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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벽화고분의 조사 1912~1914년

1912년 9월 세키노 다다스·야쓰이 세이이치·구리야마 슌이치는 강서 대묘·중묘·소묘를 발굴·조사하였다. 벽화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으므로 다시 이왕직박물관에 의뢰하여 박물관의 예산에 의해 모사하기로 하고 당시 도쿄미술학교 조수였던 오바 쓰네키치와 오타 후쿠조의 파견을 의뢰하였다. 그들은 약 70일에 걸쳐 벽화를 상세히 모사하였고, 그 모사도는 경성(서울)의 박물관에 안치되었다.
주 001
각주 001)
太田天洋(1913)에 의하면 경성의 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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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으로 가져간 초벌 그림은 현재 도쿄대학과 도쿄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모사할 때는 램프나 반사경을 사용해 빛을 비췄으나 많은 어려움이 동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화의 색은 녹청색이 가장 많으나 그 색이 바래 적흑색이 되었다. 가장 훌륭하게 보이는 것은 적색으로 선명한 색을 띠고 있다. 또한 호분(胡紛)이 사용되었다. 황색도 많이 사용되었고 변색되어 어떤 색이었는지 모르는 것도 있다”라고 상세히 관찰하고 있다.
주 002
각주 002)
주 10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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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고임천장을 가진 강서 대묘의 천장석은 사방에 2척의 구멍이 나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도굴 구멍이었으나 오바와 오타가 행하는 모사 작업에서는 빛을 확보할 수 있는 구멍이 되었다. 이 도굴 구멍 위는 흙으로 덮혀 있었고 분구의 정점에서부터 파내려가면서 도굴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곳에서 천장석의 파편이 세 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 1913년의 모사에는 도굴 구멍 부분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강서 대묘는 화강암의 절석(切石)을 쌓은 단실(單室)의 횡혈식 석실로서 네 벽과 고임천장에 직접 회화가 그려져 있다. 벽에는 화면 가득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화(蓮華)·인동(忍冬) 이외에도 선인(仙人)·봉황(鳳凰)·익마(翼馬)가 그려져 있다.

강서 대묘 야장(1912년 9월 26일)

강서 우현리 제1총. 한 변은 약 10尺. 높이는 약 11尺4寸5分.
세 고분 중 가장 큰 것으로 높이 약 40尺.
현실 남쪽면 좌우에 각각 1개의 돌. 동벽과 서벽은 3개의 돌, 북벽은 2개의 돌로 되어 있고 천장은 이중고임으로, 그 위를 삼각고임으로 만들고 다시 그 위에 한 번 더 고임을 만들고는 천장석을 덮었다. 보통의 고구려 묘와 동일하나 구석의 현저한 고임 이외에는 볼만한 특색이 없다. 벽면의 상부를 약간 밖으로 내 놓은 것(경사 2)도 재미있다.
입구의 왼쪽 벽에는 쌍봉을, 다른 세 벽에는 황룡, 백호, 현무를 그려 넣었는데 그 정신의 화려함과 웅휘함은 매우 훌륭한 광경이다.
입구의 주위에는 인동당초의 문양을 그렸다.
제1고임의 측면에는 夢殿관음의 광배와 동일한 인동문양이 그려져 있다.
제2고임의 하단에는 중앙에 연화와 인동을, 좌우에는 연화를 그렸고 그 측면에 구름과 天人, 그리고 봉황을 탄 赤依人등과 산악도를 그리고 있다.
제3모서리의 삼각고임 하단 구석에 연화 인동, 좌우에 쌍봉, 측면에는 중앙에 흐트러진 인동문양(法隆寺 天蓋天人의 광배와 비슷한), 좌우에 익마가 그려져 있다.
제4고임 하부에는 연화 인동, 남북에는 한 마리의 봉황, 동서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그려져 있다.
중심석에는 구름과 용을 그렸는데 붓 놀림이 매우 강건하고 웅건하다.
이러한 회화들은 화강암 위에 직접 그린 것이나 고임의 주변부는 1촌 정도의 흑색선에 황토를 칠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입구는 지금은 큰 돌 4장을 겹쳐 막고 있으나 당초에는 그 위에 1장의 돌을 더 겹쳤던 것으로 지금은 없어졌다(그 형태만 남아 있다).
연도는 매우 짧다(혹시 그 앞 부분이 파괴된 것이지는 연구가 요구된다).
강서 중묘는 강서 대묘의 천장과는 달리 2단의 평행고임에 크고 평평한 1장의 천장석을 놓았다.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법륭사(法隆寺) 조사 경험이 있는 세키노 다다스는 연화·인동·은행당초 등의 문양에 주목하였다. 이들 3개의 묘는 삼각형으로 배치되었는데 남쪽 중앙에 대묘가 있고 이것을 제1총이라 불렀다. 그 북서쪽에 중묘가 위치하는데 이것을 제2총으로, 북동쪽의 소묘를 제3총으로 불렀다. 소묘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석실 구조는 3단의 평행고임이며 1단의 구석은 삼각고임으로 되어 있고 천장석이 놓여 있는데 대묘와 비슷하다.

강서 중묘 야장(1912년 9월 24일)

강서 고구려 고분 제2총. 우현리에 있다.
현실은 방형으로 약 10척이다. 네 벽은 아름답게 다듬은 질 좋은 화강암 각각 1장씩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2중의 고임이 1장씩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 위에 1장의 천장석을 덮었는데 그 천장석은 중앙을 향해 약간 들리게끔 되어 있고 4모서리에서 교차하고 있다.
남면 입구에는 돌문과 문확이 나 있었는데 돌문은 지금은 파괴되어 바닥에 있다.
장식. 남면의 좌우 벽에는 쌍봉이 마주보고 있고, 다른 3면에는 청룡, 백호, 현무를 그렸는데 특히 주작과 같은 것은 玉蟲廚子(불상을 넣는 상자형의 용기)를 떠올리게 된다.
고임 제1의 하단에는 문양이 없고 측면에는 인동문을 그렸는데 완전히 北朝풍이다.
고임 제2는 하단 중앙에 한 줄의 화염 당초문을 그렸고 측면은 은행 당초 문양을 그렸는데 수법이 매우 아름답다. 천장 중앙에 연화를 그렸고 남북에는 봉황, 동쪽에는 日輪과 구름을, 서쪽에는 月輪을 그렸다. 일륜에는 삼족오를 그렸고 월륜에는 뭔가 그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더욱이 네 구석에는 4등분 된 연화의 바깥에 인동문을 그렸는데 인동은 매우 희소한 형식의 것이다.
현무는 긴 길짐승 형태로 네 다리에 뱀을 두른 형태인데 뱀과 거북이 같이 頭部가 명확하지 않다. 그 밑에 바위산 형태를 그렸다.
침상도 또한 1장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목관의 파편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있고 붉은 칠의 작은 파편이 남아 있다.
석재는 매우 좋은 양질의 화강암을 깨끗하게 끌과 같은 것으로 다듬고 그 위에 흑색·붉은색·황토색·밤색·녹청색·감색 등의 안료로 그림이나 문양을 그렸다.
그 후 강서 중묘의 보존 공사를 할 때 현실의 입구에 만들어진 좌우 여닫이 돌문의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서도 벽화가 확인되었다.
주 003
각주 003)
梅原末治, 1966, 『朝鮮古文化綜鑑』 第4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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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임천장에는 동일한 은행인동당초문이 그려져 있었다.
강서의 고분을 조사할 때 남남동쪽으로 8.8km 떨어진(조선총독부 大正 5년(1916) 측량 5만분의 1 지도에 고분의 위치가 적혀 있으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계측함) 학림면 간성리에 있는 연화총이 이미 발굴되어 현실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듣고 조사하였다. 전실과 후실 2실로 되어 있고 벽과 고임천장에는 회반죽이 칠해졌는데 그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바와 오타는 이 벽화도 모사하였으며 모사는 경성의 박물관에 수납되었다.
주 004
각주 004)
關野貞, 1913, 「新たに發見せる高句麗時代の壁畵」, 『美術新報』 第12卷 第4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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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장형의 전실에는 3구분된 천장이 있고 동서의 벽에는 작은 감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성리 연화총 야장(1912년 9월 25일)

강서 학림면 간성리 고분.
전후 2실로 되어 있다. 묘도가 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어서 전실의 중앙 천장을 깨고 들어갔다.
전실은 장방형이고 후실의 입구 좌우에 작은 龕이 있다. 또한 좌우 벽의 앞쪽에 더 작은 벽감이 있고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 측면에 인물상이 있었다. 아쉽게도 안면이 훼손되었으나 신체 부분과 복장을 알아 볼 수 있다. 그 위쪽에 北朝식의 차양과 묵서가 그려져 있으며 인물은 의복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천장은 3구역으로 되어 있는데 서쪽 구역에는 연화의 중심 장식이 자색으로 그려져 있다.
전후의 벽은 2중 고임식으로 되어 있다.
벽 천장에는 흑색과 적색으로 두꺼운 윤곽선을 그리고 있다.
입구 위에는 뱀과 같은 것을 그린 흔적이 있으나 훼손되어 겨우 윗부분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후실은 방형 이며 3중 고임천장인데 대각으로 돌을 이용하는 등 보통의 고구려식이다.
「입구 위에는 뱀과 같은 것이, 동쪽에는 사슴과 같은 것이 (다리만 남아 있다), 서쪽에는」
입구 위쪽에는 두껍고 검은 띠로 삼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가운데 봉황을 그렸다. 그 위에 뱀을 그리고 동쪽에는 기린과 같은 것을(다리만 남아 있음), 서쪽에는 天人과 같은 것(일부만 남음)을 그렸다.
내부의 4 모서리에는 二手先組物(일본의 건축 용어로서 공포의 일종)을 그렸고, 앞 벽에는 陰으로 그린 斗財木(사원 건축 용어로서 공포를 구성하는 수평재)을 그렸는데 飛鳥式의 斗와 비슷한 것이 재미 있다.
3중의 고임천장에는 적색과 흑색으로 두꺼운 띠를 그려 넣었다.
서벽 상부에는 작은 天人圖가 있는데 a에는 선 안에 삼족오, b에는 그림은 있으나 내용은 불명확, c는 선 안에 파랑개비문과 같은 것을 그렸고 d에는 봉황과 같은 것이 약간 보인다.
중심 장식으로서 큰 연화가 있는데 검게 번진 것 같이 보인다.
벽은 2촌에서 4, 5촌 정도의 안산암으로 쌓았고, 입구의 감실 등은 粗質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돌에 약간 회칠을 하고 그 위에 2가지 채색을 한 것과, 회칠을 3번에 걸쳐 한 것도 있는데 밑의 회칠에는 竊을 섞었다.
분구의 앞면은 지반보다 높은 약 25척 정도이고 후면은 소 구릉이 잘려 나갔으나 옛날에는 분구 높이가 약 10척이었을 것이다.
동쪽면은 30척, 서쪽면은 15척으로 경사는 약 15間이다.
분구는 園山으로 불리는 소 구릉의 남단에 있다.
위치 上下. 간성리의 서쪽 약 1000m, 園山의 남단에 있는데 남쪽보다 서쪽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에 임한다.
주의 鳴□里(園山의 서북)의 서북. 동쪽의 낮고 평평한 산악 지역에(동쪽에 2기, 서쪽에 약 10기) 큰 고분 수십 기가 있는데 고구려 시대의 고분인 것 같다.
세키노 다다스·야쓰이 세이이치·구리야마 슌이치가 강서 지역의 조사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와 강원도 조사를 위해 출발하려고 할 때, 전매국장인 우에바야시 케이지로(上林敬次郎)로부터 매산리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일정 관계상 세키노 다다스는 조사에 갈 수 없어 총독부 기사인 이와이 초사부로(岩井長三郞, 1905년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와 벽화 모사에 종사하고 있던 오타 후쿠조에게 그 조사를 맡겼다. 그 때 벽화의 사진이 찍혔고 모사도 일부분이 작성되었다. 세키노는 이것을 일본에 돌아온 뒤 보았다.
주 005
각주 005)
關野貞, 1914, 「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墳墓」, 『建築雜誌』 第326號; 關野貞, 1914b, 「朝鮮古墳の壁書に就て」, 『美術新報』 第 13卷 第5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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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9월에 세키노 다다스·야쓰이 세이이치·구리야마 슌이치는 전년에 알려진 매산리 수총(狩塚, 사신총)을 조사하였다. 매산리 고분군에는 1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제1〜5행, 각 행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 1, 2, 3순으로 번호가 매겨졌다. 이 중 조사된 고분에는 수총(제2행 제1) , 남총(제2행 제2) , 중총(제4행 제2), 북총(제5행 제2)의 명칭이 붙여졌다. 이 4기와 제5행 제1의 고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붕괴되어 있었다. 수총은 현실 남벽의 일부가 파괴되어 이곳으로 출입이 가능하였다. 서벽에 말을 타고 수렵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므로 수총이라고 명명되었으나, 네 벽에 사신(현무, 청룡, 주작, 백호)이 그려져 있으므로 사신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매산리의 다른 고분에는 벽화가 없었으나 남총은 회반죽이 대부분 떨어져 나갔지만 겨우 회칠한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고 석면(石面)이 노출되어 있었다. 중총은 회반죽이 잘 남아 있었는데 4외에 걸쳐 겹쳐 칠했고 약간 회색을 띠고 있다.
수총의 모사는 오타 후쿠조가 1912년에 혼자서 작성했는데 인물이나 말 장면에 한정된 것들이었다. 전체 모사는 1913년에 오바 쓰네키치가 작성하였다.

매산리 狩塚 야장(1913년 9월 23일)

평안남도 진남포 대상면 매산 고분 제2행의 제1. 狩塚.
사방이 약 10척의 현실. 南面 동쪽으로 편재된 연도가 있다.
벽은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완곡되고 위는 3중 고임천장이다. 하단의 □에서 측면의 안쪽으로 기울었다. 그 위에 삼각의 구석돌을 4장 올리고 그 위에 4장의 석재를 보통으로 겹친 후 그 위에 천장석(지금은 없다)을 올려 덮었다. 이러한 구조는 물론 고구려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데, 강서, 강동 등에 비교해 보면 수법 이 매우 치졸하다.
벽의 구조는 간단한 석재로서 석재 사이에는 석회를 바르고 점토로 막았다. 벽면에는 회반죽을 4번 반복해서 칠했는데 밑칠의 3번은 점토에 약간의 석회와 짚 등을 섞어서 칠하였다. 맨 위 칠은 석회칠을 하고 그 위에 회화, 문양을 그렸다. 밑칠과 윗칠 모두 매우 견고하고 철저하다.
벽화
남면은 입구의 서쪽에 쌍봉이 서로 마주보게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창룡이 그려져 있다. 뒤쪽 약간 상부에는 2필의 말과 인물을 그렸다. 서벽은 백호를 그렸고(박락과 오손이 삼하다), 중앙 상부에는 한 사람이 말을 타고 활을 당긴 모습을 그렸는데 2마리의 사슴이 그 앞에서 달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북벽.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편재되게 4이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을 그렸다. 좌우에는 기둥이 서 있고, 위에는 장막을 드리웠으며 중앙과 좌·우 끝에 꽃 장식을 그렸다. 그리고 2군데에는 굽은 봉 끝에 방울을 매단 그림을 그렸다. 그 동쪽에는 한 사람이 말을 다룬 그림, 서쪽에는 현무를 그렸으나 애석하게도 박락·오손이 심해 전체를 알아 볼 수는 없다.
천장. 3중의 고임천장 중 제1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 제2에는 각 면에 3군데 씩 일종의 당초문양 같은 것을 그렸으며, 제3 고임천장에는 황토를 기자고 당초문양을 그렸다.
삼각 고임돌에는 문양이 있는데 제2의 보통 삼각고임에는 당초문양을 그렸으나 천장석에는 남아있지 않아 당초의 문양을 추정 할 수 없다.
남벽. 봉황의 자세를 그린 수법은 매우 치졸하나 머리 장식이나 부리 밑 장식의 수법은 재미있는데 그 양식은 남북조식에서 기 인한 것일 것이다.
동벽. 봉황과 거의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용을 그렸는데 그 또한 매우 치졸하다. 양 뿔이 있고 길고 곧은 혀를 내밀고 있다. 눈 부근은 훼손되었고 오른쪽 앞발은 매우 엉성하다. 날개의 흔적이 앞발 주변에 남아 있고 꼬리는 체구까지 계속되어 뱀과 같다. 강서와 같은 확연히 몸에서 뻗어 나온 것과는 차이가 있는 古式일 것이다.
북벽. 현무는 뱀이 또아리 튼 것과 귀갑문이 보이는 뱀의 목, 거북의 몸과 4다리가 확연하다. 단지 뱀의 또아리 튼 자세가 부자연스럽고 기묘하다.
서벽. 호랑이 얼굴면으로 눈 밑과 코 등의 일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몸체와 등의 근육, 꼬리도 보이나 다른 것은 박락되어 찾아보기 어렵다.
또 다른 야장(1913년 9월 23일)이 있는데 여기에는 벽화의 내용에 관해서 적혀 있다.

진남포 대산면 매산리 고분 제2행의 제1狩塚(1913년 9월 23일)

북벽. 인물 4명. 동쪽이 제일 큰 데 침상에 앉아 있다. 2명이 한 침상에 앉아 있다. 동쪽 인물의 머리 부분이 부처와 같다. 침상 사이가 매우 협소한데 이렇게 그린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무엇보다 가슴 부근과 허리 주위에서 領布와 같은 것이 위로 올라가게 표현되고 표주박 같은 형태도 남아 있는데 육조 때의 거울에 있는 인물에 도 동일한 모양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복식이나 마구, 말을 그린 기법 등이 육조 양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매우 큰 감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동벽. 위에는 일륜을 그렸는데 선 안에 삼족오가 있다.
서벽. 위에는 달을 나타냈는데 선이 없는 것도 기묘하고 두꺼비(?)는 수중에 사는 가마무시 (ガマ蟲)와 닮았다.
고임천장의 당초문양은 밑의 한 종류는 일종의 구름 문양과 닮은 당초문양을 3개 정도 그리고 먹으로 윤곽을 만들어 중간 중간에 川과 같은 마디를 그렸다. 위의 당초문양은 연속 문양으로서 남북조의 성질을 띠고 있다.
연대는 약 1,500년 전으로 진남포 부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랜된 형태로 생각된다.
북벽의 인물 4명 중 동쪽에 가장 정성껏 그린 것은 묘의 주인이고 다른 인물들은 그 따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1913년은 벽화고분의 조사와 모사가 가장 융성하게 이루어진 해였다. 이왕직사무관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彥)가 1912년 화상리 대연화총(감신총)과 화상리 성총을 조사하고 발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키노 다다스·야쓰이 세이이치·구리야마 슌이치가 이 2개의 고분을 발굴·조사하였다. 대연화총은 벽화의 일부에 큰 연화가 있는 것에서 명명되었는데 전실의 좌우에 감이 있고 그 안에 신상(神像)이 그려져 있어서 감신총이라고 한다.

화상리 대연화총(감신총) 야장(1913년 9월 25일)

평안남도 화상리 대 연화총(감신총)
전실. 좌우에 방형의 감이 있다. 천장은 평평하고 주위는 벽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으로 완곡하는 고임천장으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의 좌우 벽 중 동벽은 박락되었다. 서벽의 기마 인물도에서는 4명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남벽의 서쪽 밑부분에 車輪과 종자가 뭔가를 들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서벽. 방형의 감 내부에 있는 神像은 머리부분에서 어깨부분까지가 박탁되고 허리 밑 부분이 남아 있다. 매우 협소한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대좌 밑에는 연단이 있다. 인물 좌우에 작은 인 물이 대립해서 서 있다. 위에는 장막을 짰고 그 밑의 벽에 王字를 나타낸 문양을 그렸다. 또한 뒷벽의 문양이나 감의 좌·우측 벽에는 각 2명씩을 세웠는데 위의 각 1인은 청봉을 가지고 서 있고, 밑의 2명은 시중 든 자세로 서 있다. 감의 좌우 공포 밑에는 각 2명의 부인이 서 있는데 윗쪽 북측에 있는 사람은 합장을 하고, 남쪽은 박락되었으나 겨우 의상을 알아볼 정도이다. 밑 부인은 양손으로 시중들고 있으나 허리 밑은 박락되었다.
동벽. 감 내부의 神像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앉아 있다. 좌우에는 시중드는 자가 있다. 남쪽에는 공물을 바치는, 북쪽에는 큰 깃발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위에는 장막을 드리우고 뒷벽에는 일종의 화염문양을 그렸다. 측벽 좌우 2명의 밑에 있는 인물들은 박락되어 불 분명하다. 위의 인물은 단지 공손하게 서 있을 뿐이다. 감의 좌·우 동벽에는 각각 인물들이 있는데 밑의 인물은 박락되어 불분명하다. 위의 인물 중 남쪽 인물은 공손하게 서 있고 북쪽 인물은 뭔가를 봉양하는 것 같다.
북벽. 서쪽 밑의 3명은 꿇어 앉아 공양드리는 것 같으나 위는 불분명하다.
동쪽은 박탁이 심해 불분명하다.
전실의 4모서리에는 공포를 그리고 대들보를 그렸는데 대들보의 4면에는 번룡과 같은 문양이 있다. 그 위에는 화염과 같은 끝 장식이 군데군데 된 것들이 띠처럼 둘러 있는데 그 사이에 기묘하게 생긴 구름 문양을 촘촘히 두었다. 그 위의 서벽 천장 밑에는 蛇龍과 산악, 신선(?)과 같은 인물을 5명 정도 표현하였는데 대부분 박락되어 남아 있지 않다.
전·후실의 중간 입구. 좌(동쪽)벽에는 큰 인물과 같은 것을 그렸으나 불명확하고 우벽은 대부분 박락되어 알기 힘들다.
후실. 네 모퉁이에 공포와 대들보를 그렸는데 수법과 문양은 전실의 것과 차이가 없다.
남벽. 대들보 위에 끝 장식을 한 것이 있고 飛雲과 같은 것도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봉황을 그린 것 같은 것도 있으나 단지 다리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쪽에는 소나무 같은 것을 그렸고 동쪽은 박락되었다.
동벽은 전부 붕괴, 유실되었다.
서벽. 대들보 위에 소나무 같은 것을 그렸고 밑에는 山樹木을 그렸다. 양 기수는 마주보고 사냥을 하고 있는데 활을 당긴 상태이다. 밑에는 고독한 듯이 있는 인물과 호랑이가 달리는 것이 보이나 대부분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양 기수는 그런대로 선명한 편이다. 수법은 매우 조잡하다.
북벽. 대부분 박락되었으나 유일하게 동쪽의 장막 같은 것을 그린 것과 중앙과 좌우에 3명이 공손히 앉아 있는 것을 그린 것 같은 것이 남아 있으나 단지 허리 부분이나 양 손을 맞잡고 공손히 있는 정도만이 보일 뿐이다(좌·우). (중앙의 사람이 유일하게 綬와 같고 2條를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전체의 형상. 현재 전실의 동벽, 감 위의 고임천장이 전부 붕괴되었고 비바람의 피해를 피할 수 없다. 후실은 나무 뿌리가 확산되어 있고 동벽도 붕괴되었는데 흙이 내부로 밀려 들어왔다. 천장의 일부, 특히 동쪽이 붕괴된다면 위험한 상태가 될 것이다.
성총은 편축 단실의 석실로 고임천장에 별 모양의 문양이 있는 것에 의해 이름 붙여졌다. 이 벽화의 특징은 둥그스럼한 점을 띠고 있는 공포와 거꾸로 늘어져 있는 큰 연화문양이다.

성총 야장(1913년 9월 24일)

평안남도 진남포 신북면 화상리 고분(을호) 성총.
비교적 대부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네 벽에는 사신도 등이 묘사되어 있다. 천장에 간단한 당초와 별 모양을 그렸다. 단 20개의 장식으로 星辰圖를 나타냈다. 네 모퉁이에 공포를 그렸고 그 위에 고임천장을, 그 밑에 대들보 형태를 그렸다.
남벽의 입구 위에는 봉황이 1쌍 기둥과 입구를 둘러싸고 당초문양이 그려져 있다. 입구의 서벽에 위로 향해 있는 연화문을 크게 그렸고 그 좌측에 일종의 인동을 간략하게 그린 것이 있다.
동벽. 창룡과 같은 것이 있는데 양 뿔과 눈, 꼬리 등의 대부분이 불명확하다. 그 위에는 연화문을 거꾸로 늘인 것과 같은 큰 문양이 그려져 있다.
북벽. 蓮文을 거꾸로 그린 것 위에 작은 인물이 있다. 현무도는 박락되어 불명확하다.
서벽. 백호는 박락되어 전혀 그 형체를 알 수 없다. 중앙에 연자를 표현한 것들이 있다. 사진 있음.
천장. 고임천장의 측면에는 대부분 단순한 당초 문양이, 밑에는 火打石이, 모서리의 돌에는 중앙에 圏(황색), 바깥에 소용돌이 선을 그린 것, 그 위의 火打石에는 3개 혹은 4개의 圏(황색)을 그렸다.
천장석 . 8엽 연화와 같으나 불명확하다.
또한 세키노 다다스는 평양에서 평안남도 서기인 야마자키 사부로(山崎三郎)로부터 안성동장(安城洞長)이 고분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9월 24일부터 안성동 대총(용강 대묘)과 쌍영총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29일에는 벽화고분의 조사를 전부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주 006
각주 006)
1913년도의 고적 조사에 관해서는 早乙女雅博, 2007, 「關野貞の朝鮮古蹟調査(二)-大正二年朝鮮古蹟調査略報吿-」, 『韓國朝鮮文化研究』 第10號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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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동 대총은 횡장의 전실로 천장은 3구분되고 대들보에는 일종의 당초문양, 마복(蟇股, 불교 사원 건축에서 사용되는 山 형태의 부자재)의 사이에는 반 개화된 연화문이 그려져 있다.

안성동 대총 야장(1913년 9월 28일)

평안남도. 용강군 일연지면 안성동 고분(乙號) 대총.
전후 2실로 되어 있다.
묘도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전실. 장방형의 얇은 이중 고임천장. 천장을 3구로 분리할 수 있다. 각 구는 2중의 3각식 천장으로 만들었다.
벽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 공포(三斗), 대들보가 있다. 대들보의 위에는 모서리에 蟇股이 있다. 중간은 불명확하다. 대들보와 蟇股에는 문양을 그렸는데 일종의 당초문이 있다. 대들보에는 하단 측면에 동일하게 번룡 문양, 제1고임천장에는 새와 같을 것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쾌쾌하다. 다른 문양은 불명확하다.
벽화도 유일하게 남면 입구의 서쪽 벽에 누각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蟇股 사이에 일종의 연화문양과 같은 것이 있다.
비교적 전실이 기묘하고 벽감(niche) 수법이 보인다.
쌍영총은 전실과 후실의 이 실로 되어 있는데, 그 사이의 통로에 8각형의 기둥이 두 개 서 있다. 이 두 개의 기둥에 의해 쌍영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키노 다다스는 1896년부터 1901년 사이에 실시한 나라현에서의 고사원(古寺院) 사찰 조사에서 건조물 이외에도 관심을 가져 불상의 얼굴이나 법의 등을 스케치해 두었다. 이것은 건조물의 연대를 생각할 때 이와 관련되는 불상의 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 불상의 연대를 결정하는 포인트가 얼굴이나 법의 문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그 특징으로서 인물의 옷 문양에 주목했다고 한 것을 야장의 메모에서도 알 수 있다.

쌍영총의 야장(1913년 9월 28일)

평안남도 용강군 일연면 안성동 고분(甲號) 쌍영총
전후 兩室로 되어 있다. 그 중간에 28개의 8각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수법이다.
연도의 앞 부분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중간의 두께가 3촌에 이르고, 높이가 6척 5촌에 이르는 큰 돌 2장을 가지고 막았다. 그 어깨 부분은 사람의 손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어 출입이 가능할 정도이다.
중문에서 안쪽 문에 이르는 사이에 회반죽을 칠하였다. 막은 돌 뒤쪽에서 천장 밑에 이르기까지 높이 1촌, 넓이 3촌에 이르는 緣을 만들고 붉게 칠을 하였다.
벽은 석회를 칠하였다. 동벽에는 牛車가 2대, 갑주를 찬 말에 오른 1명, 남녀의 인물 등 대략 30여명을 그렸는데 큰 북을 치는 사람도 있다.
서벽. 우차, 기마 인물, 기타 인물 약 30명, 북을 치고 창을 들고 춤추는 사람 2명.
천장에도 구름문양과 같은 것을 그렸으나 불명확하다.
안쪽 문. 돌문 2장은 같이 파괴되었다. 楣石에 축 구멍을 내고 밑에는 幣軸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명확하지 않다. □物이 있다.
안쪽 문 좌우 벽 에 力士를 그렸다. 동쪽은 고려 검을 가졌으나 서쪽은 불명확하다.
전실. 동·서·남쪽 3면은 3중의 고임천장이나 북벽은 2중 고임천장이다. 그 위의 구조는 보통 보이는 것과 같다. 동벽·서벽에는 용과 호랑이를 그렸는데 필력이 매우 웅건하나 애석하게도 후세에 벽을 파괴하여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제1고임에는 당초, 제2고임에는 봉황과 운문. 제3고임에는 당초를, 모서리의 삼각고임에 2중, 그 한 종류는 독특하고 기발한 문양이다.
중심석에 鷄林面의 것과 비슷한 연화가 그려져 있다.
전실의 남면 입구 좌·우벽에 인물의 입상이 있으나 불명료하다.
8각 돌기둥은 柱頭와 柱脚이 있다. 위로 갈수록 줄어들고 柱頭에는 연판을 묘사하였다. 柱頭의 abacus와 皿板에도 두 종류의 문양이 있다. 柱脚에도 연화를 그렸다.
후실. 네 모서리에 공포, 대들보, 蟇服을 그렸다. 3중 들임천장이고 다른 것은 보통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제1들임의 경사면과 제2들임에는 기발한 문양을 만들었고 중심에는 연화를 그렸는데 전실도 비슷하다.
組物이나 蟇股 사이의 작은 벽과 남면에는 용봉과 화병과 꽃문양을, 대들보에는 번룡 문양을 그렸다.
뒷벽. 회화가 가장 장관이다. 중앙에 누각 형태를 그리고, 가운데에는 내외의 상을 옮겨 그렸는데(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 남편 쪽에는 남자 시중이 앉아 있고, 부인 쪽에는 여자 시중이 서서 합장을 하고 있다. 누각에는 통로, 계단, 格狹間, 문, 공포, 장막, 대들보, 중심 장식, 대들보 끝 장식 등이 있다. 더욱이 누각 위에는 장막이 집을 덮을 정도로 되어 있고, 좌우에 있는 기둥 형태의 것 위쪽에는 귀신 형태를 만들었다. 치미 같은 것도 있고 장막의 중앙에는 봉황을 그렸다.
동벽에는 9명을 그렸다. 모두 뒷벽의 주인 부부를 향해 예를 올리고 있고 더욱이 그 뒤에 1, 2명이 더 있는 것 같으나 벽이 파괴되어 불명확하다.
서벽. 막 내에 장막을 만들었다. 내부에 뭔가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명확히 알 수 없다. 점점 후방의 벽 파괴되고 있다.
오바 쓰네키치는 도쿄제국대학으로부터 벽화의 모사를 위촉받았다. 1913년 8월 2일에 출발해 경성의 박물관에서 1912년의 모사 그림(강서 대묘, 중묘)을 완성하였고, 9월 30일에 배로 부산을 출발하여 귀국하였다.
주 007
각주 007)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0, 『秋田魁新報』 1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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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다다스 등과는 별도로 행동하게 되었는데 1913년에 새롭게 발굴된 고분의 별화 모사가 다음 해에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 작성된 강서 대묘와 강서 중묘의 모사는 정식 모사가 이왕직박물관에, 초벌 그림이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수납되었다. 그리고 이왕직박물관의 모사는 1916년 『조선고분벽화집(朝鮮古墳壁畵集)』으로 원색 출판되었다. 현재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사는 이왕직박물관에 수납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더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나, 『조선고분벽화집』의 벽화와 비교해 보면 일부 열화(劣化)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국립중앙 박물관의 최장열이 기술한 것처럼 1930년에 본격적인 모사를 작성한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주 008
각주 008)
國立中央博物館, 2006, 『高句麗古墳壁畵-國立中央博物館所藏模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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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은 세키노가 유럽에 유학을 갈 예정이었으므로, 1914년 7월 3일에는 송별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에 유럽에 갈 예정이었으나 유럽에 대 전란이 발발하여 연기 되었다. 세키노 다다스는 이 해에 유럽 유학을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건너가지 않았다.
오바 쓰네키치는 도쿄미술학교로부터 학술 연구를 위해 조선 출장을 명 받고, 1914년 9월 7일에 총독부에서 벽화 모사와 사진의 협의를 거친 후 8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쌍영총, 안성동 대총, 화상리 대연화총(귀갑총), 화상리 성총을 모사하였다. 11월부터는 매우 추워 대연화총의 석실 내에서 양동이에 소나무 잎을 넣고 불을 지펴서 온기를 얻었다고 전한다. 18일에 성총의 남벽을 모사하여 전부 완료하였다.
주 009
각주 009)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1, 『秋田魁新報』 11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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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기준으로 1913년 1월 일본 고고학례회(考古學例會)에서 세키노 다다스 주도로 고구려 시대의 고분에 관한 강연회가 있었다. 또한 그 해에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의 졸업 증서 수여식 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왕이 이 대학에 방문했는데, 이왕직박물관에서 보내 온 벽화 모사를 관람하고 세키노 다다스가 이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다음 11일에는 동호인들에게도 관람을 허락하였다.
주 010
각주 010)
「彙報·朝鮮江西古墳壁畵模寫の御覽」, 『考古學雜誌』 第3卷 第12號,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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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1914년 4월 8~10일까지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건축학과에서 건축학과가 수집한 표본을 전시하는 제5회 전람회가 개최되었는데, 1912년과 1913년에 제작된 강서 대며, 강서 중묘의 벽화 모사가 전시되었다.
주 011
각주 011)
「工科大雜築學科第五回展覽會」, 『建築雜誌』 第328號,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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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太田天洋(1913)에 의하면 경성의 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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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주 10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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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梅原末治, 1966, 『朝鮮古文化綜鑑』 第4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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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關野貞, 1913, 「新たに發見せる高句麗時代の壁畵」, 『美術新報』 第12卷 第4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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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關野貞, 1914, 「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墳墓」, 『建築雜誌』 第326號; 關野貞, 1914b, 「朝鮮古墳の壁書に就て」, 『美術新報』 第 13卷 第5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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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1913년도의 고적 조사에 관해서는 早乙女雅博, 2007, 「關野貞の朝鮮古蹟調査(二)-大正二年朝鮮古蹟調査略報吿-」, 『韓國朝鮮文化研究』 第10號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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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0, 『秋田魁新報』 1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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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國立中央博物館, 2006, 『高句麗古墳壁畵-國立中央博物館所藏模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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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佐々木榮孝, 2000, 「文樣に生きる」 11, 『秋田魁新報』 11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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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彙報·朝鮮江西古墳壁畵模寫の御覽」, 『考古學雜誌』 第3卷 第12號,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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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工科大雜築學科第五回展覽會」, 『建築雜誌』 第328號,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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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고분의 조사 1912~1914년 자료번호 : ku.d_0003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