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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대보면 고분군 조사

대보면 제2호분

대보면 고분군은 평양의 서쪽에 위치한 대동군 대보면 안정리 서기리에 위치한다. 모두 8기로 이루어졌으며 분구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1910년대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모았던 고분군이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발굴조사를 기획하였으나 벽지(僻地)이기에 조사원들이 묵을 마땅한 숙소가 없어 조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근에는 고구려 고분 이외에 낙랑 고분도 같이 존재한다. 특히 유명한 강서 3묘와의 거리는 불과 780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하 보고서의 내용을 정리한다.
대보면 고구려 고분의 위치
고분 8기는 모두 밭 안에 존재하며 1~3호분은 안정리에, 4~8호분은 서기리에 위치한다. 규모는 2호분과 7호분이 가장 크고, 4호분과 5호분이 그 뒤를 따르고, 1호분과 호분은 작아서 마치 2호분에 배속된 무덤같이 보이고, 6호분은 이미 파괴되어 두 개로 나뉘어져 분구가 낮고, 8호분 역시 규모가 작다. 조사에서는 1호분, 6호분, 8호분의 3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5기를 발굴하였다.
대보면 제2호분은 분구가 거의 직사각형을 이루고 크기는 동서로 약 25m, 남북으로 약 31.82m, 높이가 7.27m이다. 석실은 약 12도 서쪽으로 기울었으며 남향으로 규모에 비해 작다. 석실은 북쪽 벽의 폭이 2.52m, 동쪽 벽의 길이는 2.98m분, 높이는 2.85m이다. 그리고 남쪽 벽의 중앙에 사각형의 현문을 뚫어 놓았다. 출입구의 높이는 1.55m, 길이는 67cm, 폭은 1.06m으로서 바깥쪽을 향해 약간 넓어진다. 석실 정면에 나타나는 네 벽의 높이는 1.52m 전후이고, 위로 가면서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진다. 이 벽의 위에서부터 이중으로 평행모줄임을 하고 그 위에 삼각형모줄임을 두 번에 걸쳐 실시하고 중앙에 사각형 천장을 올린 구조이다. 오른쪽 천장은 남북으로 103m, 동서로 88cm이다.
현실의 바닥은 무덤의 정상에서 9.09m 아래에 있는데, 동서에 걸쳐 두께가 7cm정도의 조잡한 화강암 판석 넉 장을 깔아 놓고 벽 가까이에 돌의 길이가 부족해서 생긴 틈에는 회반죽으로 메웠다.
연도부의 바닥에도 역시 한 장의 돌을 깔았다. 바닥의 기초는 우선 제법 굵은 돌을 넣어서 굳히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전면에 깐 다음 그 위에 약 15cm 두께의 목탄을 얹어 놓고 그 위에 판석을 깐 것이다. 시상의 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관대 한 쌍을 동서방향으로 놓았다. 대석 위쪽 면은 마무리 가공이 조잡하고, 서쪽의 것은 길이가 2.61m, 폭이 92cm이고, 동쪽의 것은 그 보다 약간 작다. 조사단은 큰 것을 남자의 관대로 판단한다. 두께는 눈에 보이는 곳이 13.6cm이고, 뒤쪽의 두께는 균일하지 않아 4~5cm에 지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대석의 다리는 그 높이가 대석의 두께차이 때문에 균일하지 않지만 대략 14cm 정도이다. 양쪽 관대를 합쳐서 다섯 개의 다리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관대 하나에 네 개씩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보면 유적 분포도
대보면 고분군 분포상태
또 별도로 폭 18cm에서 15cm, 길이 30cm 정도의 사각형 돌이 한 개 발견되었는데 조사단은 이를 석침으로 추정했다. 현실 입구의 바깥에는 폭이 각 60.6cm, 높이가 약 75.8cm 전후, 위아래에 축이 있는 두 장의 문짝을 세워서 회반죽을 발라 굳혔다. 그 외부 역시 다수의 돌덩이를 회반죽으로 메워, 연도부 전체를 막았다. 현실의 남쪽에 만들어진 연도는 길이 3.94m으로, 아래쪽 폭은 1.32m, 높이는 1.68m이다. 동서쪽 벽은 조금 앞으로 기울었는데, 위에 세 개의 큰 돌을 한 줄로 차례로 얹어 천장으로 삼았다. 바닥은 지면을 두드려 굳힌 다음 1.5cm 두께로 회반죽을 직접 발라서 마무리 했다.
여러 번에 걸친 도굴로 인해 연도부의 폐쇄석 상층부가 묘도 쪽으로 옮겨졌고 문짝은 두 장 모두 위쪽이 파괴되었다. 관대석은 좌우벽에 기대어 있었고 다리는 현실 사방에 흩어진 상태였으며 바닥석도 곳곳이 파괴되었고 시상 자갈까지도 깊게 파헤쳐진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석실 내에는 아무런 부장품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보면 2·3호 원경
대보면 2호분 근경
대보면 제2호분 폐쇄상태
대보면 제2호분 연도에서 본 현실
대보면 제2호분 현실내부(좌), 현실 천장(우)

대보면 제3호분

1호분과 함께 2호분에 딸린 무덤처럼 그 좌우에 조성된 작은 고분이다. 분구는 동서로 12m, 남북으로 15m의 크기로, 평면형은 대체로 사각형이다. 조사는 분구의 남쪽을 수직으로 굴착하여 출입구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하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한다.
주민이 채석의 목적으로 석실을 파괴한 것으로 천장석은 물론 모줄임석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토사가 실내에 가득하고 4벽의 상부가 노출된 상태였으며 잔존하는 석실의 높이는 1.52m 정도였다. 매장주체부는 기본적으로 남향이나 중심축이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다. 현실은 동서로 1.82m, 남북으로 3.1m인 사다리꼴이다. 이 석실의 동·서·북 세 개의 벽은 높이가 1.52m, 두께 10.6cm의 얇은 화강암 한 장을 가공해서 만든 것으로, 해당 벽면은 작은 요철이 있으며 그 위에 얇게 회반죽을 발랐다. 남쪽 벽은 파괴되어서 원상을 알 수 없지만 그 서쪽의 중간 지점은 벽면의 높이가 91cm을 넘는다.
현실 남쪽의 동쪽에 현문을 설치했는데 그 길이는 91cm 정도이고, 원래 한 장의 판석으로 밀폐한 것 같다. 현문의 바깥으로 길이 2.27m의 연도가 이어진다. 폭이 1.52m이고, 양쪽 벽은 30~60cm 정도의 막돌로 쌓은 다음 석회를 바른 구조이다. 높이는 약 1.52m이다. 석실 서쪽 벽 상부에 길이 1.52m, 벽면에서 튀어 나온 두께 15.2cm짜리 석재 하나가 있는데 이는 평행내어쌓기의 흔적이다.
대보면 제3호분 석실내부에서 본 연도
대보면 제3호분 석실내부
현실과 연도부 바닥에는 가공된 커다란 판석을 이어서 깔고 그 위에 1.6cm 두께의 회반죽을 발랐고, 또 연도의 바닥에는 자갈돌 위에 목탄을 깔고 그 위에 회를 발라 마무리하였다. 연도폐쇄는 다른 고구려 고분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막돌에 석회를 먹여서 쌓은 것이다. 석실의 서쪽 벽에 붙여서 높이 31.8cm인 관대가 놓여 있다. 상판은 길이가 2.63m, 폭 91cm, 두께는 남쪽이 10.6cm, 북쪽이 7.9cm이다. 특별히 회반죽으로 남쪽에 1.5cm, 북쪽에 3cm 내외로 두께를 더하고, 상면에도 0.45cm 두께로 회를 발라 미장하였다. 다리의 높이는 19.7cm이고, 동쪽에는 세 개지만 서쪽에는 두 개만 확인된다. 석제 다리는 폭 14.5cm이고 사각면을 가진다.
2호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부장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보면 제4호분

4호분은 2호분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져 있고, 서기리에 해당한다. 현존하는 무덤의 높이는 5.06m, 직경은 동서로 22.73m, 남북으로 21.82m이다. 조사 전에 이미 남쪽과 서쪽의 봉토가 깎여나간 상태였지만 전체적으로 평면형은 방대형이다.
석실은 거의 정사각형으로, 북쪽 벽의 폭은 2.95m, 서쪽 벽은 3.27m,이고 천장의 높이는 약 2.73m이다. 네 벽은 높이 1.75m로 위로 갈수록 안으로 기울며, 벽면 위에는 3단의 평행내어쌓기, 2단의 삼각모줄임이 이루어지고 천장석 한 장을 덮은 구조이다.
석실바닥은 분구 정상에서 4.85m 아래에 있고 그 구조는 크고 작은 돌을 깔고, 그 위에 목탄층을 만들고 다시 3cm 두께로 회반죽을 세 번에 걸쳐 발라서 마무리했다. 석실의 동과 서에는 높이 30.3cm인 한 쌍의 관대가 설치되었다. 관대는 화강암에 회반죽을 발라서 만든 것으로 높이는 약 18cm, 폭은 23.64m, 사각의 면이 있는 네 개의 다리가 달렸는데 그 위에 상판을 놓은 구조이다. 서쪽의 판석은 길이가 2.23m, 폭이 93m이고, 동쪽의 것은 그 보다 약간 작다. 두께는 14.5cm이지만 20cm내외인 곳도 있다. 표면과 측면은 모두 회반죽으로 마무리했다.
대보면 제4호분 고분 전경
대보면 제4호분 조사 광경
대보면 제4호분 연도 1
대보면 제4호분 연도 1
대보면 제4호분 현실
대보면 제4호분 천장
남쪽 벽 중앙에 폭이 1.21m, 높이가 1.58m, 폭이 91cm인 현문을 설치했다. 여기에 회반죽으로 표면이 미장된 화강암 석판 두 장을 양쪽으로 세워서 내외를 차단했다. 문은 위아래 모두 회전축이 없는 것으로, 다만 석회를 발라 폐쇄한 것이다. 연도의 길이는 3.26m이고, 현재 남아 있는 천장은 약 2.21m길이인데 천장석 세 개가 확인된다. 연도의 폭은 현문 쪽이 1.56m이지만, 점점 바깥쪽으로 확장되어 묘도에 가까운 쪽은 1.7m에 이른다. 연도의 양 벽은 위쪽이 오히려 넓고 표면에는 회반죽을 깨끗하게 발라 놓았다. 연도의 바닥면은 바깥으로 갈수록 경사져 낮아지는데 현문에서 2.33m까지의 사이는 잔자갈을 깔고 그 위에 목탄과 잔돌을 다시 깔고 회반죽으로 미장하였다. 그 바깥쪽의 연도에는 54.5cm 정도의 폭으로 흙바닥에 회반죽을 직접 발랐다.
연도는 원래 2.73m 정도의 길이인데 굵은 돌에 회반죽을 먹이면서 쌓아 올려 석실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그 보람도 없이, 폐쇄석의 상층은 파괴된 채 반출되었고 문짝은 좌우 두 장 모두 훼손된 상태였다.
연도부 전방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붉은 기와(赤瓦) 파편이 다수 출토되었고, 또 석실 출입구의 안팎에서 뼈와 쇠못, 도금된 동선(銅線)의 단편 등이 발견되었을 뿐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평양의 고구려 고분에서 붉은 기와가 출토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어떤 종류의 기와인지는 약보고서를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

대보면 제5호분

5호분은 제4호분의 서북 60m 지점에 위치한다. 분구는 평면형이 사각형으로 대형인데 동서 직경이 22.5m, 남북 24m, 높이 27m 정도로 남아 있다.
매장주체부의 주축은 남북으로 형성되었다. 현실의 폭은 북벽 2.62m, 동벽 3.21m이다. 벽면의 높이는 171m이다. 벽면 위로 2단의 평행내어쌓기와 2단의 삼각모줄임이 관찰된다. 전체 벽면에는 석회를 발라 마무리한 전형적인 고구려 석실이다.
석실 바닥은 방형의 넓은 판석을 깔아서 배열하고 그 위로 석회를 칠했다. 관대는 높이가 36cm인데 서벽과 동벽에 붙여서 하나씩 배치했다. 서쪽의 관대석은 길이가 2.57m이고 폭이 87cm인데 동쪽의 것은 그것보다 약간 작다. 관대석의 두께는 약 13.5cm인데 상면과 측면에 모두 회를 칠해서 마무리하였다. 관대는 여러 개의 다리로 받쳐진 상태인데 높이가 21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석실의 남벽 중앙에는 폭 1.1m, 길이 96cm, 높이 1.7m의 현문이 설치되었는데 밖으로 가면서 약간 넓어지면서 연도로 통한다.
대보면 제5호분 전경
대보면 고분군 5호 연도
대보면 5호 현실내부
대보면 제5호분 출토 유물
연도는 길이 3.36m, 폭 1.4m인데 묘도부 쪽의 입구는 폭이 넓어져서 1.74m에 이른다. 양 측벽은 편평한 돌들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그 표면을 석회로 발라서 미장하였다. 높이는 2.1m인데 상위로 갈수록 양쪽 벽이 좁아진다. 연도 바닥은 잔돌을 깔았고 그 위에 7.5cm 두께로 석회를 칠해서 굳혔다. 대형의 천장돌을 얹어 두었는데 회를 칠한 곳이 전부 벗겨져 나갔다. 현문에는 폭 7.5cm, 높이 1.935m, 두께 15cm의 화강암으로 만든 두 장의 문짝을 세워 두었다. 연도에는 석회를 바른 돌로 폐쇄한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살핀 것처럼 이 고분은 이미 수차 도굴된 것으로 출토유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연도부 바닥에서는 은두(銀頭)의 쇠못 두 개와 표면에 승문이, 그리고 내면에 포목흔이 있는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사용된 철제 쐐기와 약간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현실내부에는 인골편이 있었고 가로 6cm, 세로 5.1cm 크기의 성격 불명 철금구가 포함되어 있다.
대보면 제5호분 평면도
대보면 제5호분 단면도
대보면 제5호분 전경
대보면 제5호분 서석실 연도
대보면 제5호분 서석실 내부
대보면 제5호분 동석실 연도
대보면 제5호분 동석실 현실
대보면 제5호분 동석실내부 관실
대보면 제5호분 동석실 천장부

대보면 제7호분

제 5호분의 서쪽에 위치한다. 분구의 높이는 남쪽은 7.5m이고 북쪽은 지반이 높아 4.5m이다. 거의 방대형을 이루어 그 직경은 동서 27m, 남북 약 33m로 현재의 분정은 북쪽에 편재한다(약보고서 도면 27-2). 봉토는 부분적으로 깎여나가서 남쪽이 함몰된 상태인데 도굴의 흔적으로 보인다.
조사자들은 벽화의 잔존에 큰 기대를 가지고 조사에 착수했으나 조사 결과 봉토 내에 동서 한 쌍의 석실을 주체로 하는 구조임을 알고 실망감을 나타낸다. 유일하게 두 개의 쇠못을 발견했을 뿐 출토유물도 없었다. 회칠 없이 쌓아 올린 연도 입구를 폐쇄한 돌 중에서 《평양매일신문(平壤每日新聞)》 조각을 발견했는데 기사 중에는 ‘경무국장 국경의 방비’, ‘三年 10월 20일’ 등의 글자가 있었다. 조사 시점보다 십여년 전에 평양에 와서 도굴을 실시한 자가 있었다는 마을 주민의 말을 참고하면 총독부 치하에서 도굴이 이루어진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라서 조사단들은 유감이라고 적고 있다.
약보고서의 보고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고분의 주체가 되는 동·서실은 연도 입구의 미석 중앙에서 4.26m 떨어져 있고 양자를 나열해서 그 석실 바닥면이 분정보다 5.28m 아래에 있다. 두 개의 석실이 분구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분구는 1봉토 2석실로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
동쪽 석실의 현실 크기는 북벽 1.89m, 동벽 2.49m의 사각형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 약 2.49m로 그 중에 네 벽은 높이가 1.53m로 벽의 윗부분이 앞으로 약간 기울어지는 구조이다. 그 위로 평행내어쌓기 1단과 2단의 삼각형 모줄임이 이루어졌고 한 장의 천장석이 덮히면서 마무리 되는 구조이다. 벽면의 미장된 석회면은 누수로 인해 흘러내린 흙물로 얼룩져있다.
석실의 바닥에는 할석 위에 4.5cm 두께의 목탄층이 있고 그 위에 3cm 두께의 석회가 발렸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의 벽에 붙여서 관대를 하나씩 배치했다. 관대의 상면 대석은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서쪽은 길이 2.05m, 폭 78cm, 동쪽은 길이가 조금 길다. 두께는 둘 다 균일하지 않고 10.5cm 내지 4.5cm 사이 이다. 각각의 대석은 다리 네 개로 받쳐진다. 현문은 남벽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달렸는데 폭이 1.01m, 높이가 1.65m인 방형이다. 현문에서 연결되는 연도는 길이 3.81m, 폭은 현문과 같아서 넓고 좁음이 없이 이어진다. 천장은 현문의 천장보다 66cm가량이 높고 석 장의 대석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천장석의 아랫면에는 0.6cm 두께의 회를 칠했는데 대부분 박락되었다. 바닥은 현실과 동일 수평면인데 묘도 부분은 흙벽을 이룬다. 현실의 입구는 원래 세로 1.74m, 폭 0.93m, 두께 6cm 내지 15cm의 판석을 세워서 폐쇄한 것으로 보이는데 발굴당시에는 연도 안에 자빠져 있었다. 연도부를 폐쇄한 돌은 모두 원위치에서 확인되었지만 일부는 연도의 입구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서쪽의 석실은 동쪽의 것에 비하여 현실은 조금 더 좁아서 구조가 간단하고 회칠도 매우 조잡하다. 북벽은 폭 1.34m, 동벽은 길이 2.4m에 불과한 소규모로 천장 높이도 불과 1.95m이다. 높이가 대략 1.35m의 네 벽의 위에 2단의 평행내어쌓기가 이루어지고 그 위로 곧바로 천장석이 얹힌 구조이다. 바닥은 동실(東室)과 같은 구조이다. 실의 중앙에 한 개의 관대를 안치하였는데 대석은 사방 102cm이고 높이는 15cm 전후이다. 네모난 돌로 된 다리 네 개 위에 폭 76.5cm, 길이 1.98m, 두께 9cm 전후의 1매석을 얹어서 만든 것이다. 관대석의 측면에도 회를 칠했다.
현실의 입구는 남벽 중앙에 달렸는데 폭 63cm, 높이 1.38m로 틈이 있다.
연도는 길이 3.3m, 벽의 높이는 1.47m로 사방 벽에 회를 칠했다. 폭은 현실의 입구와 동일하고 바깥쪽 단은 1.05m이고 석 장의 판석을 천장에 덮은 다음 회를 칠했으나 이것도 박락되었다.
바닥은 특별한 가공없이 땅을 고른 것에 불과하다. 현문에 설치된 문짝은 세로 1.5m, 가로 88.5cm, 두께 10.5cm의 한 장의 돌로서 연도 내에 쓰러져 있다. 출토유물은 동실 내에서 두 개의 쇠못이 출토된 이외에는 없었다.
조사단은 당초 조사목표로 했던 벽화 고분의 발굴은 고산리 9호에서 흔적만 발견하는 정도에 그쳐 강서삼묘에서 가까운 대보면 고분군은 당초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여 전혀 수확이 없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는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의 고구려 고분 조사가 단순히 벽화 고분 발견이라는 철저한 성과주의에 바탕하여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부분이다.
조사결과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되어 토기편이나 철기편 일부가 발견되는 정도에 그쳐 전반적으로 조사성과가 불량하다고 표현한 사실은 고구려 고분 발굴의 두 번째 조사목적이 주목을 끌 만한 유물의 발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보고문을 쓴 오바 쓰네키치는 이러한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고분의 군집지 중의 하나인 고산리 고분군의 특징이 드러난 점, 그리고 지점을 달리하는 대보면 고분군과 비교 가능한 자료가 확보된 점에 의의를 두고 있다. 아울러 석회가 미장되어 벽화를 그려도 될 것 같은 고분에 대부분 벽화가 없었다는 것은 고구려 고분에서 벽화라는 것이 아주 특수한 사례라는 의미로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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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면 고분군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