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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벽화고분의 조사 1916年·1917年

1915년 12월의 총독부박물관 개관과 함께, 1916년 4월에는 고적 조사가 지방국 제1과에서 총무국 총무과로 옮겨져 지방국 제1과의 사적 조사 사업(關野情, 谷井濟一, 栗山俊一)과 학무편집과의 사료 조사(鳥居龍藏, 今西龍)를 총무국 총무과로 이관시켜 박물관이 이 사업을 담당하였다. 1916년 7월 10일에 「고적(古蹟) 및 유물 보존 규칙(遺物保存規則)」이 시행되면서 이에 따라 고적 조사위원회, 박물관협회가 설치되어 1916년부터는 새롭게 시작된 고적 조사 5개년 계획이 세워졌다. 이 ‘규칙’에 의해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발굴 조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세키노도 구로사카 가쓰미(黑板勝美), 토리이 류조(鳥居龍藏),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상 일본측 위원), 오다 쇼고(小田省吾),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郎), 구로 쇼헤이(工藤壯平), 유맹 (劉猛), 유정수(柳正秀), 구희수(具羲秀), 이상조선 측 위원)와 함께 고적조사위원이 되어, 지금까지 세키노를 중심으로 했던 개인 조사에서 고적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 조사로 체제가 크게 변하였다.
최초의 조사에서 고분벽화의 매력에 매료된 오바 쓰네키치는 1916년 8월에는 도쿄미술학교를 퇴직하고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촉탁되었다. 그 해 7월에는 마사키(正木) 교장에게 조선 출장을 희망하였으나 인정되지 않아 세키노가 교장을 직접 만나 어렵게 허가를 얻었던 것이 그 배경에 있었을 것이다.
주 001
각주 001)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5, 『秋田魁新報』, 秋田魁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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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행해진 제1년도 조사에서 세키노 다다스는 야쓰이 세이이치, 구리야마 슌이치, 오바 쯔네키치, 노모리 겐(野守健),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 등과 함께 평양의 동쪽 대성산면의 고구려 고분 6기와 순천군의 고분 2기를 조사하여 대성선록의 2기(鎧馬塚, 湖南里 西神塚)와 평양의 북쪽 약 16리 반(2.5km)에 있는 순천군의 고분 1기(天王地神塚)의 벽화고분을 발견하였다.
주 002
각주 002)
「大正五年度古蹟調査槪要」,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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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개마총과 호남리 사신총의 발굴을 실시하여 실측도를 작성하였지만 벽화의 모사는 1917년으로 미루었다.
개마총(鎧馬塚)은 처음에는 노산리 1호분이라고 불렸는데 10월 28일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일기』에 의하면, 오바 쯔네키치가 담당하며 28일에 입구가 있다고 상정한 남쪽부터 파기 시작하였지만 입구가 나오지 않아 29일에는 동남으로 넓힌 결과 연도를 발견하고 그곳의 퇴적된 흙을 운반해 내고 현실 내부에서 벽화를 발견하였다.
30일에는 현실의 토사를 운반해 내면서 천장의 실측을 시작하였다. 31일에 오바는 토포리 제5호분의 분구 실측을 시도하고 개마총의 조사는 중지하였다.
즉시 개마총과 호남리 사신총의 발굴을 심사하여 실측도를 작성하지만 벽화 보존은 1917년으로 미루었다.
이 고분에 대해 『발굴일기』 처음에는 토포리 제5호분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나중에 그 위에 세로줄을 긋고 호남리 사신초이라고 정정하였다. 11월 1일부터 다시 개마총의 석실 실측을 시작해 5일에 끝냈고, 8일에는 야쓰이 세이이치가 벽화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호남리 사신총은 세키노와 야쓰이가 11월 1일부터 발굴을 시작했으나, 오바는 6일부터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4일에는 연도 입구를 발견해 토사를 옮기고 현실 내의 벽화를 발견하였다. 6일까지 토사를 옮기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9일부터 석실 내의 실측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이 날에 봉토의 외부에 있는 자갈돌을 발견하였다. 이 자갈돌은 분구의 끝부분에
1~2단의 바깥 호열석(護列石)이 돌아가는 그 바깥 주위에 놓여 있던 것으로 오바 쯔네키치가 작성한 실측도에 의하면 폭이 약 2.5m 정도이다. 이틀에 걸쳐 자갈돌을 조사한 후 실측을 실시하여 12일에 조사를 끝마쳤다.
주 003
각주 003)
關野貞 資料, 『長水院及溫井里附近ニ於ケル高句麗古墳發掘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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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발굴일기』의 전문을 소개한다(날짜와 고분 번호는 산술 숫자로 바꿨고 읽기 쉽게 논점을 새롭게 넣었다).

10월 28일

오전 8시경 평양 출발의 자동차로 장수원에 감. 오전 8시경에 도착. 이미 도착한 야쓰이 위원과 만나 숙소로 정한 면사무소에 도착함. 재빨리 준비해서 발굴할 고분의 조사를 실시함. 나중에 노산리 제1호분은 오바의 감독 하에 남쪽에서부터 발굴에 착수함. 인부 10명 .
토포리 제1호분은 오가와의 감독 하에 발굴에 착수함. 저녁 무렵에 연도의 상부를 발견함. 인부 9명.
內里 제2호분은 노모리의 감독 하에 발굴에 착수함. 저녁 무렵에 연도의 상부를 발견함. 인부 9명.

10월 29일

노산리 제1호분은 오바의 감독 하에 새로 동남쪽을 발굴해 넓혔더니 연도가 나타났음. 연도 안의 토사를 들어내어 벽화가 있는 것을 발견함. 인부 7명.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전날에 이어 발굴하고 실측을 했음. 인부 10명 .
내리 제2호분. 노모리의 감독 하에 전날에 이어 발굴함. 연도 내의 토사를 들어냄. 인부 4명.

10월 30일

노산리 제1호분. 오바의 감독 하에 현실 안의 흙을 들어내면서 천장의 상부 일부분을 실측함.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전날에 이어 연도 안의 흙을 들어냄. 연도 안에서 금동촉과 유약 발린 도기의 파편을 발견함.
내리 제2호분. 노모리의 감독 하에 인부 2명을 부려 연도 안의 흙을 들어냄.
토포리 제4호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오전에 외형희 실측을 해 나가면서, 새로 발굴을 실시해서 저녁 무렵에 연도를 발견함. 연도 안에서 鐵輪 2개를 발견함.

10월 31일

놀산리 제1호분. 쉼.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가 외부에 있는 초석의 조사와 실측을 실시함.
호남리 사신총. 오바가 인부 1명을 부려 외형의 실측을 실시함.
토포리 제6호분. 구리야마가 인부 1을 부려 외부의 실측을 실시함.

11월 1일

노산리 제1호분. 오바 실측. 인부 1명.
토포리 제1호분. 오전에 오가와의 감독 하에 밑면의 조사를 실시함. 토기 파편을 발견함. 인부 2명.
토포리 제4호분. 오전 중 오가와의 감독 하에 밑면의 조사 및 실측. 인부 2명.
호남리 사신총. 세키노, 야쓰이의 감독 하에 처음으로 발굴을 했으나 변화 없음. 인부 8명.
내리 제2호분. 오전 중 노모리가 실측. 인부 1명.
토포리 제6호분. 처음으로 발굴해 오전 중에 연도의 입구를 발견함. 오후부터 구리야마, 노모리가 감독함. 인부 7명.

11월 2일

노산리 제1호분. 인부 1명을 부려 실측을 실시함(小場).
토포리 제1호분. 인부 2명을 부려 실측을 실시함(小川).
호남리 사신총. 전날에 이어 발굴을 해 겨우 이맛돌(梶石)의 일부분을 발견함. 그로부터 이맛돌을 따라 동쪽으로 발굴함. 인부 8명.
토포리 제6호분. 전날에 이어 발굴함. 연도 안의 흙과 톨을 현실에 출입이 가능해지는 부분까지 들어냄. 오후 3시경에 경우 현실 안에 들어가 밑면의 조사를 행함. 발견품은 金具와 순금의 針金. 인부 5명.

11월 3일

쉼.

11월 4일

노산리 제1호분. 인부 1명을 부려 실측(小場).
토포리 제1호분. 인부 2명을 부려 실측(小川).
호남리 사신총. 노모리의 감독 하에 전날에 이어 발굴함. 전날까지는 이맛돌로 생각했으나 이맛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연도의 입구를 막은 돌로 생각함. 오후 3시경에 겨우 연도 안의 상부에서 2척 정도에까지 흙을 들어냄. 현실에 벽화가 있는 것을 발견함. 인부 6명.
토포리 제6호분. 현실의 일부를 측량. 인부 2명(野守).
세키노, 야쓰이 , 구리야마. 대성산의 고구려 성 유적을 조사함.

11월 5일

노산리 제1호분. 오바가 실측을 끝냄. 인부 1명.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가 실측을 끝냄. 인부 2명.
호남리 사신총. 연도 내부의 흙을 들어냄. 인부 9명.
토포리 제6호분. 쉼.
내리 2호분.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6일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 실측. 인부 2명.
호남리 사신총. 연도 안의 흙과 돌을 외부에 들어냄. 인부 6명(小場).
토포리 제6호분.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7일

우천으로 쉼.

11월 8일

노산리 제1호분. 야쓰이. 벽화의 사진을 찍은 후 복구함.
토포리 제1호분. 오가와 실측 후 고분군의 배치도를 작성함. 인부 2명.
토포리 제5호분. 오바 실측. 인부 1명.
토포리 제6호분.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9일

호남리 사신총. 오바 실측. 야쓰이는 봉토의 외부에 자갈돌이 있는 것을 발견함.
내리 제2호분. 실측.
토포리 제1호분. 야쓰이가 사진을 찍은 후 원형으로 복원함.
토포리 제4호분. 원형으로 복구하는 공사를 실시함.

11월 10일

내리 제2호분. 토포리 제1호분. 토포리 제4호분 복구함.
호남리 사신총. 전날 발견된 외부의 돌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인부 23명을 부려 조사함(關野, 谷井, 栗山, 小川, 野守, 小場). 오바가 현실과 연도의 실측을 실시함.
오후부터 오가와는 토포리 제4호분 부근 고분군의 高低를 조사함.

11월 11일

호남리 사신총. 외부의 실측(小場).
토포리 제1호분, 토포리 제4호분. 발견품 정리(小川).
내리 제2호분, 토포리 제6호분. 발견품의 정리 및 실측도의 정리를 실시함.
세키노, 야쓰이, 구리야마. 오전 8시 반 출발. 평양 주위의 옛 유적을 조사하면서 오후 5시경에 평양도착.

11월 12일

포남리 사신총. 실측을 행해 오후 2시경에 끝마침.
토포리 제5호분, 토포리 제6호분 북구함. 인부 32명.

11월 13일

오전 8시경 출발, 오전 8시 40분 평양 도착(小場, 小川, 野守).

11월 14일

오전 6시 50분에 출발해 진지동에 도착. 도부로 용강군을 거쳐 온정리 부근의 발굴할 고분을 조사함. 오후 4시경 온정리 도착. 일행은 야쓰이, 오바, 오가와, 노모리, 구리야마는 오전 11경에 출발하여 진지동에 도착. 용강군을 거쳐 저녁 무렵에 온정리에 도착.

11월 15일

갈성리 甲墳. 오가와의 감독 하에 외형의 실측 및 발굴을 개시.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가 외형을 실측. 노모리가 도움.
황산 남면의 칠실총. 구리야마가 실측.

11월 16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발굴을 하던 중 층이 침하된 것을 발견함. 인부 9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발굴하면서 실측. 인부 5명(栗山).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의 감독 하에 발굴. 인부 6명.
제4호분. 노모리가 외형을 실측. 인부 1명.

11월 17일

갈성리 갑분. 침하된 층을 따라서 발굴해 벽의 흔적으로 생각되는 곳을 발견함. 인부 8명.
황산 남면의 삼실총. 전날에 이어 발굴. 인부 8명(小場).
황산 남면의 칠실총. 전날에 이어 발굴. 인부 8명.
제4호분. 전날에 이어 발굴. 인부 5명.

11월 18일

갈성리 갑분. 전날에 이어 발굴함. 인부 8명.
황산 남면의 삼실총. 실측과 현실의 흙을 들어냄. 인부 8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현실 안의 흙을 들어내면서 실측을 행함. 동쪽에서 5번째의 현실에서 도가니 발견 (栗山).
제4호분. 전날에 이어 발굴을 했으나 전부 파괴된 흔적뿐이므로 중지함. 인부 3명.

11월 19일

갈성리 갑분. 이어 발굴. 밑면의 일부분에 도달함. 인부 6명(小川).
황산 남면의 삼실총. 내부의 흙을 틀어내면서 실측. 인부 2명(小場).
황산 남면의 칠실총. 구리야마가 실측한서 현실의 내부 흙을 들어냄. 인부 4명.
황산 남면의 석총.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20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 실측. 인부 2명. 야간 보초를 세움.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구리야마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석총.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21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 실측. 인부 2명. 야간 보초를 세움.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구리야마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석총.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22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밑면의 조사를 실시해 도가니 발견. 인부 2명. 야간 보초를 세움.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구리야마가 조선의 남쪽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노모리가 이어서 실측함.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석총. 실측. 인부 1명.
세키노. 順川에서 도착함.

11월 23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가 밑면 조사.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노모리 실측. 인부 1명.

11월 24일

갈성리 갑분. 오가와의 감독 하에 토기를 전부 채집하고 실측. 인부 2명. 오후부터 토기 실측.
황산 남면의 삼실총. 오바 실측. 인부 1명.
황산 남면의 칠실총. 노모리 실측. 인부 1명(오전 중).

11월 25일

황산 남면의 이실총(삼실의 오기?). 오바 실측.
갈성리 갑분. 기타의 전부를 복구함. 인부 39명.
호남리 사신총의 야장에 의하면 현실의 네 벽에는 사신도(주작, 현무, 청룡, 백호)가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도마식 관좌대가 3개., 파편이 1개 있으므로 4구의 유해를 매장했다고 추정하였다. 도굴을 당해서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유물 목록(遺物目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 004
각주 004)
關野貞資料, 『長水院大墳(三號墳)及南墳(西號墳)調査日記附遺物目錄』 중 大同郡 柴足面 湖南里 제5호분의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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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발굴품갯수비고
4842飾釘9개頭部가 도금되어 있으나 2개 이외에는 지금은 도금이 박락되었음
4843斧形鐵器及槍2개
4844金銅金具破片2개매우 작은 단편적인 파편으로 용도 불명
4845金銅透金具1개
4846생략
4847漆斷片약간
鐵片2개용도 불명
천왕지신총의 단면도를 스케치한 야장을 보면 날짜가 대정 5년(1916) 10월 28일로 되어 있고, 개마총을 메모한 야장에는 대정 5년 10월 31일로 메모되어 있어, 먼저 순천군에 간 후 평양 대성산면의 벽화고분의 조사를 실시한 것 같다. 세키노는 천왕지신총을 총독부 산림과 기수 海老原侃에게 들었다고 하나,
주 005
각주 005)
關野貞, 1917, 「新に發見せられたる高句麗時代の繪畵」, 『國華』 第327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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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보고문에서는 평양 체재 중에 총독부의 시노다(篠田) 내무부장에게서 듣고 시간을 쪼개 조사했다고 하였다.
주 006
각주 006)
關野貞, 1925, 「順川郡北倉面の八角天井塚に就て」, 『朝鮮と建築』 第4輯 第11號에서는 “대정 2, 3년경에 그 지방의 사람이 발굴하여 유물을 빼내 安州에서 팔았다라는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순천군수인 朴相駿이 시노다 내무부장에게 무덤을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세키노는 1916년 11월경에 평양 부근을 조사하던 중 이 고분의 일을 시노다 내무부장에게서 듣고 順川에 가서 조사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묘의 발견 경위가 1917년의 보고문과 1925년의 보고문에서 차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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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실사만 하고 실측도와 모사의 작성은 다음해(1917)에 오바 쓰네키치와 오타 후쿠조가 하고 동시에 총독부 기사인 이와이가 벽돌을 쌓아 출입구를 만들고 문을 달아 견고한 열쇠를 채웠다.
그 후, 1925년 10월 3일 다시 평양에서 현지를 방문하여 열쇠를 들어가 벽화의 회반죽이 떨어져 나간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은 그 지방에 벽의 회반죽을 떼서 마시면 말라리아나 다른 병에 효능이 있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세키노 다다스는 서술하고 있다. 지난번과 비교하면 현실의 북벽에 그려진 부부도(夫婦圖) 중, 주인의 얼굴에서 신체까지의 회반죽이 많이 박락되어 그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나, 부인의 얼굴은 명확히 남아 있었다.
1916년부터 시작된 5개년 계획의 고적 조사는 1920년에 일단락되었다. 그때까지 발견·조사된 벽화고분에 대해서는 수리가 시행되어 목책 등의 보존 공사가 실시되었다.
세키노 다다스의 강서 대묘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용강 대총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매산리 고분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쌍영총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매산리 성총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안성동 대총 기록
세키노 다다스의 쌍영총 기록

  • 각주 001)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5, 『秋田魁新報』, 秋田魁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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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大正五年度古蹟調査槪要」,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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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關野貞 資料, 『長水院及溫井里附近ニ於ケル高句麗古墳發掘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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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關野貞資料, 『長水院大墳(三號墳)及南墳(西號墳)調査日記附遺物目錄』 중 大同郡 柴足面 湖南里 제5호분의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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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關野貞, 1917, 「新に發見せられたる高句麗時代の繪畵」, 『國華』 第327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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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關野貞, 1925, 「順川郡北倉面の八角天井塚に就て」, 『朝鮮と建築』 第4輯 第11號에서는 “대정 2, 3년경에 그 지방의 사람이 발굴하여 유물을 빼내 安州에서 팔았다라는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순천군수인 朴相駿이 시노다 내무부장에게 무덤을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세키노는 1916년 11월경에 평양 부근을 조사하던 중 이 고분의 일을 시노다 내무부장에게서 듣고 順川에 가서 조사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묘의 발견 경위가 1917년의 보고문과 1925년의 보고문에서 차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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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고분의 조사 1916年·1917年 자료번호 : ku.d_0003_005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