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세키노조사단의 조사

1917년에는 1916년과 같이 고구려 유적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조사단의 일원이 1916년에 이어 순천군을 다시 답사하면서 몇 기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한 사실이 확인된다. 앞에서 이미 살핀 것처럼 1916년에 모사도를 작성할 수 없었던 순천군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실측조사가 오바 쓰네키치에 의해 1917년에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오바 일행이 일부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1917년에 세키노조사단이 실시한 압록강 양안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선소면 용암리 제2호분

선소면 용암리 고분은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도면 1장만이 게재되어 있기 때문에 조사내용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자료를 찾던 중 도쿄대학교 건축학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는 ‘세키노컬렉션’에 선소면 고분의 조사일지를 발견했다. 조사일지에는 1917년 6월 2일에 순천읍 남면 1리 용암리 고분이 조사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필체로 보아 세키노가 작성한 것이 아니고 오가와 게이키치의 것으로 판단된다.
1917년 6월 2일
순천읍의 남쪽 약 1리에 용암리의 대동강에 면한 대지의 소평지에 고분군이 있다. 모두 토분인데 높은 곳에 있는 분에는 석곽을 가진 대분이 있는데 도굴의 화를 당한 것이다. 평지에 산재하는 작은 것은 소형분으로 봉토 위에는 할석을 덮은 것이다. 그 가운데 2기를 조사하였는데 대분을 1호라고 하고 다른 것을 2호라고 이름지었다. 제1호분은 석곽의 실측에 머무르고 제2호분은 발굴조사를 하기로 했다. 외형의 실측을 마치고 남쪽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6월 3일에서 7일에 이른다.
발굴 결과 연도와 같은 것이 없었다. (작업방침을) 변경해서 분정에서 파 내려가기를 424cm지점에 목제가 부식한 것으로 생각되는 흔적(폭 152cm, 길이 212cm 정도)이 있었는데 조사를 계속하여도 어떠한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목곽인지 아니면 목관과 같은 흔적이 있었다.
6월 8일에서 12일에 걸쳐 제2호분을 다시 복원시키고 북창면 북창리 (고분)을 견학하였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은 총 52명이다.
 
圖 168_용암리 고분 실측도
圖 169_순천군 선소면 용암리 고분 조사시의 야장(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즉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려 있는 용암리 고분은 용암리 2호인 것이다. 고분의 실측도에는 구지표 아래에서 검은 점토층이 발견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아래의 생토층에 해당하는 모래층에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평면도에는 점선으로 매장주체부를 표시하고 있으나 위에서 본 것처럼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지 않은 용암리 제2호분은 구조상 고구려 고분이라 특정할 수 없다. 분위기로는 낙랑시기의 목곽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봉분의 표면에 돌들이 덮인 점이 어색하다. 이 지역에서는 이질적인 묘제이기 때문에 만약 고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앞으로 재조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끝으로 세키노의 일기에는 1917년도 6월 8일에 부산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용암리 고분의 조사에는 세키노가 참가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세키노가 1917년도의 고구려 유적조사에 합류하는 것은 용암리 제2호분의 복원작업이 마무리 되는 6월 12일 경이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세키노조사단의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