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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대학 고고학자료관 소장 고구려 와전의 의의

자료관에 소장된 와전은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와전이 대부분을 차지하나 집안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키와도 2점이 확인되는데 출토지에 관한 정보가 상당히 흥미롭다. 만약 각 기와에 적힌 출토지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평양지역과 집안지역의 기와 출토 유적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다.
우선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에는 대부분이 묵서로 ‘平壤土城’이라고 적혀 있으나 수막새 ⑥과 같이 ‘樂浪土城’이라고 주기된 것도 있다. ‘낙랑토성’이라고 적힌 수막새 ⑥은 명확한 고구려기와주 001
각주 001)
자료관의 유물이 고구려의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고구려와전으로 특정할 수 있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①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와전, ②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에서 동시에 출토되는 동계(同系)의 와전, ③ 고구려와 관령성이 인정되는 명문이 있는 와전, ④ 고구려의 유물과 공반되는 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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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지금까지 낙랑토성에서의 고구려기와 출토에 관한 보고는 드물고 주로 낙랑토성의 동쪽 편에서 고구려기와가 다수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 002
각주 002)
朝鮮總督府, 1915의 해설(關野貞,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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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출토지에 관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고구려에 의해 낙랑이 멸망한 이후 낙랑토성이 고구려에 의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유단식 수키와 ⑤의 경우에는 ‘평양토성’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까지는 대동강 이북에 대한 낙랑의 지배와 유적과 유구에 대한 검토가 적었다. 이 지역에도 충분히 낙랑과 관련된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료관에 소장된 ‘평양토성’이라고 묵서된 주기는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고구려기와로 알려진 명문기와에서 ‘寺’자가 확인되는 것은 두 종류가 보고되었는데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음각한 것주 003
각주 003)
傳 장매리 출토의 ‘嚴寺’, ‘寺’명 명문기와(朝鮮總督府, 1929; 井內功編,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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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정릉사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양각한 것주 004
각주 004)
김일성종합대학,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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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고구려에 사원이 건립되었다는 것과 사원 건축에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해 준다.주 005
각주 005)
고구려기와가 사용된 기록으로는 『舊唐書』 卷一百九十九 上 列傳第一百四十九 上 東夷 高麗,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 新廟及王宮 官府乃用瓦” 와 『新唐書』 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上 東夷 高麗, “居依山谷 以草茨屋 惟王宮 官府 佛廬以瓦”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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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최초 사원 건립에 관해서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前秦)은 승려 순도를 파견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 등을 전했고,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동진(東晉)에서 승려 아도가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 승려를 위해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주 006
각주 006)
『三國史記』 巻十八 小獣林王五年條,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遺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五年,春二月始創肖門寺以置順道又創伊弗蘭寺以置阿道此海東佛法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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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당시의 고구려 수도가 현재의 중국 집안 일대라고 본다면 이 두 절이 집안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까지 집안지역에서 고구려의 사원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집안지역에서 출토된 불교 관련의 유물로서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弗’자명 기와의 파편주 007
각주 007)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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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1985년에 인쇄청 빌딩 공사에서 금동불이 출토된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주 008
각주 008)
이 이외에 1936년에 小泉顯夫가 집안을 방문했을 때 집안 현성의 일각에서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는 기둥의 초석을 목격하고 불교의 전당지가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하고 있다(東潮·田中俊明,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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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원 관련의 유물이 매우 적고 집안지역의 고구려 사원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현 시점에서 자료관 소장의 ‘寺’명 명문 암키와 圖1의 ②는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기와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말해 집안 지역에 고구려 사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 기와가 가지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圖 1_고구려 ‘寺’명 명문기와의 예(축척 부동) ➊
圖 1_고구려 ‘寺’명 명문기와의 예(축척 부동) ➋
圖 1_고구려 ‘寺’명 명문기와의 예(축척 부동) ➌
圖 1_고구려 ‘寺’명 명문기와의 예(축척 부동) ➍
圖 1_고구려 ‘寺’명 명문기와의 예(축척 부동) ➎

  • 각주 001)
    자료관의 유물이 고구려의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고구려와전으로 특정할 수 있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①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와전, ②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에서 동시에 출토되는 동계(同系)의 와전, ③ 고구려와 관령성이 인정되는 명문이 있는 와전, ④ 고구려의 유물과 공반되는 와전. 바로가기
  • 각주 002)
    朝鮮總督府, 1915의 해설(關野貞, 1928) 바로가기
  • 각주 003)
    傳 장매리 출토의 ‘嚴寺’, ‘寺’명 명문기와(朝鮮總督府, 1929; 井內功編, 1976) 바로가기
  • 각주 004)
    김일성종합대학, 1976 바로가기
  • 각주 005)
    고구려기와가 사용된 기록으로는 『舊唐書』 卷一百九十九 上 列傳第一百四十九 上 東夷 高麗,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 新廟及王宮 官府乃用瓦” 와 『新唐書』 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上 東夷 高麗, “居依山谷 以草茨屋 惟王宮 官府 佛廬以瓦”를 들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三國史記』 巻十八 小獣林王五年條,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遺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五年,春二月始創肖門寺以置順道又創伊弗蘭寺以置阿道此海東佛法之始”. 바로가기
  • 각주 007)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바로가기
  • 각주 008)
    이 이외에 1936년에 小泉顯夫가 집안을 방문했을 때 집안 현성의 일각에서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는 기둥의 초석을 목격하고 불교의 전당지가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회고하고 있다(東潮·田中俊明, 1995).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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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대학 고고학자료관 소장 고구려 와전의 의의 자료번호 : ku.d_0003_009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