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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맺음말

이상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된 다음에 실시된 고구려 유적의 조사 내용을 고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구로이타 가쓰미가 설립을 주도한 고적연구회의 유적조사 목적이 비교적 분명해졌다. 경주와 평양에 각각 연구실을 설치하여 조사를 주도한 것은 외부 지원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회의 성격상 외부로 선전할 수 있는 조사성과를 크게 고려한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의 타율성을 설명하는 자료의 획득이라는 명분의 낙랑유적 조사, 그리고 신공황후 신라 정벌설로 조사명분이 설명되는 신라유적 조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931년에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되고 각종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남정리 116호(채협총)을 위시한 낙랑 고분의 발굴조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고구려 유적이 조사된 것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1936년이 되어서이다. 조사단은 조사의 제1목적을 고분벽화의 발견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사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성산성 주변의 고구려 고분과 광대산 남사면의 고구려 고분, 그리고 대보면의 고분군 중에서 대형분은 거의 대부분 굴착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놀라운 사실은 벽화가 있음직한 고분을 무수히 굴착하였지만, 조사 도중에 도굴이 분명하거나 벽화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조사 기록을 남기지도 않은 채 조사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사단은 고분의 구조와 분구의 관계를 밝히려는 학술적인 목적도 있었다고 하였으나 그 경과는 철저하게 벽화와 출토유물의 확보에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이런식의 고분조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편 1930년대의 발굴조사는 고적조사 초창기에 조사를 주도하던 1세대들에서 완전히 물갈이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세키노 다다시의 급작스런 사망에 기인하는 것인데 다만 그를 도와 고구려 벽화를 모사하던 오바 쓰네키치는 그 후에도 고분 조사를 진두지휘하고 도면을 작성하고 약보고의 원고를 작성하고 있다.
1936년과 1937년의 조사에서는 오바 쓰네키치와 아리미쓰 교이치 등이 매장주체부의 실측도를 주로 작성 하였는데, 구조가 복잡하거나 벽화가 발견된 고분은 오바 쓰네키치가 전담한다.
원래 경주연구소에 있던 아리미쓰가 고구려 고분의 발굴에 참가하게 된 것은 평양지역 고적조사 단원들의 고령화가 진행된 점을 감안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배려라고 알려지지만, 결국 이때에도 이러한 배려에 조선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전반적인 조사방법과 실측도 작성방법은 1910년대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으며, 줄어든 예산이 영향을 주었는지 오히려 더 거칠게 조사가 진행된 측면도 확인된다. 1936년도의 약보고서에서 축척을 미터로 표시한 것이 인상적이지만 웬일인지 1937년의 보고에서는 다시 척으로 길이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대보면에 소재하는 고구려 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붉은 평기와들이 출토된 사실은 평양지역에서 석실분과 기와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데 참고가 된다. 또한 고구려 고분의 축조 방법이 비교적 명확해 졌다.
1937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끝으로 오랫동안 고구려 고분은 조사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조사단이 밝히듯이 더이상 고구려 고분에서 벽화 고분 발견이라는 새로운 성과를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1940년대에 진파리에서 우연히 벽화 고분이 발견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대해서는 전고 공동연구자인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 씨가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밝혔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끝으로 2007년도부터 올해까지 실시된 작업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의 조사내용이 최초로 우리 시선으로 전체적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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