard는 이 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국경으로 일정한 위도선을 정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지점에서 그 위선이 Preck Kompong Tiam이라 불리는 강을 가로지르는지를 찾아내야 했으며, 그리고 그 지점부터 DangRek 산맥까지 경도선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강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새롭게 작업을 시작해야 했고, 진정한 新조약을 체결하지 않고는 국경획정 작업을 완료할 수 없었다.
또한 작년에 우리가 1904년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조약을 준비할 필요가 명확해졌다.”

색인어
지명
Great Lake, Preck Kompong Tiam, DangRek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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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경계위원회 최종 공식행위 이후 부속서 1지도 체결 자료번호 : nj.d_0002_0020_007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