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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야이치가 사용한 기와 명칭

  • 저필자
    藤井和夫
앞에 게재한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과 『昭和拾壱年以後早稻田大學東洋美術陳列室會津八一氏蒐集品目錄』에는 ‘鐙瓦’, ‘宇瓦’, ‘牝瓦’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게재한 표에는 없으나 『會津八一收藏古器物目錄』에는 ‘牡瓦’라는 명칭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명칭은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가 기와의 명칭에 관해서 적고 있듯이 덴표쇼호(天平勝寳) 8년(756)의 일본 최고(最古)의 문서인 쇼소인(正倉院) 문서 중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재에 의거해 사용한 것에서 시작한다.(石田茂作, 1930)
『正倉院文書』 正集第七에는
「造東大寺司 牒興福寺三綱務所
應造瓦參萬枚
  男瓦玖仟枚 女瓦一萬捌仟枚
  堤瓦貳仟七肆伯枚 鐙瓦參伯枚
  宇瓦參伯枚
 右、限十一月十五日以前、可用件瓦、然司造物繁忙、不堪造瓦、乞察此趣、彼所令造、期内欲得、其所 用人功竝食料、依數將報、令以狀牒、牒至早速處分、以牒、
  天平勝寳八歳八月十四日主典正七位上葛井連根道
  長官正五位上兼下總員外介佐伯宿稱今毛人
  判官正六位上兼下野員外椽上毛野君眞人
  大僧都良辨」
 
라고 되어 있고 男瓦, 女瓦, 堤瓦, 鐙瓦, 宇瓦라는 5종의 기와의 명칭이 보인다.
아이즈 야이치는 상기의 정창원 문서 이외에도 헤이안(平安)시대 중기(10세기)에 편찬된 격식(格式, 律令을 改訂増補하기 위한 추가법령이나 그 시행 세칙)인 『延喜式(엔기시키)』 권34, 목공료부(木工寮部)에서 아래에 든 조(條) 등을 인용해 ‘牡(男)瓦, 牝(女)瓦, 堤瓦, 鐙瓦, 宇瓦’ 의 5종을 이용한 이시다 모사쿠의 명명(命名)을 “예전부터 지금까지 올바르게 정확해진 규칙에 합치하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즉 『延喜式(엔기시키)』 권34, 목공료부의 조에는
夫一人、一日打埴大三百斤。〔雇人加一百斤〕以沙一斗五升交埴四百斤。
以一千八百斤爲一疊。 以四疊充一夫。
工一人。日造瓪瓦九十枚、〔筒瓦亦同。但彫端八十三校。〕宇瓦二十八枚、鐙瓦二十三枚。
以埴十一斤造瓪瓦一枚、筒瓦九斤、宇瓦十八斤、鐙瓦十五斤、暴干雜瓦三百五十枚。
 
라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해 아다치 야스시[足立康]의 ‘鐙瓦, 宇瓦’라고 부르는 호칭은 명명의 근거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난해한 것을 이유로 ‘軒丸瓦・軒平瓦’라고 해야 한다는 부질없는 논리를 전개한다.
아이즈 야이치는 말한다.
우리는 덴표[天平]시대를 중심으로 수이코[推古]에서 가마쿠라[鎌倉] 근처까지가 흥미의 중심으로, 현대 이후의 기와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역사상의 실물을 역사상의 호칭으로 복원하고자 하므로 지금부터 합리적인 개정을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덴표, 엔랴쿠[延曆], 내려와서는 무로마치[室町]시대의 사람들까지가 ‘のき瓦[처마기와]’라고 부르던 것을 ‘のき瓦[처마 기와]’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불편함이 없다.(會津八一, 1982a, 12쪽)
 
아이즈 야이치와 아다치 야스시의 고와 명칭에 대한 논쟁에 관해서 구보 쓰네하루[久保常晴]는 아이즈설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말에 따르면 에도[江戸]시대 중기 이후 선악을 가리지 않은 상태를 이룬 무차별적인 말씨 사용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메이지(明治) 이후에도 계승되어 각양각색의 명칭으로 불려왔다. 이 등와(鐙瓦)와 우와(宇瓦)라는 명칭과 같이 대략적인 변천이 명확해진 현재에 있어서 과거의 오용을 고집하지 않고 올바른 이름으로 되돌려 통일된 칭호를 사용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久保常晴, 1940, 586쪽)
 
안도 고세이[安藤更生]도 적고 있는 바와 같이 “고와(古瓦) 명칭의 불통일(不統一)은 이 논문에 의해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安藤更生,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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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야이치가 사용한 기와 명칭 자료번호 : ku.d_0003_008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