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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916년도 이후의 평양지역 고구려 유적 조사 개요

일제강점 초기에 이루어진 중요 고구려 유적의 조사내용에 대해서는 이전의 책에서 평양 주변지역과 집안지역으로 나누어 시간 순서대로 살핀 바 있다. 여기서는 그 후속 작업으로 1916년과 1917년에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내용을 검토하려고 한다. 이미 많은 선행 연구를 통해서 알려진 것처럼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가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시행하면서 고적조사위원회와 박물관협회가 설치·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를 통해 원칙적으로 모든 발굴조사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서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규칙이 공포된 이후에도 여전히 총독부의 허가를 얻지 않은 무단조사는 이어졌다. 다만 이를 계기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같은 관학자 개인조사의 성격을 띠었던 고적조사(古蹟調査)가 고적조사위원회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공적인 조사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의 제1년도 사업이 실시된 1916년에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주축이 되어 각각 조사단을 구성하여 각지에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한치군(漢治郡)과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는 이전까지의 조사가 무계획적이었으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고적조사사업의 목적과 시행방침이 분명히 정해졌음을 시사한다. 한치군(漢治郡), 즉 낙랑 관련 유적의 조사는 한반도의 북부지역이 일찍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물적자료의 확보라는 성격이 강하며, 고구려 유적의 조사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연구로 촉발된 고구려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관심을 반영한다. 특히 후자는 임나일본부를 설명할 또 다른 고고학적 증거의 확보라는 명분을 지녔다. 이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를 부정하고 고대 한반도의 북쪽은 중국, 남쪽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문헌사학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물적 자료의 확보라는 궁극의 목적이 있었다(이순자, 2008). 『조선사(朝鮮史)』의 집필을 주도하고 식민사관의 창출과 확산에 앞장선 구로이타가 조사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낙랑 유적에서 출토된 동경과 칠기를 포함한 화려한 유물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당시 연구자들의 조사와 연구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차 사업이 실시된 1916년에 이마니시[今西]는 한강 유역과 경기도 일원에서 평양과 마찬가지로 한대(漢代)의 유적이 발견될 것을 기대하고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구로이타[黑板]는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에서 한민족(漢民族)과 관련된 고고자료의 분포양상을 살폈다. 당시 세키노 다다시 조사단도 평양부근의 낙랑군 및 고구려 관련 유적과 유물을 조사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 내용을 살피면 대동강면 남안에 산재하는 낙랑 고분 10여 기를 발굴하고 아울러 노산리와 내리, 토포리, 호남리 등지에서 8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정인성, 2003, 2008, 2009). 또 용강군의 황산남록에서 3기 정도의 고구려 고분을 간이 발굴하고 대동군에서 대화궁지, 순천군에서 검산동 고분 등 2기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또 한 명의 고적조사위원이었던 도쿄대 인류학연구실의 도리이 류조는 조사단을 이끌고 평안남도 일원의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을 현지 답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도중에 고구려 고분의 관찰 내용을 조사 약보고에서 간단히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철저하게 부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전 책에서 밝힌 것처럼(정인성, 2009), 중국 동북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한대 유적을 가장 먼저 조사했던 도리이였기 때문에 평양 주변의 관련 유적에 대해서도 강한 조사 의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사단 구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세키노와 구로이타에 의해 고구려, 낙랑과 관련된 중요 유적의 고고학적인 조사에서 배제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1909년에 대동강면에서 발굴된 낙랑 전실묘를 고구려 고분이라 판단한 세키노에 대한 도리이의 반박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사람 간의 갈등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1917년에도 한반도 각지에서 고적조사 사업이 이루어지는데 고구려 유적의 조사는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세키노와 야쓰이가 전담한다. 이들은 따로 행동하며 조사를 수행하였지만 때로는 합류하여 공동으로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는 1909년 이래의 ‘세키노조사단’이 두 반으로 나뉘어 현장조사를 수행했다고 보면 된다. 이는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가 따로 조사 복명서를 제출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야쓰이는 전년도의 조사에서 완료되지 않았던 황해도 봉산군의 유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는데, 순천군의 검산동 고구려 고분과 북창면의 송계동 고구려 벽화고분을 이때 조사하였다. 특히 송계동 벽화고분의 조사에는 뒤늦게 세키노가 합류하여 현장조사를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세키노는 앞에서 밝힌 것처럼 집안을 중심으로 압록강 양안의 고구려 유적 조사에 전념하였으며, 구로이타는 임나일본부를 의식하여 섬진강 유역의 가야 유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1917년 이후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사업은 오랜 공백기를 거치는데 이는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된 낙랑 고분의 조사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출토유물이 풍부한 낙랑 고분이 고구려 고분보다 조사성과를 내기에 유리했고, 또한 식민사관과 관련된 자료수집이라는 측면이 선전되어 조사명분을 내세워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910년대에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부장유물이 확인된 고분은 거의 없었으며, 그 때문인지 고구려 고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화려한 벽화에 모이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당시 대다수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가 벽화를 발견한 현지 일본인의 제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1917년 이후로는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없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구려 유적이 다시 조사된 것은 1930년대로, 당시는 전반적으로 고적조사사업에 대한 총독부의 관심이 약해진 때이다. 이는 고적조사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효용성이 낮아진 데에 기인한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 그리고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조선총독부가 극단적인 재정긴축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박물관 업무와 고적조사사업도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게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였다. 그는 총독과 정무총감에게 고적조사와 관련된 현황을 설명하고, 한편으로는 재벌들에게 재정원조를 부탁하여 1931년 8월에 경주와 평양에 연구소를 설치하는 데 진력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가 그것이다. 이후 1945년에 광복이 될 때까지 이루어진 거의 모든 고적조사사업을 조선고적연구회가 주도하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1932년 4월에 당시 평양역 구내의 철도 선로구간의 공사에서 전실묘가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4세기대에 축조된 ‘평양역구내 영화구년명(永和九年銘) 전실묘’가 발굴조사된다. 1935년에는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해 평양성의 나성이 조사되었고 집안지역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 이때 이루어진 집안조사는 세키노 다다시를 단장으로 기획되었으나 갑작스런 그의 죽음으로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그렇지만 ‘세키노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오바와 노모리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고구려 유적 조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1936년에는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柴足面)에서 호남리 고구려 고분이 조사되고, 내리와 고산리 등지에서도 잇달아 고구려 고분이 발굴조사된다. 이때에도 현장조사의 책임은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가 받았지만 경주연구소에서 주로 신라 고분의 조사를 담당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처음 조사원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는 낙랑과 고구려 유적 조사에 젊은 연구자들을 참가시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노린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배려가 작용한 결과이다(有光·藤井, 2003). 1937년에는 오바와 노모리에 의해서 고산리와 대보면, 그리고 만달산록에서 각각 고구려 고분이 발굴된다. 1938년에는 고이즈미가 고구려 사지인 청암리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요네다 미요시[米田美代治]가 현장작업을 보조하였다. 청암리는 최초로 조사된 고구려 사지로, 교란되지 않은 고구려 기와층이 발견되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39년에는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가 황해도 신계군과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2기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하였고, 사이토 다다시[齊藤忠]는 상오리 고구려 건축지와 청암리 사지의 8각 기단을 조사하였다. 1940년에는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가 집안지역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모사도를 작성하고 1941년에는 평양주변의 고분도 모사한 사실이 확인된다. 1941년에는 진파리의 전 동명왕릉 뒤편에서 2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데 당시 벽화고분인 1호, 4호와 함께 4기의 고분이 더 조사되었다. 이 중 6호에서 금동제 용문투조금구가 출토되어 연구자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출토유물과 제4호분에서 발견된 고분벽화는 오바 쓰네키치가 정교하게 모사했다.
그러나 1941년 이후로는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이로 인한 일본 정세의 불안에 기인한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일단 1916년도 이후에 발굴조사된 고구려 유적의 조사내용 중, 이전 책과의 일관성을 고려하여 고분 조사를 중심으로 1916년과 1917년에 평양 근교에서 이루어진 조사를 살피려고 한다. 193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조사는 나중에 다루고자 하는데 이는 위에서 본 것처럼 1910년대의 고적조사와 1930년대의 고적조사는 조사단의 구성은 물론 그 배경과 조사방법에서 크게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나누어서 살피는 것이 의미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표 1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구려 관련 유적
번호유적 이름조사 일시유적의 소재조사자참고 문헌
1대성산성 고분
(사동고분)
1910. 10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谷井 (關野, 栗山)關野 외 1911
2한왕묘
(경신리 제1호분)
1911. 10平安南道 江東郡 馬山面關野, 谷井, 栗山關野 외 1914a·1927, 谷井1911b
3강서삼묘1912. 9平安南道 江西郡 江西面關野, 谷井, 太田, 小場太田 1913, 關野 1913a·1913b·1913c·1914a·1914e·1915b, 關野 외 1914b, 谷井 1912b
4매산리 사신총
(狩塚)
1912. 10平安南道 鎭南浦府大上面岩井, 太田關野 1913b·1914a·1914e·1914g
5매산리 사신총1913. 9平安南道 鎭南浦府大上面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a·1914e·1914g, 關野 외 1927
6대연화총1913. 9平安南道 龍岡郡關野, 谷井, 栗山, 今西, 太田, 小場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외 1927
7화상리 성총1913. 9平安南道 龍岡郡關野, 栗山, 今西, 太田, 小場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외 1927
8안성리 대총1913. 9平安南道 龍岡郡關野, 谷井, 栗山, 今西, 小場關野 1914a·1914g·1915a·1915b, 關野 외 1927, 谷井 1914c
9쌍영총1913. 9平安南道 龍岡郡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a·1914g·1915a·1915b, 關野 외 1927, 谷井 1914c
10장군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
11천추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
12태왕릉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
13절 천정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
14사아 천정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
15오회분 제4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
16삼실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
17연화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
18귀갑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
19미인총1913. 10(中國) 輯安縣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
20문악리 고분 平安北道 江界郡 文玉面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
21노산리 개마총1916. 10·11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關野, 谷井, 小場關野 1917, 關野 외 1930
22내리 서북총1916平安南道 大同郡關野, 野守關野 1917, 關野 외 1930
23토포리 대총1916平安南道 大同郡小川關野 1917, 關野 외 1930
24토포리 남총1916平安南道 大同郡小川關野 1917, 關野 외 1930
25호남리 사신총1916平安南道 大同郡關野, 谷井, 小場關野 1917, 關野 외 1930
26호남리 금사총1916平安南道 大同郡栗山, 野守關野 1917, 關野 외 1930
27황산남록 삼실총1916. 10·11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關野關野 1917, 關野 외 1930
28황산남록 이실총1916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關野關野 1917, 關野 외 1930
29황산남록 장석총1916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關野關野 1917, 關野 외 1930
30순천리 천왕지신총1916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關野, 小場關野 1917, 關野 외 1930
31검산동 고분1916. 11平安南道 順川郡 仙沼面關野關野 1917, 關野 외 1930
32용강 두륵산 양원리 고분1916. 8平安南道 龍岡郡黑板黑板 1917
33매산리 고분군
(1913년 발굴분)
1916. 8平安南道 龍岡郡黑板黑板 1917
34만달산 고분 1호1917. 3平安南道 江東郡 晩達面谷井谷井 1917
35만달산 고분 2호1917平安南道 江東郡 晩達面谷井谷井 1917
36만달산 고분 3호1917平安南道 江東郡 晩達面 谷井 1917
37순천군 용암동 고분1917平安南道 江東郡 晩達面 세키노 컬렉션
38대고력묘자 이실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39무개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40고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41석곽 노출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42대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43삼실총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외 1929
44환도성1917. 7(中國) 輯安縣關野關野 1929b
45평양 역전 앞 고분1932平壤府榧本, 野守榧本 외 1933
46평양성 나성, 평양 만수대1935平壤府小泉小泉 1938b·1986
47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천추총, 모두루총 등1935(中國) 奉天省 輯安縣池內, 浜田, 梅原通溝 1938·1940
48호남리 고분 1, 3호1936. 10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小場, 有光, 澤小場 외 1937
49내리 고분군 1, 3호1936. 10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小場, 有光, 澤小場 외 1937
50고산리 고분군1936. 10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小場, 有光, 澤小場 외 1937
51상리 고분군1936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小場, 有光小場 외 1937
52산성자 주변 고분군1936(中國)奉天省 輯安縣梅原, 水野, 池內通溝 1938·1940
53고산리 고분 2기, 대보면 고분 2기1937. 9·10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大寶面小場, 澤, 田窪小場 1938
54만달산록 고분 18기1937. 10平安南道 江東 晩達面野守, 榧本, 田窪, 澤野守 외 1938
55진파리 고분 1호1941平安南道 中和郡米田, 澤, 小泉小泉 1941
56진파리 고분 2호1941平安南道 中和郡米田, 澤, 小泉小泉 1941
57진파리 고분 3호1941平安南道 中和郡米田, 澤, 小泉小泉 1941
58진파리 고분 4호1941平安南道 中和郡米田, 澤, 小泉小泉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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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도 이후의 평양지역 고구려 유적 조사 개요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