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기와
교토대학 종합박물관 소장 야마다[山田] 기증 기와 가운데 평기와는 총 53점으로, 동일한 문양이 거의 중복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집 당시 지표에 흩어져 있는 평기와를 문양별로 수습하였거나 선별 소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6년 유입 당시에는 53점 모두 고구려 기와로 인식되었던 듯하며 『고구려시대의 유적』(關野外, 1929, 62~71)에도 동일한 문양의 평기와가 고구려 기와로 소개되어 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고려해 볼 때 유물의 해당시기에 대하여 재검토가 필요한 개체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소산이 아니라 하여도, 현재로서는 북한 지역에서 제작, 사용된 삼국시대 이후의 평기와 역시 명확히 알 수 없는 점을 감안하여, 이번 보고에서는 기증유물 전부를 검토, 도면화하여 게재하기로 하였다.
고구려 평기와 연구는 자료 확보의 한계로 말미암아 고고학적인 변화상을 도출해 내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들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대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양상이 확인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도 일원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 또한 집안과 평양을 중심으로 제작, 사용된 기와와 비교하여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야마다 기증 기와에 포함된 평기와 역시 고구려 기와로 볼 수 있는 개체는 소량에 불가할 뿐 아니라 잔존상태도 소편(小片)이 대부분이므로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하여 고구려 기와와 그 이후 시기의 기와로 구분하되, 고구려 기와를 중심으로 관찰 가능한 일부 속성을 통해 제작기법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 평기와 연구는 자료 확보의 한계로 말미암아 고고학적인 변화상을 도출해 내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들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곳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대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양상이 확인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도 일원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 또한 집안과 평양을 중심으로 제작, 사용된 기와와 비교하여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야마다 기증 기와에 포함된 평기와 역시 고구려 기와로 볼 수 있는 개체는 소량에 불가할 뿐 아니라 잔존상태도 소편(小片)이 대부분이므로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기존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하여 고구려 기와와 그 이후 시기의 기와로 구분하되, 고구려 기와를 중심으로 관찰 가능한 일부 속성을 통해 제작기법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구려 평기와
평기와 가운데 고구려 기와로 보이는 것은 229~246의 18점으로, 수키와 1점, 암키와 17점이 확인된다. 기와의 색조는 적색계·적갈색계·황색계로, 함께 수집된 평양기(平壤期) 고구려 수막새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암키와의 경우, 와도분할면이 외면주 001측에 남는 특징으로부터 이외의 평기와와 크게 구분된다. 외면 타날문양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하 상세한 屬性에 대해서는 관찰표를 참조).
229는 외면에 명문(銘文)이 찍힌 수키와로, 인각(印刻)은 지름 약 2.5cm 크기의 원형(圓形)으로 추정되며, 한 글자를 공간 내에 가득 차게 양각한 모습이다(삽도 2-1). 같은 양상의 명문 수키와가 『고구려시대의 유적』자료(게재번호 397번),주 002이우치[井內]자료(1976-272번)(삽도 2-2),주 003도쿄박물관 소장 자료(동북아역사재단-도쿄박물관 자료 39번) (삽도 2-3)주 004
230은 종방향의 평행선문과 사선방향의 선문이 복합된 타날문양의 암키와이다. 외면 타날문만으로는 지금까지 고구려 기와로 보고된 예와 비교하여 다소 생소한 모티프이나, 측면 분할방향(외면측의 분할면)과 외면에 태토와는 다른 사립이 부착된 점 등을 감안하여 고구려 기와로 분류되었다. 표면은 회갈색이나 단면은 적색의 색조를 보인다.
231·232는 동일한 타날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의 모티프를 마치 사격자문과 같이 연결한 문양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231은 외면 측의 분할면이 남아 있다.
233·235는 석문(席紋, 섶문·자리문)으로, 이 문양의 기와는 집안(集安)지역에서는 환도산성·국내성·산성자산성, 평양지역에서는 평양성·대성산성 등지에서 수습되었다.주 007한편 234는 초화문(草花紋)으로 추정되는 좀 더 장식적인 모티프를 석문과 상·하로 배치한 경우이다. 이러한 예는 평양에서 수습된 기와 가운데 여러 점이 보고된 바 있는데,주 008명문 등을 석문 가운데에 배치하여 타날 후 기와 외면에 마치 별도의 문양대를 이루는 것처럼 표현한 방식도 확인된다. 따라서 소편(小片)으로 남은 233·235의 경우 역시 복합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세 점 모두 외측면의 분할면이 확인된다.
236은 마름모꼴의 모티프를 여러 개 겹쳐 반복적으로 배치한 능형문(菱形紋)으로, 내부에 화문(花紋)과 유사한 장식적 모티프를 첨가하였다. 능형문은 장매리,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정릉사지(定陵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비롯한 평양지역에서 주로 수습되고 있으며,주 009지금까지 집안지역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고된 평기와 가운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외측면의 분할면이 남아 있으며, 측면 가까이에서 확인되는 종방향의 홈은 분할계점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237~246 기와의 타날문양은 다소 특징적인 모티프를 보이는 예로 선문, 격자문, 승문을 외면 타날구의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였던 백제·신라와 비교해 볼 때 고대 삼국의 양상 가운데 단연 차별되는 요소이다. 이러한 문양은 고구려 기와 가운데에서도 특히 평양지역의 기와를 중심으로 확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다 기증 고구려 기와에서는 앞서 살펴본 선문, 격자문, 석문, 능형문 외에 다소 추상적·장식적인 모티프를 사용한 8가지 문양이 확인되고 있으나, 대체로 소편의 상태로 잔존하고 있어 단위문양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가운데 몇몇 문양은 다른 수집품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243은 동일한 타날 문양의 암·수키와 완형(完形)이 보고된 바 있어 [『高句麗時代之遺蹟』게재번호 39(암키와)주 010·고려대학교박물관도록 325쪽의 하단(암키와)주 011·국립중앙박물관 소장번호 本館8471(암키와)주 012·井內자료 282(수키와)주 013], 타날구 전체의 문양, 즉 단위문양의 확인이 가능하다. 단위문양의 크기는 폭 8cm, 길이 35cm 이상으로, 타날구 길이에 따른 분류주 014상 전형적인 장판(長板)에 해당된다. 기와 외면의 상·하부에만 확인되는 사격자문은 주문양과 겹치는 상태 등을 고려해 볼 때 별도의 타날구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타날구 경계부의 확인을 통해 상·하부에 격자문을 우선적으로 타날한 후 주된 문양을 타날한 것으로 생각된다.주 015이외에도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고된 평기와 가운데에는 장판의 타날구로 시문된 완형의 개체가 여러 점 확인된다.주 016일반적으로 남한 내에서 장판의 타날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를 즈음하는 시기로 보고 있으며, 원통형 와통(圓筒形瓦桶)의 확산과 더불어 기와 제작기술이 전국적으로 정형화되는 근거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주 017다만 아직까지 장판 타날구라는 새로운 형태의 타날도구가 등장하는 시·공간적 배경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주 018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현재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장판 타날구 사용의 시작을 고구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후 고구려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기술계통의 영향에 따라 오히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와 제작기법에 대한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명확한 해결을 위해서는 고구려 기와 제작의 전개 과정에서 장판 타날구의 사용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한 타날구의 차이가 조와집단의 차이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같은 지역에서 제작, 사용된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양상에 대한 부분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장판 타날구 사용 기와를 포함하여 외면 타날문에서 다양한 모티프가 확인되는 평기와가 대체로 적색과 황색의 색조를 띠고 있으며, 태토와 소성 상태에서도 다양한 문양을 보이는 연화복합문과 기타 연화문 수막새와 유사한 예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현재까지 제시된 와당의 편년안을 고려해 본다면 고구려 평양기의 기와 가운데에서도 다소 늦은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이다.
고구려 기와의 기본적인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수키와는 원통형와통(圓筒形瓦桶), 암키와는 통쪽 와통(瓦桶)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특히 암키와의 경우 기와의 내면에 남는 통쪽의 흔적이 백제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여 비교적 좁고, 요철의 볼륨이 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주 019그러나 243과 동일한 타날문양을 보이는 완형 기와의 경우, 통쪽 각각의 폭이 약 6~8cm로 암키와 한 매당 통쪽 4~5개 정도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주 020이렇듯 와통을 이루는 통쪽의 폭이 넓다면 그 경계부가 포함되지 않은 부분이 파편으로 남아 있을 경우, 원통와통의 구조로 오해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야마다 기증 평기와에서도 통쪽흔이 확인되는 예는 몇 점에 불과하다. 고구려 암키와의 와통 형식에 한층 다양한 양상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자료라 생각된다.
또한 막새와 마찬가지로 암키와 가운데에도 태토(胎土)와는 다른 모래가 외면을 중심으로 부착되어 있는 개체가 다수 확인된다. 이는 모래의 부착 정도 등에 차이가 있으나, 함께 수습된 막새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유사한 성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와가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래를 부착하는 이유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우나, 다음의 몇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제작과정에서 점토를 다루는 와공이 손이나 도구 등에 점토가 붙지 않도록 공방 내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모래를 사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기와에도 묻어나게 되었을 가능성, 둘째, 와통에서 성형이 이루어진 후 건조과정에서, 혹은 요(窯) 내에 기와 적재시, 각각의 기와가 서로 붙어 파손되거나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셋째, 이미 다니 도요노부[谷豊信]가 언급한 바와 같이, 대(臺) 위에 기와를 얹기 이전에 점토가 달라붙지 않도록 사용하였을 가능성이다.주 021와통에서 성형한 뒤 분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기와를 다시 어떠한 대 위에 얹는다는 것은 민속례를 기초로 하여 추정되어 온 기존의 제작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이때 평기와를 성형·분할한 후 2차 조정(調整)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정대(調整臺)에 기와를 얹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주 022조정대의 명확한 형태와 사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남한의 홍련봉 1보루(紅蓮峰1堡壘)에서 출토된 승문(繩紋) 기와의 경우, 모래가 부착되지 않은 기와에 비하여 외면에 모래가 부착된 암키와는 상·하·측면을 직각에 가깝게 베어내는 등 2차 조정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목된다. 주 023이 또한 앞으로 자료의 증가와 더불어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한편 239·241 기와의 내면에는 포흔과 함께 횡방향 승문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된다.주 024이러한 예는 장매리를 포함한 평양지역주 025과 경기도에 소재한 고구려 관련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 당포성(堂浦城), 무등리1보루(無等里1堡壘), 아미성(阿未城)에서 출토된 고구려 평기와주 026에서 확인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형 후 원통형의 방망이에 노끈을 감아 기와의 내면을 두드려 정면한 흔적이라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주 027239·241의 경우, 승문으로 단정할 만한 꼬임이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며 추정 숭문의 요철 위로 포흔이 뚜렷이 지나감을 알 수 있다.
233·234·236에서는 측면 모서리 가까이에서 분할계점으로 의심해 볼 만한 흔적이 관찰된다. 앞서 241과 동일한 타날문양의 완형 암키와에서도 상·하로 양 측면에 분할 계점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고구려 기와로 분류한 평기와의 내면에는 다양한 압흔이 관찰되나, 제작기술적 의미를 읽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229는 외면에 명문(銘文)이 찍힌 수키와로, 인각(印刻)은 지름 약 2.5cm 크기의 원형(圓形)으로 추정되며, 한 글자를 공간 내에 가득 차게 양각한 모습이다(삽도 2-1). 같은 양상의 명문 수키와가 『고구려시대의 유적』자료(게재번호 397번),주 002이우치[井內]자료(1976-272번)(삽도 2-2),주 003도쿄박물관 소장 자료(동북아역사재단-도쿄박물관 자료 39번) (삽도 2-3)주 004
각주 004)
에서도 확인되는데, 야마다 기증품을 제외한 나머지 사례는 평양 토성리(土城里)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단언할 수는 없으나 이상의 세 경우는 같은 글자일 가능성이 크며, ‘樂(낙)’으로 판독되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다만 글자의 형태, 인각의 범위 내에 글자가 위치한 상태 등으로 볼 때, 각각 다른 범(范)을 사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면의 타날문양은 보이지 않으나 표면이 고르지 않고 요철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타날 후 조정(調整)작업을 통해 문양을 지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명문의 내용은 다르나 같은 형태의 인각이 평기와의 내·외면에 찍힌 예가 장매리(長梅里)·청암리(淸岩里) 사지(寺址)에서 확인된 바 있다.주 005동북아역사재단, 2008,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關東地域 소재 고구려 유물 1』, 301쪽. 이 유물은 이미 田村晃一과 谷豊信이 보고한 바 있다.
田村는 해당 명문와가 樂浪東寺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谷는 해당 유물이 台帳에는 樂浪郡시대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연구성과에 비추어 고구려 시대의 것임을 설명하였다. 田村晃一, 1983, 「高句麗の寺院址に關する若干の考察」, 『佐久間重男敎授退休記念中國史ㆍ陶磁史論集』, 579~603쪽 ; 谷豊信, 2005, 「平壤遷都前後の高句麗瓦に關する覺書-東京國立博物館收藏資料の紹介」, 『MUSEUM』, 東京國立博物館, 13~16쪽.
田村는 해당 명문와가 樂浪東寺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谷는 해당 유물이 台帳에는 樂浪郡시대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연구성과에 비추어 고구려 시대의 것임을 설명하였다. 田村晃一, 1983, 「高句麗の寺院址に關する若干の考察」, 『佐久間重男敎授退休記念中國史ㆍ陶磁史論集』, 579~603쪽 ; 谷豊信, 2005, 「平壤遷都前後の高句麗瓦に關する覺書-東京國立博物館收藏資料の紹介」, 『MUSEUM』, 東京國立博物館, 13~16쪽.
각주 005)
외면의 타날문양을 그대로 남긴 상태에서 찍거나 내면에 찍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예와는 차이를 보인다.주 006지금까지 이러한 원형의 인각은 주로 백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고구려 기와에서도 같은 형태의 인각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자료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인각이 어떠한 의도로, 얼마나 널리 제작·사용되었는지에 대하여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高句麗時代之遺蹟』 자료 388(長梅里 수습)의 경우, 명문을 명확히 읽어내기는 어려우나 사격자문 위에 원형이 인각이 찍혀 있다. 한편 398은 淸岩里寺址에서 수습된 小片으로, 내면의 포목흔 위에 ‘東’자의 원형 인각이 확인된다. 井內 자료에도 淸岩里寺址 수습유물 가운데 내면에 ‘東’자의 인각을 찍은 명문와(275)가 보고되어 있으나, 앞의 예와 동일한 范은 아니다. 井內자료 275는 수습지는 알 수 없으나, ‘金’ 자의 인각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淸岩里廢寺址 보고서에는 사격자문과 승문의 타날 위에 원형의 인각이 찍힌 평기와가 보고되어 있으나, 사진상으로 명문을 판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關野貞外, 1929, 70쪽 ;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槪報)」, 『昭和十三年度古跡調査報告』, 朝鮮古跡硏究會, 18쪽; 井內古文化硏究室, 1976, PL. 73쪽.
230은 종방향의 평행선문과 사선방향의 선문이 복합된 타날문양의 암키와이다. 외면 타날문만으로는 지금까지 고구려 기와로 보고된 예와 비교하여 다소 생소한 모티프이나, 측면 분할방향(외면측의 분할면)과 외면에 태토와는 다른 사립이 부착된 점 등을 감안하여 고구려 기와로 분류되었다. 표면은 회갈색이나 단면은 적색의 색조를 보인다.
231·232는 동일한 타날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의 모티프를 마치 사격자문과 같이 연결한 문양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231은 외면 측의 분할면이 남아 있다.
233·235는 석문(席紋, 섶문·자리문)으로, 이 문양의 기와는 집안(集安)지역에서는 환도산성·국내성·산성자산성, 평양지역에서는 평양성·대성산성 등지에서 수습되었다.주 007한편 234는 초화문(草花紋)으로 추정되는 좀 더 장식적인 모티프를 석문과 상·하로 배치한 경우이다. 이러한 예는 평양에서 수습된 기와 가운데 여러 점이 보고된 바 있는데,주 008명문 등을 석문 가운데에 배치하여 타날 후 기와 외면에 마치 별도의 문양대를 이루는 것처럼 표현한 방식도 확인된다. 따라서 소편(小片)으로 남은 233·235의 경우 역시 복합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세 점 모두 외측면의 분할면이 확인된다.
236은 마름모꼴의 모티프를 여러 개 겹쳐 반복적으로 배치한 능형문(菱形紋)으로, 내부에 화문(花紋)과 유사한 장식적 모티프를 첨가하였다. 능형문은 장매리,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정릉사지(定陵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비롯한 평양지역에서 주로 수습되고 있으며,주 009지금까지 집안지역에서 수습된 것으로 보고된 평기와 가운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외측면의 분할면이 남아 있으며, 측면 가까이에서 확인되는 종방향의 홈은 분할계점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237~246 기와의 타날문양은 다소 특징적인 모티프를 보이는 예로 선문, 격자문, 승문을 외면 타날구의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였던 백제·신라와 비교해 볼 때 고대 삼국의 양상 가운데 단연 차별되는 요소이다. 이러한 문양은 고구려 기와 가운데에서도 특히 평양지역의 기와를 중심으로 확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마다 기증 고구려 기와에서는 앞서 살펴본 선문, 격자문, 석문, 능형문 외에 다소 추상적·장식적인 모티프를 사용한 8가지 문양이 확인되고 있으나, 대체로 소편의 상태로 잔존하고 있어 단위문양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가운데 몇몇 문양은 다른 수집품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243은 동일한 타날 문양의 암·수키와 완형(完形)이 보고된 바 있어 [『高句麗時代之遺蹟』게재번호 39(암키와)주 010·고려대학교박물관도록 325쪽의 하단(암키와)주 011·국립중앙박물관 소장번호 本館8471(암키와)주 012·井內자료 282(수키와)주 013], 타날구 전체의 문양, 즉 단위문양의 확인이 가능하다. 단위문양의 크기는 폭 8cm, 길이 35cm 이상으로, 타날구 길이에 따른 분류주 014상 전형적인 장판(長板)에 해당된다. 기와 외면의 상·하부에만 확인되는 사격자문은 주문양과 겹치는 상태 등을 고려해 볼 때 별도의 타날구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타날구 경계부의 확인을 통해 상·하부에 격자문을 우선적으로 타날한 후 주된 문양을 타날한 것으로 생각된다.주 015이외에도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고된 평기와 가운데에는 장판의 타날구로 시문된 완형의 개체가 여러 점 확인된다.주 016일반적으로 남한 내에서 장판의 타날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를 즈음하는 시기로 보고 있으며, 원통형 와통(圓筒形瓦桶)의 확산과 더불어 기와 제작기술이 전국적으로 정형화되는 근거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주 017다만 아직까지 장판 타날구라는 새로운 형태의 타날도구가 등장하는 시·공간적 배경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주 018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현재로서는 한반도 내에서 장판 타날구 사용의 시작을 고구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후 고구려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기술계통의 영향에 따라 오히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와 제작기법에 대한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명확한 해결을 위해서는 고구려 기와 제작의 전개 과정에서 장판 타날구의 사용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한 타날구의 차이가 조와집단의 차이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같은 지역에서 제작, 사용된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양상에 대한 부분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장판 타날구 사용 기와를 포함하여 외면 타날문에서 다양한 모티프가 확인되는 평기와가 대체로 적색과 황색의 색조를 띠고 있으며, 태토와 소성 상태에서도 다양한 문양을 보이는 연화복합문과 기타 연화문 수막새와 유사한 예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현재까지 제시된 와당의 편년안을 고려해 본다면 고구려 평양기의 기와 가운데에서도 다소 늦은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이다.
고구려 기와의 기본적인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수키와는 원통형와통(圓筒形瓦桶), 암키와는 통쪽 와통(瓦桶)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특히 암키와의 경우 기와의 내면에 남는 통쪽의 흔적이 백제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여 비교적 좁고, 요철의 볼륨이 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주 019그러나 243과 동일한 타날문양을 보이는 완형 기와의 경우, 통쪽 각각의 폭이 약 6~8cm로 암키와 한 매당 통쪽 4~5개 정도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주 020이렇듯 와통을 이루는 통쪽의 폭이 넓다면 그 경계부가 포함되지 않은 부분이 파편으로 남아 있을 경우, 원통와통의 구조로 오해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야마다 기증 평기와에서도 통쪽흔이 확인되는 예는 몇 점에 불과하다. 고구려 암키와의 와통 형식에 한층 다양한 양상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자료라 생각된다.
또한 막새와 마찬가지로 암키와 가운데에도 태토(胎土)와는 다른 모래가 외면을 중심으로 부착되어 있는 개체가 다수 확인된다. 이는 모래의 부착 정도 등에 차이가 있으나, 함께 수습된 막새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유사한 성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와가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래를 부착하는 이유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우나, 다음의 몇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제작과정에서 점토를 다루는 와공이 손이나 도구 등에 점토가 붙지 않도록 공방 내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모래를 사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기와에도 묻어나게 되었을 가능성, 둘째, 와통에서 성형이 이루어진 후 건조과정에서, 혹은 요(窯) 내에 기와 적재시, 각각의 기와가 서로 붙어 파손되거나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셋째, 이미 다니 도요노부[谷豊信]가 언급한 바와 같이, 대(臺) 위에 기와를 얹기 이전에 점토가 달라붙지 않도록 사용하였을 가능성이다.주 021와통에서 성형한 뒤 분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기와를 다시 어떠한 대 위에 얹는다는 것은 민속례를 기초로 하여 추정되어 온 기존의 제작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이때 평기와를 성형·분할한 후 2차 조정(調整)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정대(調整臺)에 기와를 얹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주 022조정대의 명확한 형태와 사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남한의 홍련봉 1보루(紅蓮峰1堡壘)에서 출토된 승문(繩紋) 기와의 경우, 모래가 부착되지 않은 기와에 비하여 외면에 모래가 부착된 암키와는 상·하·측면을 직각에 가깝게 베어내는 등 2차 조정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목된다. 주 023이 또한 앞으로 자료의 증가와 더불어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한편 239·241 기와의 내면에는 포흔과 함께 횡방향 승문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된다.주 024이러한 예는 장매리를 포함한 평양지역주 025과 경기도에 소재한 고구려 관련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 당포성(堂浦城), 무등리1보루(無等里1堡壘), 아미성(阿未城)에서 출토된 고구려 평기와주 026에서 확인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형 후 원통형의 방망이에 노끈을 감아 기와의 내면을 두드려 정면한 흔적이라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주 027239·241의 경우, 승문으로 단정할 만한 꼬임이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며 추정 숭문의 요철 위로 포흔이 뚜렷이 지나감을 알 수 있다.
233·234·236에서는 측면 모서리 가까이에서 분할계점으로 의심해 볼 만한 흔적이 관찰된다. 앞서 241과 동일한 타날문양의 완형 암키와에서도 상·하로 양 측면에 분할 계점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고구려 기와로 분류한 평기와의 내면에는 다양한 압흔이 관찰되나, 제작기술적 의미를 읽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이후 시기의 평기와
247~281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평기와로 여겨진다. 수키와 2점, 암키와 33점으로, 고구려 평기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 247~250의 기와는 외면 타날구 내에 ‘官(관)’자를 새겨넣은 명문기와로, 그 단위문양은 명문을 사(斜)방향의 평행선문 가운데 배치한 것(247·249·250)과 V자의 집선문 가운데 배치한 것(248)으로 구분된다. 동일한 명문와가 토성리에서 수습된 고구려 기와와 함께 제시된 예가 있기 때문에,주 028낙랑·고구려 시대 이후에도 평양 토성리 일대에 중앙(中央)과 관련된 관아(官衙) 시설이 연속적으로 소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256의 경우, 상단 쪽에 ‘大’자의 명문을 배치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이외에도 외면 타날문양에 따라 251~257은 격자문계, 258~269는 어골문계, 270~276은 집선문계, 277~279는 수파문계 타날문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문양 내에서도 해당 모티프만을 사용한 단일문과 원래의 모티프를 변형시킨 변형문, 또 다른 모티프와 함께 배치한 복합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280·281과 같은 독특한 문양도 확인된다.
색조는 대부분 회색계이며, 측면의 분할흔적은 관찰 가능한 경우에 한하여 모두 내면 쪽에 분할면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기와에서 사절흔(湛切痕)주 029이 관찰되며, 연철흔(連綴痕) 또는 윤철흔(輪綴痕)이 확인되는 개체도 포함되어 있다. 분할표지로는 측면과 맞닿은 내면측 모서리를 중심으로 분할계선의 형식만이 확인된다. 266은 내면 하단부를 경사지게 조정하였다. 이렇듯 고구려 이후 시기의 평기와로 구분한 총 35점의 기와는 관찰 가능한 제작기술적 속성에서 앞서 살펴본 고구려 기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평양지역의 기와에 대해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전 시대에 대한 양상이 불분명한 상황이다. 앞으로 자료 증가와 더불어 폭넓은 관심을 통해 각 시기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변화상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고구려 평기와 연구에서도 그 시·공간적인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중, 247~250의 기와는 외면 타날구 내에 ‘官(관)’자를 새겨넣은 명문기와로, 그 단위문양은 명문을 사(斜)방향의 평행선문 가운데 배치한 것(247·249·250)과 V자의 집선문 가운데 배치한 것(248)으로 구분된다. 동일한 명문와가 토성리에서 수습된 고구려 기와와 함께 제시된 예가 있기 때문에,주 028낙랑·고구려 시대 이후에도 평양 토성리 일대에 중앙(中央)과 관련된 관아(官衙) 시설이 연속적으로 소재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256의 경우, 상단 쪽에 ‘大’자의 명문을 배치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이외에도 외면 타날문양에 따라 251~257은 격자문계, 258~269는 어골문계, 270~276은 집선문계, 277~279는 수파문계 타날문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문양 내에서도 해당 모티프만을 사용한 단일문과 원래의 모티프를 변형시킨 변형문, 또 다른 모티프와 함께 배치한 복합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외에도 280·281과 같은 독특한 문양도 확인된다.
색조는 대부분 회색계이며, 측면의 분할흔적은 관찰 가능한 경우에 한하여 모두 내면 쪽에 분할면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기와에서 사절흔(湛切痕)주 029이 관찰되며, 연철흔(連綴痕) 또는 윤철흔(輪綴痕)이 확인되는 개체도 포함되어 있다. 분할표지로는 측면과 맞닿은 내면측 모서리를 중심으로 분할계선의 형식만이 확인된다. 266은 내면 하단부를 경사지게 조정하였다. 이렇듯 고구려 이후 시기의 평기와로 구분한 총 35점의 기와는 관찰 가능한 제작기술적 속성에서 앞서 살펴본 고구려 기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평양지역의 기와에 대해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전 시대에 대한 양상이 불분명한 상황이다. 앞으로 자료 증가와 더불어 폭넓은 관심을 통해 각 시기 평기와의 제작기술적 변화상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고구려 평기와 연구에서도 그 시·공간적인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동북아역사재단, 2008,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關東地域 소재 고구려 유물 1』, 301쪽. 이 유물은 이미 田村晃一과 谷豊信이 보고한 바 있다.
田村는 해당 명문와가 樂浪東寺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谷는 해당 유물이 台帳에는 樂浪郡시대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연구성과에 비추어 고구려 시대의 것임을 설명하였다. 田村晃一, 1983, 「高句麗の寺院址に關する若干の考察」, 『佐久間重男敎授退休記念中國史ㆍ陶磁史論集』, 579~603쪽 ; 谷豊信, 2005, 「平壤遷都前後の高句麗瓦に關する覺書-東京國立博物館收藏資料の紹介」, 『MUSEUM』, 東京國立博物館, 13~16쪽. -
각주 005)
『高句麗時代之遺蹟』 자료 388(長梅里 수습)의 경우, 명문을 명확히 읽어내기는 어려우나 사격자문 위에 원형이 인각이 찍혀 있다. 한편 398은 淸岩里寺址에서 수습된 小片으로, 내면의 포목흔 위에 ‘東’자의 원형 인각이 확인된다. 井內 자료에도 淸岩里寺址 수습유물 가운데 내면에 ‘東’자의 인각을 찍은 명문와(275)가 보고되어 있으나, 앞의 예와 동일한 范은 아니다. 井內자료 275는 수습지는 알 수 없으나, ‘金’ 자의 인각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淸岩里廢寺址 보고서에는 사격자문과 승문의 타날 위에 원형의 인각이 찍힌 평기와가 보고되어 있으나, 사진상으로 명문을 판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關野貞外, 1929, 70쪽 ;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槪報)」, 『昭和十三年度古跡調査報告』, 朝鮮古跡硏究會, 18쪽; 井內古文化硏究室, 1976, PL. 73쪽.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