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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호남리 고분군 조사

호남리 제1호분

호남리 고분군은 남경리 고분군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1916년에 이미 세키노조사단이 사신총을 골라 조사한 바 있다(정인성, 2009). 사신총이 포함된 호남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그 서쪽과 전방 평지에도 별도의 고분군이 있으나 당시 서쪽의 고분군은 파괴가 심한 상태인 반면 남쪽 평야의 고분군은 비교적 대형이면서 외관상 보존상태도 양호하였기에 이를 발굴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조사는 1936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분구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먼저 조사된 호남리 1호분은 분구의 높이가 약 4m이고 직경은 동서·남북 각 20m에 이르는 대형이었다. 발굴은 앞에서 살핀 고분과 마찬가지로 봉분의 남쪽을 굴착하여 연도부 천장을 찾은 다음 천장석의 일부를 제거하고 현실로 침투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고고학에서 구사하는 발굴법이라면 봉분조사를 실시하고 연도 입구를 찾아서 현실로 진입하는 방법이 선택되었겠지만, 벽화 고분을 찾는 것이 목적인 발굴이었으므로 굴착에 드는 품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였다. 물론 분구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석실내부 조사만이 진행되었다.
호남리 고분군 분포도
호남리 제1호분 실측도 1
호남리 제1호분 실측도 2
호남리 제1호분 토기편
호남리 제1호분 연도
호남리 제1호분 현실
호남리 제1호분 관청
조사결과 고분은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분임이 드러났는데 동서 길이가 약 2.5m이고 남북 길이가 3.13m에 이르는 장방형의 구조였다. 현실의 4벽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짜 맞추었는데 벽면에는 1cm 정도 두께의 석회가 발려 있었다. 벽의 높이는 약 1.6m이고 그 위로는 두 번에 걸친 평행 내어쌓기와 삼각모줄임이 연속되었다. 4각형의 천장에서 현실 바닥은 2.7m에 이른다.
현실내부의 시상은 흙을 다진 위에 작은 돌을 깔고 그 위에 목탄을 깔고 마지막으로 석회로 마무리하였다. 돌문은 파괴되었다. 현실내부에는 관대 부재인지 돌문 파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면이 조정된 석재편들이 인골과 쇠못들과 혼재되어 있었다.
연도는 폭이 약 1.23m이고, 높이는 1.9m 크기이다. 연도 양 측벽은 자연석을 쌓아서 축조하였으며 천장에 2매의 큰 천장석을 올려 놓고 그 아래에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연도 바닥은 현실과 똑같이 자갈과 숯, 석회를 번갈아 깔아서 다졌다. 문미석은 연도부 천장보다 약간 낮게 설치되었으며 현문이 연도보다 폭이 좁게 만들어져 양쪽으로 문주(門柱)가 설치된 효과를 내었다. 문턱은 없지만 현문 바깥 바닥에는 장축과 직교하게 길게 홈을 파 여기에 가공된 판석을 끼우고 문미석에 기대어 현실을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상부가 현실 쪽으로 기울어진 폐쇄석의 바깥을 굵은 막돌에 석회를 섞으면서 쌓아 놓았는데 그 상부가 비어 있는 이유는 도굴자의 침입에 기인한다고 조사자는 해석하였다.
연도부의 바닥은 묘도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고 폭도 조금씩 넓어진다. 연도부 천장과 문미석의 단에는 석회가 두껍게 발려 있었음이 제시된 도면에 뚜렷이 표현되어 있다. 묘도부 가까이에 접근해서는 연도벽과 천장석이 크게 파괴되어 원형을 파악할 수 없다.
현실에서는 그다지 주목되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둥근 쇠못이 8개, 민머리에 가까운 쇠못이 3개 출토되었다. 도금된 영락편이 발견되었고 주칠편이 조선시대의 자기편과 같이 출토되었다. 또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구연이 넓고 어깨에 동최대경(胴最大徑)이 있는 것으로 횡으로 희미하지만 마연흔이 관찰된다.

호남리 제2호분

1호분 조사가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연접하는 2호분을 굴착한 것으로 확인된다. 2호분은 현실(玄室)의 동서(東西) 길이가 약 2.5m, 남북 2.94m 규모의 단실묘이다. 1호와 마찬가지로 모든 벽면과 천장에 석회가 두껍게 발려 있었으나 벽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천장부는 3번의 평행 내어쌓기를 한 다음 다시 3번의 삼각모줄임을 하고 그 위에 천장석을 덮은 구조임이 밝혀졌다. 남벽의 입구에 큰 돌이 붕락되어 있어 더 이상의 조사가 어려웠으며 도면을 작성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호남리 제3호분

호남리 제3호분은 사신총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평지고분의 가까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고분은 파괴가 심한 고분이나 토포리 1호와 마찬가지로 판석으로 상자를 짠 것 같이 특이한 현실구조여서 조사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분구는 직경이 동서 10m, 남북 12m에 이르는 방대형으로 조사 당시 높이는 3.5m 정도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온돌용으로 석재를 가져가는 바람에 부분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석실의 전체 길이는 약 4.5m이고 그 중 현실의 길이는 약 2.5m이다. 폭은 현실이 1.3m 전후이고 연도 입구가 1.45m로, 토포리 1호와 마찬가지로 현실보다 연도부의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현실의 좌우벽과 바닥 그리고 후벽에는 두께 평균 15cm 정도인 1매석을 가공하여 조립하였는데 상자와 같은 형태이다. 그 높이는 1.33m이다. 현실에 추락된 석재로 보아 원래 천장에는 가공된 판석 2장을 덮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석실의 외측에는 석회로 굳혀가면서 할석을 쌓았는데 부분적으로 석회만으로 굳힌 부분도 있다. 연도는 할석을 쌓아 벽으로 삼고 그 위로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현실과의 경계에 해당하는 좌우 판석에는 홈이 관찰되기 때문에 폐쇄 판석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석재 역시 토포리 1호와 마찬가지로 화강암임이 밝혀졌다.
호남리 제3호분 조사광경
조사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 고분과 기존 고구려 고분의 차이를 강조했다. 석실의 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이 아니고 장축방향으로 긴 상자 모양으로 생긴 점, 평천장이라는 점, 현실 각 벽이 가공된 1매석으로 제작된 점, 연도가 현실보다 크고 높은 점 등이 그것이다. 조사자들은 이 고분을 부여 능산리형 석실과 유사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 고분의 원고는 오바 쓰네키치가 총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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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리 고분군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