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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산리 고분 조사

고산리 제1호분

고산리 북방에는 무수한 고분이 위치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고분 3기를 골라서 발굴하였다.
봉토는 방대형으로 조사 당시 직경이 20m에 이르고 남쪽에서 보아 높이가 3.5m에 이르렀다. 분구의 정상은 약간 넓은 평탄면을 이루고 있었는데 조사 전에 이미 석실 천장이 붕괴된 것으로 추측되었다. 10월 7일에 발굴작업을 개시하여 남측 연도의 입구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것처럼 이미 현실의 천장은 파괴되어 토사가 충만한 상태였다. 그래서 현실 상부에서 조사를 시작하였다. 토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벽화 파편이 발견되어 벽화의 존재가 예상되었는데, 동벽에서 청룡이 발견되고 다른 사벽에서도 나머지 사신이 발견되었다.
벽화가 유존하는 현실은 네 벽과 바닥에도 석회를 발랐는데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동서 폭 3.6m, 남북 길이가 3.3m에 이르렀다. 천장부의 모줄임부는 완전히 붕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4벽의 상반도 파괴되어 높이 약 1.5m 정도만이 남은 상태였다. 현실의 바닥은 바닥흙을 두드려서 굳힌 다음 두께 16cm 정도로 숯과 석회를 번갈아 가면서 깔아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벽의 중심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서 연도가 달렸는데 문지방과 문미석이 남아 있다. 원래 연도부 천장보다 문미석이 낮게 설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모두 파괴되었다. 문지방은 연도나 현실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졌는데, 양쪽 가장자리에는 문확(장부구멍)이 설치되었다. 원래 쌍여닫이 돌문이 달려 있었을 것이나 조사 당시에는 연도 쪽을 바라보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연도는 바닥이 묘도 쪽으로 가면서 낮아지는 구조인데 길이 2.76m, 폭 1.30m, 높이 약 1.55m이다. 연도부의 중간지점에서 연문까지는 석회를 발라서 쌓아둔 폐쇄석 무더기가 있는데 도굴되는 과정에서 그 상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고산리 1호 주변 고분 배치도(검은색은 석총이고 나머지는 토총)
고산리 고분군 전경 1
고산리 고분군 전경 2
고산리 1호분 실측도
고산리 1호분 실측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고산리 1호분 분구외형
고산리 1호분 연도 앞쪽 조사 모습
고산리 1호분 현실 남서벽과 내부에서 본 연도
고산리 1호분 현실 남동벽과 내부에서 본 연도
고산리 1호분 연도 동벽 벽화
고산리 1호분 동벽 벽화-청룡
고산리 1호분 동벽 벽화 세부
고산리 1호분 동벽 문자
고산리 1호분 서벽 벽화-백호
고산리 1호분 서벽 문자
고산리 1호분 바닥에서 출토된 벽화 잔편 1
고산리 1호분 바닥에서 출토된 벽화 잔편 2
고산리 1호분 부장 철기 (앞)
고산리 1호분 부장 철기 (뒤)
고산리 1호분 출토품 일괄
현문 쪽의 연도에 공간을 마련한 것은 폐쇄석을 완전히 치우지 않고도 현문을 개폐(開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으로는 드물게 묘도부가 잘 남아 있는데 연도부에 비해서 폭이 훨씬 넓어지는 특징이 있다. 연문은 상위로 갈수록 현실쪽으로 기울어진다. 연도와 묘도의 좌우벽은 막돌로 쌓아올리고 표면을 석회로 미장한 것이다.
잘 바른 회벽 위에 사신도를 그렸지만 청룡, 백호, 현무의 일부분만 확인되었다. 동벽에는 청룡이 묵서로 쓰여 있고, 서벽에는 백호와 백신(白神)으로 시작되는 묵서가 있다. 백신의 중간에 해당하는 구획선 바깥에는 ‘호(虎)’자를 써 두었다. 어깨에는 깃털이 표현되었다. 현무는 북벽에 그려졌는데, 화염보주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남벽에는 수문장이 그려져 있고 각 벽에는 건축의장과 불꽃무늬가 남아 있다. 이는 생활풍속계 벽화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서 조사자는 이를 사신도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식으로 이해하였다.
고산리 1호의 조사와 도면작성, 그리고 보고문의 작성은 오바 쓰네키치가 담당하였다.

고산리 제2호분

고산리 2호분은 1호분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져 위치한 비교적 규모가 큰 적석총(보고자는 석총)이다. 동서 직경은 15.5m이고 남북은 약간 긴데 약 19.10m 정도이다. 평면형은 사각형에 가까운데 주연은 기저에서 1.4m 높이이다. 중앙부는 움푹 패여져 깊은 곳이 1m 정도의 분화구와 같은 형태인데 보고자는 이를 석실이 파괴된 흔적이라 하였다. 적석 사이에는 기단 혹은 석곽의 소재였을 것으로 보이는 1m를 전후한 대석 10여 개가 흩어져 있지만 나머지 석재는 대개 30cm 내외의 것이라서 내부구조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분의 현지조사와 보고문의 작성은 오바 쓰네키치가 담당하였으며 보고서에 실린 사진은 사와 슌이치가 촬영했다.

고산리 제3호

고산리 제3호분은 제2호분의 북방 30m 정도에 위치하는 고분이다. 2호에 비해서 작지만 중앙에 움푹 패인 곳이 없고 거의 방대형의 석축 분구를 남긴다. 분구에서 대석(大石)이 확인되지만 내부에 석곽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36년에 이루어진 현장조사와 보고문의 작성은 오바 쓰네키치가 담당하였으며 보고서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사와 슌이치가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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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 고분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3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