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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산리 고분군 조사

고산리 제3호분

이 고분은 전년도에 외형조사가 이루어졌던 고분으로 오바와 사와가 추가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는 매장주체부를 찾기 위해서 상부의 적석을 모두 제거하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하였다. 그 결과 3호분은 전혀 성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방대형의 순수한 적석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직경은 동서 6.36m, 남북 7.12m, 높이 1.75m이다. 적석은 대개 정상부에서 15~18cm의 돌과 6~9cm 크기의 돌을 섞었는데 중복부에 이르러서는 21~24cm 크기가 되고 기저에 가까워지자 30~60cm 크기의 석재가 섞여 있었다. 조사결과 정상에서 깊이 1.12m에 이르기까지 전혀 흙을 섞지 않았고 9~12cm 크기의 돌을 겹쳐 쌓았다. 그 중에서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벽돌 2점을 채집하였다.
조사결과 3호분은 조사 당시 경작되고 있던 밭면에서 곧바로 쌓아 올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지상식인 것이다. 매장주체부로써 석곽의 형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기부 가까이에 산재하는 다수의 대석을 통해 보아 당초에는 기단을 가진 적석총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는 정도에서 조사가 마무리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사단은 원래 석곽이 설치된 기단식 적석총이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면서 중요한 석재들은 현지인들이 재이용하였으며, 주변에 밭이 경작되면서 주민들이 주변으로 흩어진 돌들을 다시 모아 둔 것으로 결론내렸다.
고산리 3호분(1937년 조사)

고산리 제4호분

오바 쓰네키치와 사와가 조사한 토석혼축묘이다. 고구려 고분에 토석혼축묘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된 것인데 조사기간은 8일이었다.
기저는 거의 방대형을 띠는 것으로 동서가 4.85m, 남북이 6.06m, 높이가 1.33m에 지나지 않은 소형고분이다. 조사 전 표면에 크고 작은 석재가 노출되어 있었는데, 특히 서쪽을 제외한 3방에는 분구에 2단의 기단을 두른 듯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조사는 분정에서 돌을 순차적으로 치우면서 토사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 81cm 지점에 도달하여 석곽의 바닥면에 도착하였다. 4벽의 하부 시설도 곳곳에서 부분적으로 검출되었다.
석실은 횡으로 연도가 설치된 것으로 현실의 4벽은 크고 작은 석재를 겹쳐 쌓아서 만들고 그 내면에 석회칠을 한 것이다. 잔존하는 석실 바닥은 60cm 정도에 지나지 않아 원래의 높이를 알 수 없다. 석실은 동서 2.06m, 2.94m의 직사각형인데, 남벽의 서쪽에 붙여 폭 1.06m 크기의 입구
흔적이 남아 있다. 석실 바닥면은 주위 경작지보다 45cm정도 높은 곳에 있는데, 정지된 흙 위에 15cm 내외의 자갈을 평평하게 깔아 두었는데 일반적인 고구려 고분 석실 바닥과는 차이가 있다. 보고자는 여기에 석회를 발랐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으나 약보고서에 실린 사진으로 보아 석회가 발렸던 흔적은 관찰되지 않는다.
묘실 바닥의 남북모서리에서 두개골 편이 발견되었으며 손발과 관련되는 뼈와 파편이 동측에서 출토되었다. 쇠못도 같은 방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자갈 위에 목관을 안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앙부 남벽 가까이에서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구연부와 동체부가 파손된 것이다. 동체에는 3조의 횡선이 어깨와 동최대경이 있는 복부, 그리고 저부 가까이서 확인된다.
조사자는 이 고분이 원래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매장주체부가 설치된 봉토분으로 판단했다. 축조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봉토가 유실되어 석실 외곽이 드러나 마치 기단식 고분처럼 보였던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주위에 이와 유사한 잔존상태를 남기는 고분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거의가 같은 맥락의 고분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고산리 제4호분 분구외형
고산리 제4호분 잔존 시상대
고산리 제4호분 토기

고산리 제5호분

고산리 제5호는 3호분의 북쪽에 있다. 3호분과 마찬가지로 당시 경작되던 밭 가운데에 있던 것으로 고분군 중에서는 중형 정도에 해당한다. 분구는 동서 8~9m인 거의 방대형의 형태인데 높이는 약 1.82m에 이른다. 이 고분도 봉토의 곳곳에서 대소의 석재가 관찰되었다. 어떤 석재는 열을 지어 있고 어떤 석재는 분구의 호석과 같은 것도 있으며 돌기단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조사 결과 석재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내부에 있던 매장주체부의 석재들이 외부 봉토의 유실로 인해 드러난 것으로 조사단은 판단했다.
매장주체부는 현실과 연도로 구성되는 단실분이다. 석실은 가공되지 않은 할석을 쌓아 올려 만든 간단한 구조이다. 석실 평면형은 직사각형인데 잔존하는 북벽의 길이는 1.45m 남벽은 1.64m, 서벽은 2.30m이다. 석실벽의 높이는 바닥에서 1.36m 정도이다. 현문에 커다란 미석(楣石)이 올려져 있지만 현실의 천장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남벽에는 동쪽으로 부쳐(우편재) 연도를 만들었는데 폭이 79cm, 높이가 91cm 정도, 길이는 1m내외이다. 석실의 바닥에는 먼저 24~27cm 정도의 돌을 깐 다음, 그 위에 잔돌을 정연하게 깔아서 마무리했다. 보고자는 4벽과 천장에 석회 미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조사과정에서 흔적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비교적 짧게 만들어진 연도은 크고 작은 돌을 쌓아서 폐쇄했으나 크게 교란된 상태였다. 폐쇄 판석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문짝에 달리는 철환이 발견되어 원래는 설치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실 바닥에서는 쇠못 10여 개가 발견되어 목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으나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보고자는 현재 잔존하는 봉분의 높이가 고구려식의 모줄임천장을 가진 석실을 품기에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원래는 대형분구였던 것이 봉토의 토사가 유실되어 높이가 낮아진 것으로 결론내렸다. 그러나 약보고서에 실린 석실의 사진을 관찰하면 남벽의 서쪽 모서리에 대형 판석이 걸쳐 있다. 천장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판석조 천장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고산리 제5호분 분구 외형
고산리 제5호분 동쪽 상면에서 본 석실 내부

고산리 제6호분

고산리 2호분의 남쪽에 위치하는 봉토분인데 직경은 15.5m이고 높이 2.6m 정도의 규모이며 봉분에 깊이 90cm 정도의 도굴갱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의 노인이 예전에 고분 속에서 벽화를 보았다고 하여 발굴분으로 선정하였으나, 조사 결과 벽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구조도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조사는 평판을 분구 정상부에 설치하여 분구도면을 작성한 다음 굴착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천장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4벽만 남은 모습을 확인하였는데, 모줄임석과 천장석으로 보이는 거석들이 석실내부로 추락하여 뒤엉켜 있었다. 연도에 걸쳐둔 천장석도 두 장 중에서 한 장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으며, 현문 천장의 미석은 파괴되어 추락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사진으로 보아 연도부의 미석은 천장석과 동일한 높이에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석실내부로 추락한 석재는 두꺼운 삼각형을 띠는 것도 보이지만 충분하게 가공된 것은 없다. 아마 회칠을 두껍게 하여 마무리 미장으로 벽면을 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약보고서의 사진에는 4벽과 연도부 천장석 일부에 두껍게 발린 석회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석실의 장축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35도 정도 틀어져서 위치한다. 현실은 북벽의 길이가 약 2.5m이고 서벽의 길이는 2.7m 정도이다. 잔존하는 현실벽의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1.36m이다. 현실 바닥에는 큰 돌을 깔고 그 위에 잔자갈을 깔아서 편 다음 석회를 발라서 마무리했다.
남벽의 중앙에는 폭이 94cm인 현문이 달렸다. 현문의 길이(높이)는 91cm 정도인데 두 장의 돌문(판석)을 세워서 연도와의 경계로 삼았다. 석비는 폭이 55cm, 길이 1.52cm, 두께는 10.6cm 현문과의 접합부 표면에 석회가 발려져 있다. 연도는 그 폭이 현문보다 넓고 높이는 약 1.7m, 길이는 2.73m 정도이다. 30.3m 전후의 돌과 석회로 전체를 채우고 그 안에 석비를 폐쇄한 본래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었다.
현실내부의 퇴적토를 치우는 과정에서 네모진 머리의 쇠못과 철제 물미가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금동제 금구가 3~4개 출토되었다고 하나 도면과 사진이 없어 형태를 알 수 없다.
고산리 제6호분 분구외형
고산리 제6호분 현실 내부와 연도
고산리 제6호분 출토품

고산리 제7호분

고산리 7호분은 1호분의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고분이다. 인접하는 8호분과 함께 ‘品’자의 형태를 띠면서 인근에 위치하는 고분 중 단연 두드러지는 크기이다. 분구는 방대형인데 직경은 동서가 17.58m, 남북이 18.48m인데 그 높이는 3.64m 달한다. 조사 당시 봉분의 정상은 평탄면을 이루고 있었는데 몇 개의 대형 석재가 봉토 밖으로 노출되어 이미 도굴된 고분임을 알 수 있었다.
고분의 장축은 정남(正南)에서 서쪽으로 약 22도 정도 돌아간 형태인데 현실과 전실, 그리고 좌우에 측실을 갖추었고 긴 연도가 달린 제법 복잡한 구조의 고분이다.
현실의 넓이는 동벽이 3.52m, 북벽이 3.59m이어 거의 사각형에 가깝다. 4벽은 윗부분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지는 형태인데 그 높이는 2.47m이고 회칠 미장은 그 상반이 박락되어 벽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상태이다. 석실내부로 붕락(崩落)된 석재를 살피면 일반 벽석과는 달리 긴 석재들이 여러 매 관찰된다. 이는 아마도 평행 내어쌓기에 사용된 석재일 것이다. 이와 유사한 석재를 사용하여 벽 상부에 2단의 모줄임이 관찰되는데 최하단의 일부와 제2단에서 석재 1매만이 원래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현문은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폭이 1.08m 5분, 길이 8.79cm, 높이는 약 1.52m인데 전실과 서로 연결된 구조이다. 전실은 동서가 1.33m, 남북이 2.18m이다. 벽의 상위에 1단의 평행 내어쌓기가 인정되며 그 위에 석회를 바른 천장석이 덮인 구조이다. 천장 높이는 약 1.94m이고 무게 때문에 남북이 침하하여 심하게 파괴되었다.
전실에는 동서 양쪽에 각 하나씩의 측실이 달려 있다. 전실과 측실의 연결통로(甬道)는 65cm, 높이가 89cm 크기이다. 동쪽의 측실은 동벽의 길이가 1.21m이고 남벽의 폭이 1.09m인데 높이는 1.73m 정도로 소형이다. 상반부에는 1단의 평행 내어쌓기가 이루어지고 그 위에 두 번의 삼각모줄임이 관찰된다. 반면 서쪽의 측실은 1단의 평행 내어쌓기를 하고 그 위에 우진각으로 천장을 마무리한 특이한 구조이다. 서측실은 동벽 길이가 1.21m고 남북 폭이 94cm인 직사각형 구조이다.
양 측실은 4벽과 천장 모두를 석회로 깨끗하게 미장한 구조이다.
전실의 현문은 남쪽으로 달렸는데 폭은 약 91cm, 높이는 1.48m, 길이는 1.18m이다. 비교적 대형의 미석이 현문의 천장을 이루는데 그 아래로 문틀시설을 만들어 두었음이 사진을 통해서 관찰된다. 이 부위에는 원래 두 장의 판석을 기대어 두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동쪽의 판석은 없어지고 서쪽의 판석도 상부 절반이 없어진 상태이다. 즉 도굴과정에서 파괴된 것이다.
고산리 제7호분 1937년 실측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 1937년도 조사 『昭和十二年度 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이하동일
고산리 제7호분 1967년 실측도(북한 학계에서 작성)
고산리 제7호분 분구 외형
고산리 제7호분 남서쪽에서 본 현실 내부
고산리 제7호분 현실 내에서 본 연도
고산리 제7호분 전실 서쪽의 이실 입구
고산리 제7호분 출토품 일괄
연도부는 길이가 2.42m, 높이가 1.64m, 폭이 1.06m인데 묘도로 향하면서 약간 넓어지는 형태이다. 양 측벽의 회칠은 박락이 심하며 연도부 천장석은 지금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연도부 폐쇄는 굵은 돌을 석회에 섞어서 쌓아 둔 것으로 판단되는데 대개 파괴되고 십수 개만이 바닥에 남아 있다. 현실과 전실, 연도의 바닥면은 약간의 고저차가 있다. 현문에 폐쇄석을 설치하는 곳은 문턱이 한 단 높게 설치되어 있다. 바닥면은 흙면을 다진 정도로 특별한 가공흔은 관찰되지 않는다.
조사단은 이실묘에 측실이 달린 고분이라 벽화가 발견될 것으로 생각하고 발굴에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약보고서에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은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에서는 금도금한 작은 못 1점이 출토되었다. 회색의 전돌편 3점이 현실과 동측실에서 발견되었고, 쇠못과 금동영락 두 개가 각각 현실과 연도에서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연도에서는 금동제의 금구와 철촉이 발견되었으며 토기편도 여러편이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토기편 중에서는 파수와 구연부, 저부가 포함된다. 그 중에는 구연과 저부가 토포리 대총에서 출토된 황유 파병과 유사한 것이 있다.
고산리 7호분은 광복 후 북한 고고학계에서 재발굴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묘도로 이어지는 연도부의 형태가 좀 더 분명해졌으며, 매장주체부의 도면이 작성된 점이 주목된다.

고산리 제8호분

벽화가 발견된 고산리 제1호의 동쪽에 위치하는 고분인데 대형분이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동서 19.7m, 남북 23.33m, 높이가 3.63m이다. 분정은 넓은 평탄면을 이루며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사 전에 이미 봉토에 드러난 대석을 근거로 천장석이 석실내부로 붕락된 단실분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예측은 빗나가서 봉토 안에 두 개의 매장주체부가 나란히 설치된 특이한 구조였다. 두 개의 석실은 정면에서 약 25도 서쪽으로 틀어서 연도를 만들었는데 석실 바닥은 주위의 밭면과 동일 수평면을 이루고 있었다. 동쪽에 위치하는 석실은 동벽의 길이 3.03m, 북벽 2.45m이다. 4벽에는 두껍게 석회 미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상태는 완전하다. 높이는 2.1m이고 위로 갈수록 벽면이 안으로 기운다. 상부의 모줄임 부는 평형 내어쌓기를 위해 얹혀진 돌들이 부분적으로 2단이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현실내부로 낙하해 있는 돌들로 보아 삼각모줄임도 이루어진 고구려 특유의 천장구조를 가진 고분이라 추측된다.
현실바닥은 지면을 다진 다음 3cm 정도의 석회를 깔아 마무리했으나 조사시에는 거의 박락되어 있었다. 동서 양벽에 붙여서 한 쌍의 관대가 있는데 대개 작은 돌을 모아서 석회를 발라서 마무리한 것이다. 서쪽 관대는 폭 94cm이고 길이는 2.25m이며 높이는 18cm이다. 동쪽 관대는 서쪽의 그것보다 약간 작은 규모이다. 남벽 중앙에는 폭 83cm, 높이 1.24m의 현문이 달려 있다. 그 길이는 70cm인데 밖으로 가면서 넓어지고 높아진다. 입구부는 97cm과 1.33m이다. 현문에는 폭이 좁은 두 장의 판석으로 막았다. 판석은 조사당시 연도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도굴에 의한 결과로 추측된다. 연도는 폭 1.14m, 높이는 1.55m이며 두 장의 천장석을 덮었다. 길이는 91cm에 지나지 않지만 밖으로 가면서 넓어진다. 연도의 입구에도 원래 폐쇄 판석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연도부를 막았던 폐쇄석은 바닥에 그 흔적만 남기고 현실과 연도부의 바닥은 거의 수평을 이룬다.
서쪽의 석실은 소규모이며 거칠게 쌓았다. 동쪽 현실의 서벽에서 2.12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서실의 동벽이 있다. 크기는 2.7m 북벽은 2.21m, 북벽의 높이는 1.64m인데 그 위에 6단의 평행내어쌓기가 있고 동서 양벽은 높이가 각 1.94m이지만 그 위에 5단의 평행내어쌓기가 관찰된다. 그 위의 천장은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삼각형 모줄임은 없었던 것으로 조사자들은 판단하였다. 동서 양벽에 붙여서 각 한 개의 관대가 있는데 이는 동실의 것과 같은 형태의 것이다.
남벽의 중앙에는 현문이 설치되었는데 현문 안은 폭이 78cm이고 길이는 70cm, 높이는 1.33m인데 그 위에 미석을 걸쳐 놓았다. 입구부의 폐쇄는 현문의 바깥에 두 장의 판석을 세워서 석회로 굳힌 것이다. 그 상방은 도굴로 파괴되었으며 앞으로 쓰러진 채 누워 있다.
연도는 길이 2.03m이고 크고 작은 돌들을 채워서 폐쇄하였다. 폭 1.09m로 밖으로 가면서 약간 넓어진다. 양벽의 석회는 박락되어 밑으로 떨어져 있고 천장은 유실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분구로는 석실을 포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구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내부에서는 동실에서 쇠못과 은두 쇠못, 서실에서 쇠못과 금동금구, 금동영락 등이 출토되었다. 연도에서도 쇠못이 출토되었다. 출토지점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토기의 구연부 편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아 평행내어쌓기의 방법을 이해하는데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는 고분이다.
고산리 제8호분 분구 외형
고산리 제8호분 동서 양석실 조사 광경
고산리 제8호분 동석실 정면
고산리 제8호분 서석실 정면
고산리 제8호분 서석실 현실과 연도
고산리 제8호분 동석실 현실 북벽과 관대의 일부
고산리 제8호분 출토유물(금구 및 환좌)

고산리 제9호분

고산리 9호분은 1937년의 조사에서 유일하게 벽화가 발견된 고분이다. 위에서 설명한 고분군에서 남쪽으로 700m 정도 떨어져 고립되어 있었다.
분구는 원래 형태를 크게 잃고 있지만 대체로 방대형을 띠는 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분구는 동서와 남북이 직경 약 25.76m이고 높이는 약 4.55m인데 규모가 크다. 고분의 정상부는 삭평되어 넓은 평탄면을 이룬다. 매장주체부는 분구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측실이 딸린 횡혈식(보고자는 횡구식)의 구조이다.
현실은 서벽 폭이 3.52m이고 북벽은 3.39m인 사각형에 가까운 평면형이다. 모줄임석은 이미 유실되었고 4벽의 상부도 유실되었다. 현실은 상부로 가면서 안으로 약간 기운 구조이다. 남벽 중앙에는 폭 1.08m의 현문이 길이가 2.85m인 통로[甬道]가 연결된다. 동서벽에는 각각 폭 76cm전후의 용도로 연결되는 측실을 두었다. 동쪽 측실은 크기가 서벽의 길이가 1.27m이고 남벽의 폭은 1.14m이고 서쪽 측실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이들 벽은 거의 상반이 파괴되어 잔존 높이는 91cm정도이다.
연도는 폭이 1.38m이고 길이는 1.21m이다. 모든 문에서 폐쇄 석비나 판석은 확인되지 않으며 연도바깥에도 폐쇄에 사용된 듯한 약간의 석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벽에는 두껍게 석회 미장이 이루어졌다. 벽화는 현실의 네 모서리에 붉은색의 기둥을 그리고 바닥에도 가로질러 횡선을 그려 놓았다. 그 위에 사신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림의 형태는 1936년에 확인된 고산리 제1호분과 유사하다고 조사단은 판단하였다. 또한 조사단은 노산리 개마총과 비교하여 지역적인 색채가 농후하다고 판단하였다. 4벽 모두 석회벽면의 보존상태가 극히 불량해서 붉은색의 기둥은 확인되나 벽화는 희미하게 보이는 상태였다. 백호의 동체부와 다리에 해당하는 묵선과 황색의 흔적을 보일 뿐이었다. 다면 동벽에 그려진 청룡은 보존 상태가 그나마 양호하여 청룡의 가슴과 다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묵선과 황색으로 그려진 것이 관찰되었다. 남벽의 좌우벽에는 원래 주작이 그려졌을 것이나 동쪽의 것은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서쪽의 것도 다리의 일부와 깃털의 일부가 관찰될 따름이었다. 서쪽 측실에는 벽화의 흔적이 거의 없지만 동쪽 측실에는 동남 두 벽에 황색의 기둥과 토대를 그려 두고 중간에 굵은 묵선(墨線)으로 무엇인가를 그린 흔적이 있다.
고분에서는 연도에서 금동제 요금구가 발견되었고 각종 쇠못과 당초문 금동금구와 금동제 영락 등이 측실과 현실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산반상의 구슬과 어망추가 현실에서 발견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산리 제9호분 실측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고산리 제9호분 실측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고산리 제9호분 고분 원경
고산리 제9호분 고분 근경 1
고산리 제9호분 고분 근경 2
고산리 제9호분 북서쪽에서 본 석실 잔존 상태
고산리 제9호분 정면에서 본 석실 잔존 상태
고산리 제9호분 동남벽 일부
고산리 제9호분 동벽 벽화
고산리 제9호분 출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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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 고분군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