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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devant 판사의 개별의견

 
 

Basdevant 판사의 개별의견

 

[번역]
판결의 주문 부분에 대하여서는 찬성하지만, 나는 재판소에 의하여 진술된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나의 이유를 말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각각의 부분에 대하여 망라적으로 판단함이 없이, 요목식으로 주문과 일치된 결과에 이르게 된 이유를 적시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나는 재판소가 채택한 이유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도 않을 것이며, 당사자들의 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완결적인 주장들에 대하여서 다루어진 모든 논점들에 대하여 견해를 표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 개인적 견해에 비추어 개별의견이 지켜야하는 한도를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재판소가 부여한 이유에 대하여 동의하는 특정 부분에 대하여서는 지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본 사건은, 그것이 EcrehosMinquiers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 한도 내에서, 중세시대에 영국왕(영국이 현재는 영국왕의 권리의 승계자임)과 프랑스왕(프랑스공화국이 프랑스왕의 권리의 승계자임) 사이에서 Normandy 공국의 분리(division)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있다. 그 문제는 9월17일 심리에서 Lionel Heald 경이 이러한 형태로 제시하였다. Wade 교수와 Leo 교수의 주장 중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이러한 분리의 개념이 언급되었다.
Lionel Heald 경은 이러한 분리에 대하여 13세기에 그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분리를 구성하는 사실들은 그것보다 더 긴 기간 동안 걸쳐 있었다. 그 분리는 실제로 여러 차례의 전쟁행위, 점유 행위 및 13세기와 14세기 동안의 조약들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양 당사자는 그들이 원용하고자 하는 역사적 권원을 이러한 모든 요소들에 근거하여 찾으려고 한다.
13세기 초인 Normandy의 분리 직전, EcrehosMinquiers는 이 공국의 일부를 구성하였고, Normandy 공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영국왕은 그 자신의 자격으로는 그 당시에 그곳에서 어떠한 권리도 보유하지 못하였다: 1066년 Normandy 공의 영국 정복과 그의 영국왕 지위의 차지는 영국왕에게 영국왕의 자격으로는 Normandy 공이 보유하는 보유물에 대하여 어떠한 권한도 부여할 수 없었다. 하나는 왕의 자격(royal)이고 다른 하나는 공의자격(ducal)인 두 군주직은 한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었지만, 법적으로 그 둘은 구별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은 봉건시대의 법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민족국가의 개념이 활성화되면서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 군주국가 개념의 시대에 계속되었던 것이고, 심지어는 근대에도 그리고 더하여 오늘날까지 그 잔재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영국왕이 Normandy에 대하여 어떠한 지위를 갖기 위하여서는 Normandy공을 영국왕으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경개(更改)는 해석되어야 할 분리가 이루어지도록 한 사태들의 과정 중에 발생하였다.
Normandy의 분리 직전, 프랑스왕은 Normandy공의 宗主였다. 그가 이렇게 공국과 공국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섬들에 대하여 보유하던 권원은 단순히 명목적인 권원은 아니었다. 몰수 상실을 야기한 1202년의 판결, 1420년 Troyes조약의 일부 규정 그리고 종주인 프랑스왕이 일부 영역과 관련하여 몰수 상실의 효과로부터 영국왕을 면제시키면서 프랑스왕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을 적시하기 위하여 “주다(give)”라는 단어를 사용한 1259년 Paris 조약의 용어와 같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이것이 그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주권은 주권이 아니다. 프랑스 공화국이 오늘날 프랑스왕의 고대 권원을 성공적으로 원용하기 위하여서는, 프랑스왕보다 낮은 종속자인 Normandy공의 소멸의 결과 분쟁의 대상이 된 작은 섬들과 관련하여 이 고대 권원이 늘어났음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변형은 대륙 Normandy의 경우에는 분리를 야기한 사태들의 과정 중에 발생하였다. 결정되어야 할 것은 EcrehosMinquiers에 대하여서 프랑스왕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변형이 있었는가 아니면 이러한 작은 섬들에 대한 새로운 독립적인 권리, 즉 영국왕에게 부여된 권리의 탄생이 이러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을 방지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실제 문제이다. 따라서 프랑스왕의 종주권이 15세기 말 봉건제도의 소멸의 결과 실효하였다는 주장과 17세기 말까지 프랑스왕들이 경계와 관련하여 추구하였던 정책은 봉건원칙들과 연계되어있고, 이러한 원칙들의 존속은 이것보다 훨씬 더 늦은 시점까지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자 하는 주장들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성은 없다.
양 당사자간에 논쟁이 있는 1202년의 판결은 그것 자체로 본 사건에 관련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를 볼 때 그것은 Normandy공에게는 불리하나 영국왕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Normandy에 대한 모든 권리는 영국왕이 아닌 Normandy공에게 속하는 것이므로 그 판결은 영국왕으로부터 어떠한 권리도 박탈하지 않으며, 명백히 영국왕에게 어떠한 권리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판결이 야기한 의문과 비판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 판결은, 한편으로는 Jersey, Guernsey와 기타 도서에 대한 지배와 관련하여 영국왕이Normandy공을 대체하기 시작하였음과 또 다른 한편으로 대륙 Normandy에 대한 종주권을 프랑스왕의 주권이 대체하기 시작하였음을 표시하는 사건들의 시원점이라는 점이라는 면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Normandy공으로서의 John왕은 1202년 판결과 그 결과 야기된 몰수 상실을 무시하였다; 그는 영국왕의 자격으로서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무력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그 몰수 상실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프랑스왕은 대륙 Normandy에서 그의 종속자를 제거한 반면에 영국왕은 다양한 변화를 겪은 이후에 그 도서들 혹은 그 도서 중의 일부에 대하여 점유를 획득하였다. 이것은 공의 권한과 프랑스왕의 종주권아래 통합되어있던 Normandy의 분리 분열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들의 과정 중에 영국왕은 전쟁권(jure belli)과 자신의 실력내에서 그 섬들에 대한 권원을 획득하였고 그 권원은 후에 일부 조약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영국왕은 이 섬들에 대하여 Normandy공을 대체하게 되었다. 준비서면에서(para. 26) 언급된 바처럼 “과거에 공이 가졌던 행정권을 교체하는 영국왕에 의하여 조직된 일부 대체적 행정권의 결과” 권원의 경개(更改)가 있었다. 이렇게 영국왕이 획득한 권원은 현재에도 영국에 의하여 적절하게 원용될 수 있다.
영국왕의 이러한 권원이 EcrehosMinquiers에 확대되었는가?
몰수 상실의 효력들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1259년 Paris 조약은, 부분적으로는 효력들을 제거하고 나머지에 대하여서는 확인하면서, 제4조에서 특히 Channel Islands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제4조가 Channel Islands를 간과하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하고, 제4조가 영국 바다의 이 쪽에 있는 땅을 말하고 이어서 바로 그 섬들을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섬들이라기보다는 Channel Islands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영국왕이 “프랑스의 귀족 그리고 Aquitaine공으로서” 이러한 섬들을 보유한다고 부기하였다면, 그것은 이 조약에서 영국왕이 Normandy공으로 그것들을 보유한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약의 제4조와 그에 포함되어 있는 프랑스왕이 영국왕에게 “주는(gives)”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프랑스왕에 대한 영국왕의 신하로서의 충성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영국왕은 그 조약이 체결되던 시점에 그가 보유하였던 Channel Islands를 받았고 그리고 영국왕은 과거처럼 종주로 있었던 프랑스왕의 종속자로서 그것들을 가졌다는 점이 나타난다고 여겨진다.
1360년 10월 24일 Calais 혹은 Brétigny조약은 영국왕의 권리와 관련하여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은 영국왕은 그가 “현재 보유하는(now holds)” 모든 섬들을 갖고, 보유한다는 합의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그의 권원은 완전한 것이다-그는 더 이상 프랑스왕의 종속자로 그것들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섬들에 대한 프랑스왕의 권리는 소멸되었다. 이 조약은 1259년 조약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영국왕이 전쟁권으로(jure belli) 획득한 권리를 확인한다.
프랑스왕의 권리를 대체한 영국왕의 이러한 권리가 EcrehosMinquiers에도 확대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서는, 영국왕이 1360년 조약의 시점에 이들 작은 섬들을 보유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조약은 이 조건을 부가하지만, EcrehosMinquiers가 영국왕이 소유하는 부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판단되는지 여부에 대한 명확한 표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정확성의 결여는 그 당시 조약들에는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 조약들은 정확한 경계의 획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 종속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17세기말까지 프랑스 군주국의 역사는 이러한 종류의 문건들의 해석 적용과 관련한 분쟁들로 채워져있다. 여기에 EcrehosMinquiers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다른 문건들에는 그것들이 섬들의 열거 중에 하나로 나타나 있지 않거나 혹은 특정 섬들을 적시한 후에 그것들의 속령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사실들로부터 이러한 작은 섬들에 대한 주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결정을 위하여 다른 요소들에 의존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1259년 조약에 대한 해석에 관한 문제라면, 프랑스왕이 이 조약으로 신하로서의 충성을 조건으로 그 때까지 그 자격으로는 무력에 의하여 획득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기에 대하여 어떠한 권리도 향유하지 못하던 영국왕에게 그 섬들을 “준다(gives)”는 사실에 대하여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의심이 있는 경우, 이 조약은 당해 증여를 제한하는 의미로 증여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관련된 것은 1360년 조약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프랑스왕에 의한 증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조약은 영국왕은 그가 “현재 보유하는(now holds)” 섬들을 갖는다는 취지의 합의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 규정은 선험적으로(a priori) 일방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서는 아니되고, 혼동의 투쟁기에 실현된 분리에 대한 해석으로 적절한 동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1360년에 영국왕이 EcrehosMinquiers를 보유하였는가? 이러한 효과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긍정적으로 증좌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Piers des Préaux에게 유리한 1200년 1월 14일 특허장 혹은 Piers des Préaux가 1203년 Ecrehos 섬에 소수도원(priory)을 설치하기 위하여 제공한 특허장은 1259년 그것보다 더 못하여 1360년에 영국왕이 이 도서군에 속한 섬과 작은 섬들 및 암석들을 보유하였다는 증거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특허장들은 1200년과 1203년에 Ecrehos 섬의 봉건적 종속관계에 관한 정보를 우리들에게 제공하지만, 1360년에 존재하였던 사실적 입장에 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섬들을 보유한다는 것-이것은 군사적인 의미로 1360년 조약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그것은 영국왕의 군사적인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 상태를 언급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 관련되어있는 한, 이러한 생각은 이러한 섬들에 영국의 군사적인 권위가 확립되어있다는 것, 주민들에 대하여 왕의 사자들이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같은 의미로 이렇게 점령된 섬들에서 외국이 조치를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 중의 어느 것도 EcrehosMinquiers, 실질적으로 인간이 거주하고 있지 않는 또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작은 섬들과 암석들의 경우에는 찾아볼 수 없다. 군사적인 견지에서 영국왕이 그것들을 보유하기 위하여서는 영국왕이 수비대를 그곳에 유지할 필요는 없다; 영국왕의 육군 및 해군의 힘을 가지고 영국왕이 프랑스왕의 무력에 의하여 개입되는 것을 방해받음이 없이 그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그곳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충분하고, 같은 의미로 영국왕은 이러한 프랑스의 무력에 의한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주된 Channel Islands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그리고 그가 활용할 수 있는 해군력을 통하여 그곳에 상존할 수 있었던 영국왕은 이렇게 EcrehosMinquiers와 관련하여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아마도 보여진다. 지리적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군도개념을 여기에 도입함이 없이, Jersey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작은 섬들의 근접성은 이 가능성을 확인하여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1360년 조약의 의미에서 분쟁대상인 작은 섬들을 그 당시 영국왕이 보유하였고 그리고 그 조약이 그것들이 영국왕에게 주어지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부가한 조건은 충족되었다고 보여진다.
만약 어떤 현시대의 사실들에 의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성직추천권(advocatio)에서 제기된 문제에만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1309년의 권한개시영장절차는 이 점에 대하여 명시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고, 판사들 앞에서 원용되고 그들이 받아들인 논거들은 -소수도원의 빈곤과 관련한 논거들- 절차의 그 부분과 관련이 없었다; 바라던 확인은 그러므로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Jersey의 거주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소수도원에 대한 증여로부터 발생하는 Jersey와의 실질적 관계 혹은 소수도원장의 간헐적인 Jersey 방문과 관련하여, 그것들은 최소한 Ecrehos에 있는 소수도원과 프랑스 땅에 소재하는 Val-Richer 대수도원간에 그 당시 존재하였던 관계와 종교적인 규율 체제에 의하여 상쇄된다. 이 사실로 부터 혹은 다른 유사한 사실로 부터도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이 1360년에 영국왕이 보유한 섬들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가정을 확인하거나 무효화하는 어떠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어지는 기간은 투쟁의 기간으로 그 기간 동안 영국군대가 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 기간의 대부분 동안 대륙 Normandy는 영국왕의 수중에 있었다. 영국왕을 프랑스 왕관의 상속인으로 만든 1420년의 Troyes조약은 -상속 후에 발생한 사태들로 인하여 영국왕은 그 과실을 획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명시적으로 프랑스 왕관에 Normandy공의 지위를 추가하였고,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일한 “왕이면서 주권적 영주(King and sovereign lord)”의 권한 하에 있는 두 왕국간의 구별을 유지하였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오랜 기간의 투쟁은 대륙 Normandy에서의 프랑스의 지배와 Jersey, Guernsey 및 기타 섬들에서의 영국의 지배의 유지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분리는 그 이후의 조약들에 의하여 명확하게 조건이 규정되지 않은 채 후의 조약들에 의하여서 유지되었다.
항변들에서 언급된 것들은 분쟁의 해결을 도와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1839년의 어업협정은 주권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직접적으로 혹은 그 규정들에 대한 문제되는 장소들의 특성이 요구하는 전통적인 확대해석(traditional liberal interpretation)의 결과로, 공동어업에 관한 규정들에 의하여, 이 협정은 어업 행위 심지어 어업 필요성과 관련하여 작은 섬들을 이용하는 행위에 대한 충분한 정당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사실들은 주권 문제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시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1360년에 영국왕이 분쟁의 대상이 되는 작은 섬들을 보유하였고 그것들은 따라서 그 해의 조약에 의하여 그의 것으로 인정되었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다는 확실한 증거에 의하여 지지되는 것이 아닌 그러할 수도 있는 해석을 제공하는 이상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약간의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이 작은 섬들에 대한 영국왕의 권리가 증대되었고 1259년 조약에서 결정된 것과 관련하여 프랑스왕이 자신의 상응하는 권리를 포기하였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명확한 사실은 그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도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양 측 모두에게 이러한 작은 섬들에 대한 이해관계의 결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수도원의 소멸이 그가 Ecrehos 섬에 어민들의 길잡이를 위하여 유지하였던 등대의 소멸을 야기하였을 때, Jersey도 Val-Richer도 수세기 동안 이들 작은 섬들에 존재하였던 유일한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는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19세기에 이 작은 섬들 자체가 아닌 그 지역에 대한 관심이 대두하였을 때, 그것은 우선 1839년 협정에 의한 어업의 규제에 관한 것이었지 이들 작은 섬들에 대한 주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는 19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에 제기되었을 뿐이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난 사실들을 포함한 많은 사실들이 분쟁의 대상이 되는 작은 섬들에 대한 양 정부의 상반된 주권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론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판단함에 있어서, 분쟁이 무주지인 영역에 대한 주권 획득에 관한 상반된 주장과 관련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실현된 분리의 해석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여서는 아니된다. 한 국가가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 전부 혹은 그 중 일부에 대하여 권한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은, 만약 그것이 그 지역에 확립된 권한이 부재한 상태에서 배후의 동기 없는 자국민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려는 희망의 반영 정도가 아니라면, 그 작은 섬들에 대한 자신의 주권과 관련한 당해 국가의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의 일방적인 표현은, 일방의 항의가 타방에 대하여 이러한 효과를 갖는 이상으로, 타방 당사국의 주장을 무효로 하기에는 충분하지 아니하다. 분리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양국 간에는 최소한 잠재적인 불일치가 있고 그 불일치는 일방적인 행위로 자신에게 유리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유형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대의 분리에 대하여 현재 법적으로 유효한 해석에 이르기 위하여 확인되어야하는 것은 우선 원용된 사실들이 어느 한 정부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였는지 혹은 타방 당사자의 주장을 인용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사실 혹은 인용의 발견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유형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1360년 조약이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을 영국왕에게 할당된 부분에 두었다는 해석, 즉, 1360년에 주된 섬들을 보유하였던 영국왕이 또한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을 보유하였다는 여태까지 가정에 기초한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인 해석과 원용된 사실들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점에 대하여, 1820년 6월 20일에 해도와 함께 부본이 프랑스 대사에 의하여 영국 외무부에 전달된 1819년 9월 14일자 프랑스 해양부 장관의 공문의 효력을 결정할 필요성이 있다; 이것은 “영국의 점유하에 있는 Minquiers의 섬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것을 문언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언급은 Minquiers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권위를 그것에 부여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이 공문은 주권에 관한 것이 아닌 굴 어업의 보호와 관련한 협상과정 중에 무엇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서만 제공된 것이다; 그것은 주권 문제에 대하여 결정할 권한을 갖지 않는 장관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그것의 작성자 측의 면에서 볼 때 심각한 잘못된 기억을 노정한다; 런던에서 계속된 협상을 목적으로 지시문을 초 잡을 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Canning은 영해에서의 국가의 배타적인 어업권과 상호적인 권리를 그의 논리의 근거로 삼았으며, 그는 Chausey Islands-그에 대하여 그는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인근의 유보된 어업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편 MinquiersEcrehos에 관하여서는 어떠한 규정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양부장관의 용어는 오늘날 의존할 수 있는 인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점에 대한 Canning의 침묵을 그가 이들 작은 섬들이 영국 주권밖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였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책임있는 정치가들 누구에게도 그 당시에 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덜 명확한 문언들에서이기는 하지만, 1869년 어업사건과 관련하여 양국정부의 태도는 내가 보기에는 실체적인 측면과 관련하여서는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 당시 Jersey의 일부 어민들이 Minquiers에서 행하여진 일부 약탈 행위에 대하여서 프랑스 어민들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이들 작은 섬들에 대한 영국의 주권 보유로부터 통상적으로 파생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Jersey 당국에 의한 경찰권 행사 혹은 어떠한 관할권 행사도 야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만제기는 프랑스 정부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영국 대사관의 외교공한(démarche)의 내용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를 영국 대사관에 전달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런던 정부는 그 자신이 Minquiers를 영국의 점유 하에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암시하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 추궁하는 책임이 사실상 근거가 있는 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어서, 영국 정부가 사소한 사건을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절제된 기조로 행동하였다고 판단된 경우에만, 이러한 해석을 피할 수 있다.
1929년에 다시 Minquiers와 관련하여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때에는 Le Roux씨가 프랑스 행정부의 임차권을 부여받은 후에 그 곳에 건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영국 당국은 영역주권을 통하여 Minquiers에 대하여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되는 경찰력 혹은 관할권의 행사에 의하여 그를 막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게 Le Roux가 시작한 건축을 막아달라고 요청하였고, 그것은 실현되었다. 이 사건에서 양 정부는 Minquiers에 대한 주권과 관련한 주장에 이르는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다. 양 정부가 보여준 절제된 기조는 어느 일방에게만 불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 혹은 유사한 성격의 다른 사실들을 가지고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에 대한 주권에 대한 청구를 어느 한 당사자가 포기하였다거나 혹은 그에 상반된 주장을 인용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느 일방이 원용하는 사실들이 중세의 분리로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이 영국왕의 몫으로 포함되었다는 해석을 확인하거나 혹은 무효화하는 지 여부에 대하여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권원의 탄생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분리에 대한 비록 확실하지는 않지만 있을 법한 해석의 정확성을 확인하는데 관심이 있다.
지적한 바처럼, 1839년 협정과 실제 그것에 부여된 확대해석(liberal construction)에 대하여 언급할 때, 이와 관련하여 어업행위나 어업과 관련한 행위들로 부터는 어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다.
존재 여부에 대하여서는 다투어지지 않은 많은 사실들이 있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에 대하여서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실들은 Jersey 당국이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는 사건들에서 일관된 방법으로 EcrehosMinquiers에서 발생하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을 관련시켰고 그에 따라 행위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Jersey 당국은 그렇게 행위를 한 것은 관할권의 장악과 경찰행위 및 행정행위에 의한 것이다. 관할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이 영역관할권을 장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약간은 주저된다. 관할권이 관련된 사실들은 확립된 당국이 존재하지 않는 수면 위에 노출된 암석에 다름없는 작은 섬들에서 발생하였고, 따라서 공해에서 위법이 행하여지거나 혹은 난파물이 공해에서 수거되는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실들은 관할권을 확대하여야 하는 경우를 쉽게 제공한다. Finlay 경은 Judgment No. 9의 본인 의견에서 해양 사건에서 이러한 관할권 확대를 언급하였다.(P.C.I.J., Series A. No. 10, p. 51) Jersey인들에게 관할권이 행사되었다; 1869년 사태시와 Le Roux 사건에서 관할권을 적용하는 대신에 영국 정부는 프랑스 당국의 행위를 통하여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역관할권의 본질적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다. 작은 섬들에 있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행하여지는 행위들에 대한 인구조사 활동은 영역권 행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Jersey에 있는 Jersey인들에게 그 작은 섬들에 있는 그들에게 속하는 재산과 관련하여 부과한 세금도 같은 이치이다; 외국에 있는 재산과 관련하여 자국민에게 국가가 과세하는 것 혹은 외국에서 발생한 사실들에 대한 통계를 수집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Jersey 당국이 그 작은섬들에 세관을 설립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그 곳에서 행하여진 활동에 대한 정보가 제출되지 않았고, 둘째로 영국이 제출한 1886년의 문건에서 “[프랑스] 세관 감시선이 Ecrehos에 일주일에 한번 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관행은 그 영해 이원에서 국가가 행사하는 세관 통제를 인정하거나 관용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Jersey인들이 작은 섬들에 있는 재산을 구매 혹은 양도하는 문건을 Jersey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일상적인 형태로 준비하였다면, 그것은 이러한 작은 섬들에 대한 공적인 권한의 행사로 여겨지기 보다는 관련 당사자들이 이용 가능한 유일한 실제적인 수단을 채택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최소한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된 사실들과 기타 유사한 사실들은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일관된 모습으로 Jersey 당국이 EcrehosMinquiers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하여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또 Jersey 당국이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작은 섬들의 성격과 이러한 작은 섬들의 이용에 적절한 방법과 범위로 행동을 취하였음을 보여준다. Jersey 당국은 프랑스 당국 측의 배타적 행위에 미치지 못하는 어떠한 경쟁적인 행위에도 마주침 없이 이것을 행하였다. 프랑스 당국은 훨씬 더 많은 자제를 보여주었다. 때때로 타협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였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를 비난할 수 없지만, 프랑스 정부가 오랜 기간 동안 다툼을 망설인 점과 EcrehosMinquiers에서 발생한 것들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는데 프랑스 당국이 최소한 상대적인 권한행사 회피를 한 점에 대하여 고려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렇게 주장되는 사실들과 특히 Jersey 당국의 조치들이 프랑스 당국의 상반된 조치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은 상태를 전제할 때, 앞에서 언급된 가정의 합리성을 사후적으로 확인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정에 따르면 1360년에 주된 섬들을 보유한 영국왕은 EcrehosMinquiers에 대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가 조약의 의미 범위내의 작은 섬들을 보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일한 사실들로부터 보면, 분쟁의 대상이 된 작은 섬들에 대한 독립된 지방당국의 수립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작은 섬들의 특성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프랑스 당국 측 보다는 Jersey 당국 측에 의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계속적인 활동이 행하여졌음과 이러한 방법으로 이 작은 섬들이 Jersey에 부착되는 전통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실제로 1360년의 분리에 부여되는 해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논란의 전 과정 동안 실제 지속되었던 주권에 관한 양 정부간의 논란의 발생 전에 이미 이 해석은 나타나 있었다. 이 해석은 과거에 제기된 해석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은 근대와 그리고 오늘날 분쟁의 대상인 작은 섬들을 보유하고 있고 그래서 영국왕이 과거에 그것들을 보유하였다는 가정은 합리적이라고 보여진다. 동시에 중세의 분리는 실제로 그 작은 섬들을 영국왕에게 귀속시켰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조건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다소 융통성 있는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영국 당국은 영국이 지금 주장하는 완전한 권리 행사를 주저하면서 그리고 프랑스인들에게 직접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프랑스 당국에 문제를 넘기는 방법으로 절제되게 행위를 취하여왔다. 고대 문건들과 그에 대한 확대해석에 근거하여, 관행에 의하여 확립된 것들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융통성은 같은 방법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소는 특별협정에서도 또 서면절차에서도 또 변론 중에서도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판단하도록 요청받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의 견지에서 판결에 나타난 결정은 정당하다고 보여진다.
(서명) BASDEVANT
 
이름
BASDEVANT
지명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Guernsey , Ecrehos , Minquiers , Channel Islands , Channel Islands , Channel Islands , Channel Islands ,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Minquiers , Ecrehos , Ecrehos , Ecrehos , Minquiers , Channel Islands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Jersey , Jersey , Jersey , Ecrehos , Jersey , Guernsey , Ecrehos , Jersey , Minquiers , Minquiers , Chausey Islands , Minquiers , Ecrehos , Jersey , Minquiers , Jersey , Minquiers , Minquiers , Minquiers , Minquiers , Jersey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Jersey , Jersey , Jersey , Jersey , Ecrehos , Jersey , Jersey , Jersey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Jersey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Ecrehos , Minquiers , Jersey , Jersey
법률용어
점유 행위 , 역사적 권원 , 종주권 , 고대 권원 , 고대 권원 , 종주권 , 종주권 , 종주권 , 전쟁권(jure belli) , 전쟁권 , jure belli , 선험적으로(a priori) , 무주지 , 점유 , 영역주권 , 영역관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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