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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해양국제사법판결선집

6. Lambeth 조약

6. 1202년 판결에 따라 발생한 투쟁을 종료시킨 Lambeth 조약 혹은 1217년의 “초안 협정(Draft Agreement)”은 Damme와 Sandwich에서의 영국 해군의 승리뿐만 아니라 Channel Islands를 취하려던 프랑스 시도의 실패를 확인하였다. 이 조약의 문언들과 그것이 체결된 역사적인 순간을 보면 Channel Islands 전부가 그 당시에 영국에 의하여 점령되었다는 입장을 정당화한다. 해군의 승리의 결과, 이 조약과 동시대에 발생한 일부 중요한 사실들이 영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구두 변론). 프랑스왕과 기타 적들간의 근접성을 특히 고려하여, 심지어 항구의 보호를 권고한 섬들의 자치에 대한 공표(Reports of 1199-1216, 영국 준비서면의 부속서 A 154)만을 나는 언급하고자 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 조약이 몇 몇 섬들을 영국왕에게로 “복구(restoration)” 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그로부터 그 섬들이 그 당시에는 영국왕의 점유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추론하였다 (구두 변론). 이러한 추론은 가능하다: 영국왕의 점유하에 있지 않은 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섬들은 영국왕에게 복구되었다(restored). 영국인들은 그 섬들에 대하여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복구의 실시를 규정하는 문건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그 문건은 Sandwich 전투에서 영국 함대를 지휘한 동일한 장군이 이 조약에서 합의한 것이다. 그는 그 섬들의 관리인(Warden)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그의 조카 중의 한명에 의하여 그 직이 대체되었다. (준비서면 Nos. 23-24.)
영국 정부의 법률고문은, 이 조약의 범위를 정한 두 명의 프랑스 역사가를 인용하였다: Caen의 한 교수는 이 섬들은 “1204년에 사실상 Normandy로부터 분리되었고 1217년에는 이 조약에 의하여 법적으로 분리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구두 변론.)
이 조약에 대하여 제기된 유일하게 인상적인 주장은, Dauphin Louis가 “그의 아버지인 Philip Augustus왕에 의하여 그렇게 하도록 위임받지 않고 그 자신의 이름으로” 이러한 조약 체결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구두 변론). 나는 프랑스 정부의 말을 빌리자면 “정복자 윌리엄의 개척을 반복하는” 노력으로 런던까지 간 Dauphin의 원정을 겨우 단순한 개인적인 모험으로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과업이 실패함에 따라 Dauphin은 영국왕 Henry 3세와 Lambeth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어서 그는 프랑스왕 Louis 3세가 되었다. 그는 그의 약속을 준수하여야 했다. 그의 입장에서, 영국의 Henry 3세는 프랑스 정부의 인용하에 주된 혹은 “대부분의 Norman 섬들을” 되찾았다 (답변서 및 재항변서). 왜 그는 모든 섬들을 되찾지 않았겠는가? 무슨 이유로 그가 그들 중 일부를 프랑스 지배하에 두었겠는가?
심지어 Lambeth 조약이 50년 전에 이미 단절된 봉건적 연계를 재수립하였다는 점을 영국이 다투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하여야 한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효과를 Paris 조약의 효과라고 한다. 그러므로 Lambeth 조약 이후 Channel Islands의 모든 섬들은 어떠한 종류의 종속관계없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색인어
지명
Channel Islands, Channel Islands, Channel Islands
법률용어
점유, 점유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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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Lambeth 조약 자료번호 : nj.d_0001_004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