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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의 해제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圖 3)는 아리미쓰가 쓴 것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 원고용지에 적혀 있는데 모두 17장으로 되어 있다.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이번에 소개하면서 필자인 아리미쓰가 제목을 붙였다. 조사복명서의 초안으로 생각되는데 원고와 함께 전 동명왕릉 소재지의 약도, 제1호분 및 제4호분의 분구 측량도, 석실 실측도, 사진 등이 남아 있다. 도면은 인쇄원고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혹시 도면이나 사진은 조선고적연구회가 간행하고 있던 『고적조사개보(古蹟調査槪報)』와 같은 것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현재 아리미쓰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전 동명왕릉 소재지의 약도와 제1호분 및 제4호분 분구 실측도, 석실 실측도는 얇은 안피지(雁皮紙)에 트레이싱된 것이 존재한다. 분구 측량도 및 석실 실측도에는 圖 1부터 圖 4까지의 서수(序數)가 아리미쓰의 손에 의해 묵서되어 있다.
이 분구 실측도에 의해 두 고분이 발굴 당시에 방대형의 분구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주 001
각주 001)
진파리 제1호분, 제4호분은 발굴 당초부터 방형분으로 인식되었으나(小川敬吉他, 1941;有光敎一·藤井和夫·朱洪奎 編, 2008) 조사참가자의 한 사람이었던 小泉顯夫가 나중에 ‘원분(円墳)의 형태를 띤다’, 혹은 ‘원분(円墳)’이라는 혼란을 초례하는 기술을 하고 있다(小泉顯夫, 1986, 355·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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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문화종감(朝鮮古文化綜鑑)』 제4권(梅原末治·藤田亮策, 1966)에 게재된 사진은 아리미쓰가 소장한 것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중에는 나중에 논문 집필을 할 때 사용된 것 등 3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외에 같은 책에 미게재된 것 등 24장이 있으므로 전부 40장이 남아 있다.주 002
각주 002)
부록 1의 圖 7·圖 30·圖 31은 2장의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나, 圖 31은 이어붙인 것을 복사한 것만이 남아 있어 총 40장이다. 하지만 아리미쓰의 수중에 남아 있는 사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작성된 것이 남아있지 않고 교토대학 재직 중 강의 등에 사용하기 위해 복사한 사진만이 남아있는 것도 일부 있다.
이외에도 제7호분 출토의 금동제투조금구의 사진 1장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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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 3_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보고 원고
진파리 고분군을 조사할 때는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에 의해 벽화의 모사가 행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제1호분 및 제4호분의 벽화모사는 1941년 6월에 실시된 것으로 보아 왔다(高橋潔, 2003;佐々木榮孝, 2005;早乙女雅博, 2005b). 그러나 이번에 보고하는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에 의해 오바 쓰네키치에 의한 진파리 제1호분의 모사가 6월의 조사에서는 행해지지 않았음이 분명해졌다. 벽화모사는 가을에 실시된 조사에서만 행해진 것이다. 또한 발견 당시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우수한 작품인 제1호분 벽화만 모사제작이 실시되었고 도굴에 의해 보존상태가 나빴던 제4호분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과 함께 아리미쓰가 소장한 또 다른 자료에는 1941년 가을의 조사 때에 전 동명왕릉 주변의 정비작업 중에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조사자료가 있다. 고구려시대 유적관계 자료는 아니지만 동일 조사의 발굴 자료이기 때문에 같이 공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함으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자료는 오노 다다아키[小野忠明]가 작성한 청동기시대 주거지 주변 실측도의 연필 트레이스도(圖 4)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실측도의 연필 트레이스도(圖 5),주 003
각주 003)
이러한 도면들은 「梅原考古資料」 11097, 11098과 마찬가지로 동일 인물의 손에 의해 동시에 2장을 트레이스한 것으로 생각된다. 트레이스는 有光敎一가 아닌 梅原末治에 의한 것이다.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만 트레이스한 날짜 ‘昭和17년(1942년) 10월 1일’이 기재되어 있다. 梅原末治는 다음 날인 10월 2일에 무문토기 2점의 도면(「梅原考古資料」 5195, 5196)을 작성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평양박물관에서 행해졌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에 대한 축척과 척도는 藤井和夫가 부가했다.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는 「梅原考古資料」의 정리 당시에 그와 똑같은 사진이나 동일한 유구, 유물을 촬영한 사진, 동일한 유구, 유물의 실측도, 트레이스도에 「梅原考古資料」와 동일한 정리번호를 기재해 둔 것이 있다. 따라서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 「梅原考古資料」와 동일번호가 적혀 있어도 반드시 동일한 사진이나 실측도가 아닐 경우도 있으므로 有光敎一의 소장자료를 반드시 「梅原考古資料」의 副本(부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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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하루히사[中村春壽]의 손에 의해 그려진 무문토기 2점의 실측도 원도(圖 6),주 004
각주 004)
아리미쓰에 의하면 이러한 실측도는 유물을 평양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서 작성했다고 한다. 실측일은 1943년 4월 14일이다. 또한 中村春壽의 실측도 중에는 小野山節가 1/2로 축소한 도면이 들어 있으나 정확히 언제 작성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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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다카야스[樋口隆康]가 촬영한 무문토기[無紋土器] 2점의 사진(「梅原考古資料」 3388·3389와 동일 토기)(圖 7), 무문토기 2점,주 005
각주 005)
다음의 梅原末治가 작성한 도면은 「梅原考古資料」 5195, 5196의 무문토기 2점과 다른 것으로 전술한 中村春壽가 실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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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검 1기·편평편도석기 3점·방추차 2점·석화(石貨) 2점의 트레이스도(圖 8),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무문토기 2점의 도면(「우메하라[梅原]고고자료」 5195·5196) 트레이스도이다(圖 9).
圖 4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주변 실측도, 연필 트레이스도
圖 5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실측도, 연필 트레이스도
圖 6_동명왕릉 부근 주거지 출토 토기 실측도 원도
圖 7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출토 토기 사진
圖 8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출토 유물 실측-트레이스도(❶ 무문토기 ❷ 석검 ❸ 편평판인석기·방추차·석화)
圖 9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출토 무문토기 트레이스도
이 주거지에 대해 조사자 보고는 물론 없고, 광복 후 북한의 연구자가 쓴 논문 중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정백운, 1958). 그 이외에는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아리마쓰 교이치[有光敎一] 등이 개설서 안에서 간단히 다루고 있는 정도이다(梅原末治, 1946;有光敎一, 1956·1966). 정백운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는 주거지 실측도 1장과 2점의 토기 복원도가 유물과 함께 남아 있다고 한다. 논문에는 주거지(圖 10) 및 토기 1점(圖 11)의 실측도가 게재되어 있다. 실측도의 토기는 圖 7의 ❶토기로 생각된다. 다만 이 도면들은 여기서 소개하는 아르미쓰의 소장자료와는 별개의 것이다.
圖 10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실측도(원재:정백운, 1958)
圖 11_동명왕릉 부근 청동기시대 주거지 출토 토기 실측도(원재:정백운, 1958)
그런데 이 주거지에서는 팽이형 토기 5점도 출토되었다고 한다(정백운, 1958:67). 사진(圖 7)에 의하면 2점 모두 소성시의 뒤틀림이 보이는데 특히 圖 7의 ❶이 심하다. 이것을 실측도와 비교해서 특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나카무라 하루히사[中村春壽]의 실측도(圖 6)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도면의 트레이스도(圖 9)의 토기가 동일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기나 도면대로라면 크기가 다르고 구연부의 표현도 달라서 별개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주 006
각주 006)
도면 중의 토기 관찰에 관한 기재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만 梅原末治의 작성도에 대해서는 「梅原考古資料」5195, 5196에 의한다.
(中村春壽 실측도 ❶(圖 6 ❶)
‘현재 이 토기는 작은 파편이지만 대략 절반 정도가 남아 있다. 붉은 흑차갈색. 장석(長石)의 입자, 활석(滑石)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일부분에 광택이 나는 면이 있다. 거의 전면적으로 마멸되었다. 기형은 부정형으로 요철이 심하다. 점토띠를 쌓아 만든 식. 구멍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
‘(구연부)V절 단면은 ▼이고 상부는 수직압흔으로 생각된다.’
‘(말아 접은 구연부분)그 부분에 접합부분이 명료.’
‘(저부)마멸.’
(中村春壽 실측도 ❷(圖 6 ❷)
‘기형의 반이 결실된 작은 파편이다. 붉은 차갈색. 장석(長石)의 입자와 활석(滑石)이 많고 일부에는 광택면이 있다. 매우 마멸이 심하고 돌입자의 존재가 현저하다. 구연부는 수평이지 않고 크게 파상형을 이룬다. 표면부분에는 油燃狀 유기질이 부착된 곳이 많다. 점토띠를 쌓아 만든 식.’
‘(구연부)상부에는 복(箙)압흔이 있다. 단면은 ▼로 되어 있다.’
‘구멍은 2개씩 대칭적으로 있던 것 같다. 여기에는 한쪽만 있다.’
‘(말아 접은 구연부분)이 부분에서 접합한 것인가?’
‘(저부)이 부분에 특히 마멸이 심하다.’
(梅原末治 작성도 ❶(圖 9 ❶)
‘자갈이 많다. 두껍고 조질임. 적갈색을 띤다. 형태는 휘어 있다.’
(梅原末治 작성도 ❷(圖 9 ❷)
‘붉은 색의 두꺼운 태토에 사립을 포함함. 조질로 만들었다.’
‘절반은 파편이다.’
‘(동상부(胴上部))보수. 이 부분 휘어짐.’
‘접합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매우 휘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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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운의 논문에 실린 도면(圖 11)에는 축척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다른 도면의 토기와 같은지 명확히 알 수 없다.

  • 각주 001)
    진파리 제1호분, 제4호분은 발굴 당초부터 방형분으로 인식되었으나(小川敬吉他, 1941;有光敎一·藤井和夫·朱洪奎 編, 2008) 조사참가자의 한 사람이었던 小泉顯夫가 나중에 ‘원분(円墳)의 형태를 띤다’, 혹은 ‘원분(円墳)’이라는 혼란을 초례하는 기술을 하고 있다(小泉顯夫, 1986, 355·359쪽). 바로가기
  • 각주 002)
    부록 1의 圖 7·圖 30·圖 31은 2장의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나, 圖 31은 이어붙인 것을 복사한 것만이 남아 있어 총 40장이다. 하지만 아리미쓰의 수중에 남아 있는 사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작성된 것이 남아있지 않고 교토대학 재직 중 강의 등에 사용하기 위해 복사한 사진만이 남아있는 것도 일부 있다.
    이외에도 제7호분 출토의 금동제투조금구의 사진 1장이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러한 도면들은 「梅原考古資料」 11097, 11098과 마찬가지로 동일 인물의 손에 의해 동시에 2장을 트레이스한 것으로 생각된다. 트레이스는 有光敎一가 아닌 梅原末治에 의한 것이다.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만 트레이스한 날짜 ‘昭和17년(1942년) 10월 1일’이 기재되어 있다. 梅原末治는 다음 날인 10월 2일에 무문토기 2점의 도면(「梅原考古資料」 5195, 5196)을 작성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평양박물관에서 행해졌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에 대한 축척과 척도는 藤井和夫가 부가했다.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는 「梅原考古資料」의 정리 당시에 그와 똑같은 사진이나 동일한 유구, 유물을 촬영한 사진, 동일한 유구, 유물의 실측도, 트레이스도에 「梅原考古資料」와 동일한 정리번호를 기재해 둔 것이 있다. 따라서 有光敎一의 소장자료에 「梅原考古資料」와 동일번호가 적혀 있어도 반드시 동일한 사진이나 실측도가 아닐 경우도 있으므로 有光敎一의 소장자료를 반드시 「梅原考古資料」의 副本(부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아리미쓰에 의하면 이러한 실측도는 유물을 평양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서 작성했다고 한다. 실측일은 1943년 4월 14일이다. 또한 中村春壽의 실측도 중에는 小野山節가 1/2로 축소한 도면이 들어 있으나 정확히 언제 작성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바로가기
  • 각주 005)
    다음의 梅原末治가 작성한 도면은 「梅原考古資料」 5195, 5196의 무문토기 2점과 다른 것으로 전술한 中村春壽가 실측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도면 중의 토기 관찰에 관한 기재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만 梅原末治의 작성도에 대해서는 「梅原考古資料」5195, 5196에 의한다.
    (中村春壽 실측도 ❶(圖 6 ❶)
    ‘현재 이 토기는 작은 파편이지만 대략 절반 정도가 남아 있다. 붉은 흑차갈색. 장석(長石)의 입자, 활석(滑石)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일부분에 광택이 나는 면이 있다. 거의 전면적으로 마멸되었다. 기형은 부정형으로 요철이 심하다. 점토띠를 쌓아 만든 식. 구멍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
    ‘(구연부)V절 단면은 ▼이고 상부는 수직압흔으로 생각된다.’
    ‘(말아 접은 구연부분)그 부분에 접합부분이 명료.’
    ‘(저부)마멸.’
    (中村春壽 실측도 ❷(圖 6 ❷)
    ‘기형의 반이 결실된 작은 파편이다. 붉은 차갈색. 장석(長石)의 입자와 활석(滑石)이 많고 일부에는 광택면이 있다. 매우 마멸이 심하고 돌입자의 존재가 현저하다. 구연부는 수평이지 않고 크게 파상형을 이룬다. 표면부분에는 油燃狀 유기질이 부착된 곳이 많다. 점토띠를 쌓아 만든 식.’
    ‘(구연부)상부에는 복(箙)압흔이 있다. 단면은 ▼로 되어 있다.’
    ‘구멍은 2개씩 대칭적으로 있던 것 같다. 여기에는 한쪽만 있다.’
    ‘(말아 접은 구연부분)이 부분에서 접합한 것인가?’
    ‘(저부)이 부분에 특히 마멸이 심하다.’
    (梅原末治 작성도 ❶(圖 9 ❶)
    ‘자갈이 많다. 두껍고 조질임. 적갈색을 띤다. 형태는 휘어 있다.’
    (梅原末治 작성도 ❷(圖 9 ❷)
    ‘붉은 색의 두꺼운 태토에 사립을 포함함. 조질로 만들었다.’
    ‘절반은 파편이다.’
    ‘(동상부(胴上部))보수. 이 부분 휘어짐.’
    ‘접합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매우 휘어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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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의 해제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