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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서론

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으로 진파리 벽화고분의 발굴조사에 참가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와 필자는, 최근 10년간 일제강점기에 아리미쓰 교이치가 한반도에서 발굴조사를 하고도 미보고로 남아 있던 고분의 보고서 간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有光敎一·藤井和夫, 2000, 2002, 2003). 벽화고분인 진파리 제1호분과 동 제4호분주 001
각주 001)
김일성종합대학의 재발굴 조사보고서(김일성종합대학, 1976, 77쪽)에서는 새로운 고분번호가 매겨져 있으나 이 글에서는 조사 당시의 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圖 2와 같다. 필자 등은 이전에 小泉顯夫의 진파리 고분군 분포도(小泉顯夫, 1986, 354쪽)에 있는 고분번호를 사용해 圖 2와 동일한 형태의 분포도를 작성한 적이 있다(有光敎一 藤井和夫 朱洪奎編, 2008, 圖 2). 小泉顯夫가 분포도에 붙인 고분의 번호는 부자연스럽다. 또한 본문에서 제1호분, 제4호분 이외에 이미 발굴한 고분을 ‘제2호분, 제6호분, 제9호분’으로 기술하고 제7호분 출토로 되어 있는 금동투조금구(金銅製透彫金具)를 ‘제6호분’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고분번호를 인용했다. 그러나 小泉顯夫의 분포도에 있는 고분번호가 틀린 것이 확인되므로 이 글의 圖 2와 같이 ‘제2호분’은 ‘제3호분’, ‘제3호분’은 ‘제2호분’, ‘제6호분’은 ‘제7호분’, ‘제7호분’은 ‘제6호분’으로 정정한다.
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재발굴 조사보고서에서는 새로 번호를 붙이고 新舊 번호를 대비하고 있으나, 구 번호인 ‘제7호분’을 새 번호인 ‘제4호분’으로 해야 하나 ‘제2호분’으로 되어 있고, 구 번호인 ‘제9호분’을 새 번호인 ‘제4호분’으로 해야 할 것을 ‘제6호분’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김일성종합대학, 1976,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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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경성고고담화회(京城考古談話會)좌담회의 기록을 번각[飜刻]해 출간(有光敎一·藤井和夫·朱洪奎編, 2008)한 후, 아리미쓰 교이치가 소장하고 있던 일제강점기의 조사자료를 정리하면서 아리미쓰 교이치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원고용지에 기고한 진파리 벽화고분의 발굴조사에 관한 원고와 사진 및 미발표한 분구 실측도, 석실 실측도, 메모 등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또한 거기에는 1941년 가을에 진파리 고분군의 발굴조사를 하면서 실시했던 전 동명왕릉주변의 정비작업에 의해 발견된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실측도와 출토유물의 실측도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미발표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942년 11월 25~29일까지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전의 등사판 인쇄 팸플릿인 『낙랑고분발굴품급 고구려 고분벽화모사 특별전관안내』도 소장되어 있었다.
아리미쓰를 제외한 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관계자가 모두 타계해 이에 관한 정밀한 조사보고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이다. 불충분하지만 앞의 자료들 이외에 이 조사에 관한 당시의 자료를 일본에서 얻는다는 것은 거의 바랄 수 없게 되고 말았다.주 002
각주 002)
일본 내에서 확인된 자료로서는 덴리대학도서관 소장 『小場恆吉氏資料目錄』 중에 「中和眞坡里墳墓壁畫模寫及調査記錄」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한국국립박물관으로 인수된 방대한 문서류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고 다른 기관에도 남아 있으므로 차후에 관련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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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의 조사자료에는 사와 슌이치[澤俊一]가 촬영한 유리건판과 같이 한국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 것도 있다(국립중앙박물관, 1998). 게다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이나 조선중앙역사박물관, 그 이외의 기관에 남아 있어도 미정리이거나 미공개된 자료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원래는 이러한 관계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기관들을 전부 섭렵해서 아리미쓰의 소장 자료를 함께 모아 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기에 이른 것은 조사관계자로서 2010년 11월로 만 103세를 맞이한 아리미쓰가 유일한 존명하는 사람이 되어 버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만이라도 빨리 소개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필자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연구자가 한반도에서 행한 발굴조사 중에는 아직 보고가 되지 않은 것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에 소재하는 조사관계 자료는 매우 한정되어 있어 조사를 담당한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아리미쓰가 담당하거나 혹은 관계한 발굴조사 중 미보고였던 6기의 고분에 대해서는 『조선고적연구회유고』 I, Ⅱ, Ⅲ(有光敎一, 藤井和夫, 2000, 2002, 2003)으로 보고했으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진파리 고분만이 미보고인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발굴 담당자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불행이 있었다고는 해도, 보고가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고적계 주임겸 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으로서 조사 실무를 총괄하고 있던 아리미쓰로서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발굴조사 보고로서는 자료적인 제약이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 소개하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배경도 있으므로 이 점에 관해서는 독자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각주 001)
    김일성종합대학의 재발굴 조사보고서(김일성종합대학, 1976, 77쪽)에서는 새로운 고분번호가 매겨져 있으나 이 글에서는 조사 당시의 번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圖 2와 같다. 필자 등은 이전에 小泉顯夫의 진파리 고분군 분포도(小泉顯夫, 1986, 354쪽)에 있는 고분번호를 사용해 圖 2와 동일한 형태의 분포도를 작성한 적이 있다(有光敎一 藤井和夫 朱洪奎編, 2008, 圖 2). 小泉顯夫가 분포도에 붙인 고분의 번호는 부자연스럽다. 또한 본문에서 제1호분, 제4호분 이외에 이미 발굴한 고분을 ‘제2호분, 제6호분, 제9호분’으로 기술하고 제7호분 출토로 되어 있는 금동투조금구(金銅製透彫金具)를 ‘제6호분’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고분번호를 인용했다. 그러나 小泉顯夫의 분포도에 있는 고분번호가 틀린 것이 확인되므로 이 글의 圖 2와 같이 ‘제2호분’은 ‘제3호분’, ‘제3호분’은 ‘제2호분’, ‘제6호분’은 ‘제7호분’, ‘제7호분’은 ‘제6호분’으로 정정한다.
    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재발굴 조사보고서에서는 새로 번호를 붙이고 新舊 번호를 대비하고 있으나, 구 번호인 ‘제7호분’을 새 번호인 ‘제4호분’으로 해야 하나 ‘제2호분’으로 되어 있고, 구 번호인 ‘제9호분’을 새 번호인 ‘제4호분’으로 해야 할 것을 ‘제6호분’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김일성종합대학, 1976, 77쪽). 바로가기
  • 각주 002)
    일본 내에서 확인된 자료로서는 덴리대학도서관 소장 『小場恆吉氏資料目錄』 중에 「中和眞坡里墳墓壁畫模寫及調査記錄」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한국국립박물관으로 인수된 방대한 문서류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고 다른 기관에도 남아 있으므로 차후에 관련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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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자료번호 : ku.d_0003_007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