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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가야모토 가메지로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는 1901년 2월 27일 나라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가야모토 가메지로이지만 주로 모리토[杜人]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단신인 그가 이름에 거북을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圖 3_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
1919년에 나라여자고등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22년에는 같은 학교의 역사교실로 근무지를 옮겼다. 1924년에 도쿄YMCA 영어학교에 입학했고, 그 후 잠시 동안에 도쿄제실박물관 역사과에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에는 도쿄미술학교 문고담당으로 근무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1927년에 도쿄YMCA 영어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토요대학의 국어한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년 때 중퇴했다. 1930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 및 박물관의 촉탁이 되어 고적조사와 박물관 업무에 종사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문화재와 관련된 사업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坂勝美]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소개와 추천으로 조선으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로는 조선고적연구회의 업무를 계속해서 수행했는데, 1941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자료정리를 담당한 사실도 확인된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가 1946년에 나라현 중요미술품 조사원이 되었고 다음 해에 국립박물관 나라분관에 취직하여 1949년에는 문부지관(文部技官)이 되었다. 1951년에는 동관 학예과의 고고실장이 되었다. 1953년에는 도쿄국립박물관 학예부 고고과 유사실장(有史室長)을 역임하고 1964년에는 평성궁 발굴부의 부장이 되었다가 1966년에 정년퇴임하여 천리대학부속 천리참고관의 촉탁이 되었다. 1969년에는 나라시에서 평성궁 보존위원회의 회장으로 위촉되었지만 다음해인 1970년 12월 14일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出版科學硏究所, 1987).
한반도에서 고적조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에 참가하였는데 낙랑 고분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많은 고고유적을 발굴했으며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호류지 5층탑, 금당기단, 평성궁 등의 발굴조사에 참가한 사실이 발견된다. 척도를 이용한 청동기 연구와 칠지도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하였다.
1980년에 간행된 『조선의 고고학(朝鮮の考古學)』은 사후에 그가 쓴 논문과 도면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성과와 성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4년에 간행된 『낙랑한묘(樂浪漢墓)』의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1972년에 간행된 『고고학자 가야모토 모리토(考古學者 榧本杜人)』가 참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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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모토 가메지로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