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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파리 제4호분

제 4호분은 처음에 연습 중인 군대에 의해 발견된 벽화분이다. 현재 봉토의 높이는 북쪽에서 재면 약 8척(尺), 남쪽에서는 약 23척이다. 원래는 방형분이었던 것 같다. 밑부분의 지름은 동서, 남북이 각각 70척이다. 묘실은 거의 정남쪽으로 열려 있고 연도 입구의 이맛돌은 분구 정상 밑 약 8척인 지점에 있다. 봉토와 석실과의 관계는 圖 3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
석실은 연도부와 현실로 되어 있다(圖 4). 연도는 평천장의 가늘고 긴 복도로, 입구에 화강암의 판석을 세워 막음돌로 쓰고 있다. 양측의 벽은 잘라낸 돌을 쌓았는데 천장은 큰 반석(盤石)을 걸쳐 놓았다. 내면에는 얇게 회반죽을 칠해 마무리했다. 연도에서 현실로 들어가는 부분에 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 바로 앞에는 받침돌을 마련했고 문의 장부가 들어가는 문동개가 좌우에 2개 있다. 그러나 지금 문은 남아 있지 않고 문 장부의 석조품 파편을 발굴 중에 찾아내었는데 원래는 좌우로 잡아당겨 열리도록 되어 있는 돌문 2장을 만들었던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평면은 약간 긴 방형(동서 8척 3촌, 남북 10척 5분)이다. 네 면이 직립하는 벽 위에 2단(段)의 고임천장을 만들고 모퉁이에 삼각천장을 쌓아 올려 궁륭상의 천장을 쌓은 것은 제1호분과 동일하다. 바닥은 2장의 평평한 큰 판석을 깐 것으로 현실의 높이는 8척 4촌이다. 바닥돌의 밑에는 목탄층이고 그 밑이 맨땅이다. 도굴에 의해 안쪽의 바닥돌은 분쇄되어 관대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실과 연도는 같이 내면에 회반죽을 칠해 마무리했는데 순백의 화장칠을 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은 연도의 측벽에도 벽화가 있다. 점토가 벽면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어 긴급한 조사로는 그 전모를 밝힐 수 없으나 운산표묘(雲山縹緲)의 원경에 수목조금(樹木鳥禽)을 배치한 것 같고 또한 점점이 소형의 삼각형 금박이 붙어 있다.
圖 3_진파리 제4호분 외형도
圖 4_진파리 제4호분 석실 실측도
현실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있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북쪽의 현무가 있을 곳에 용이 각각 그려져 있으나 모두 벽면의 아랫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오른쪽에 비룡을 부리는 남자의 상을, 왼쪽에는 날짐승을 탄 여자의 상을 그리고, 여백에는 연화문, 인동문(忍冬紋), 운문(雲紋)이 적절하게 날아다니도록 하고 있다. 용을 부리는 남자상은 면류관을 쓰고 영소(纓疏)를 나부끼며 손에는 연화를 들고 기세 좋게 비상하는 모양을 솜씨 좋게 나타냈다. 또한 여자상도 같은 구도인데 머리를 꽃 비녀로 꾸미고 옷을 바람에 휘날리게 해 빨리 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붉은색이고 여자의 얼굴은 흰색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용모도 매우 교묘하게 나타내고 있다. 서벽 중앙의 윗부분에는 원 안에 그려진 달의 상이 있고 동쪽의 같은 부분에는 해의 상이 있어야 하지만 흘러내린 흙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어 볼 수가 없다.
천장의 제1고임에는 붉은 바탕에 다채로운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이 떠다니고 그 위의 고임에는 명암의 2색이 교대로 반복된 기하학적인 문양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것은 꺾어 접는 식의 늘어선 장막형상문양과 닮은 것으로 본 예는 매우 입체적인 효과를 낸다. 또한 여러 곳에 화변형으로 잘라낸 금박을 붙이고 있다. 삼각 모퉁이 천장의 밑면에는 연화를 두고 안쪽 면에는 용문이 변형된 당초문(唐草紋)을 돌렸다. 맨 위의 천장 면에는 크고 작은 금박에 의한 별자리 배치도를 그리고 있다. 색채는 제1호분보다도 종류가 다양하며 다수의 금박을 배치해 현란한 취향을 헤아리기에는 충분하나 그림이 희미하고 박락의 정도가 심해 보존 상태는 제1호분에 한참 뒤쳐져 있다. 그리고 남벽에는 아마도 주작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나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잔존 부분으로 추측해 보면 이상의 벽화는 고구려 벽화 중에서 제일 우수한 작품이었음을 알수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남녀상의 세부와 구도, 고임부의 멋진 문양 등은 본 벽화가 탁월한 구상과 교묘하고 정교한 필치로 그렸던 것을 나타내 준다. 만약 보존상태가 제1호분과 같이 양호했다면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 선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나 아쉽게도 도굴에 의해 입구가 열려 색조가 바래고 대부분이 박락되었으며 금박은 떨어져 나가 상태가 매우 참담하다.
이 석실에는 묵서명과 긁어 새긴 문자가 있다. 즉 북벽의 중앙에는 대략 20자의 문자가 4행으로 묵서되어 있고 또한 서벽의 약간 왼쪽에 대칼이나 못과 같은 것으로 새긴 2행의 문자가 있다. 전자는 문장을 읽어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나 후자는 ‘此日□□□咸通十一庚寅三月’로 보인다. 함통(咸通)은 당의 연호로 조선에서는 신라 말엽인 경문왕 10년(870년)에 해당한다. 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약 200년이나 그 당시에 입구를 열고 석실 내에 들어가 이와 같은 낙서를 한 것 같은데 이 또한 이 고분의 사적(史蹟) 가치에 흥미를 더해주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도의 입구 가까운 곳에서 관에 사용된 재료의 잔해가 남아 있었는데, 관은 원래 옻칠한 목관으로 금동못으로 꾸며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골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고구려 멸망(658년) 후에 약탈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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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파리 제4호분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7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