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그 후의 집안 조사

1917년에 이루어진 세키노의 조사 이후에는 1918년 8월에 구로이타 가쓰미가 호태왕비를 중심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구로이타는 호태왕비에 나무 발판을 설치하고 탁본을 작성하였으며 나아가 비석의 기초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 주변을 굴착하였다. 구로이타의 조사는 조선총독부의 정식 조사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되지 않았다. 다만 이때 사와 쥰이치가 찍은 사진이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20여 년 뒤에 이케우치 히로시가 중심이 되어 발간한 『통구(通溝)』에 실렸다. 그의 조사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지리(歷史地理)』35-2에 간략한 강연 원고가 실린 정도이다.
1918년 이후 집안 주변의 정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더 이상의 학술조사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집안에 대한 조사가 재개된 것은 그 후 1935년 가을이다. 원래 1935년의 조사는 세키노가 조사하지 않았던 2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도쿄로 날아든 것이 발단되었다.
벽화고분을 발견한 사람은 만주국 안동성의 시학관이던 이토인데, 그가 주장하여 만주국 문교부가 그 벽화를 조사, 촬영할 것을 정해 같은 해 가을에 도쿄의 ‘좌석보강행회’에게 촬영을 맡기려고 하였다. 촬영시에는 세키노 다다시도 동행하려고 하였으나 직전에 급사하고 만다. 이에 세키노를 대신하여 조사에 참여한 사람이 교토제국대학 고고학연구실의 하마다 고사쿠이다. 물론 하마다는 짧은 기간 현지에 머물렀고 현지조사는 전적으로 우메하라에게 맡겨졌다. 이때 작성된 보고서에 실린 도면은 그 대부분이 우메하라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다.
조사는 1935년 9월 23일 조선 경성에서 ‘조선총독부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朝鮮總督府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委員會)’제2회 총회가 열렸는데, 하마다는 이 회의에 출석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건너와서 집안으로 갔다. 24일 기차로 경성을 떠나 평양을 도착하여 유적 발굴현장을 견학하고 희천, 강계 등을 거쳐 목적지로 갔는데, 이는 처음 세키노가 지났던 길과 동일한 코스이다.
희천까지는 열차로 이동하고 희천에서부터는 승용차를 이용하였다. 당시 조사에 참가한 사람은 하마다 이외에도 경성제국대학의 후지타 료사쿠, 교토제국대학의 우메하라 스에지, 당시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오바 쓰네키치 등 화려한 멤버로 구성되었다.
圖51_구로이타 조사대가 찍은 광개토대왕비 [1]
-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51_구로이타 조사대가 찍은 광개토대왕비 [2]
-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52_구로이타 조사대가 굴착한 광개토대왕비의 하부구조 [1]
圖52_구로이타 조사대가 굴착한 광개토대왕비의 하부구조 [2]
일행은 희천과 강계에서 1박 씩을 하고 압록강의 만포진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때에는 이토는 물론 좌우보간행회의 사이토 우키쿠타로도 집안에 와 있었고, 조사는 이토의 안내로 진행되었다.
일행은 도착 당일 광개토대왕릉과 태왕릉, 장군총 등을 보고 다음 날에 새로 발견되었다는 고분을 답사했는데, 새로 붙여진 이름이 무용총과 각저총이다.
3일째에는 산성자 산성과 천추총, 서대총, 삼실총 등 저명한 고분을 둘러보았다.
다음 날 아침인 10월 1일 만포진의 숙소를 나와 압록강변을 따라 국경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신의주로 향하는 아주 짧은 여행을 하였는데, 도중에 모두루총과 환문총을 답사한다. 당시 이미 내부가 열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현지 확인결과 무덤의 입구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본 조사대는 이토만을 현지에 남기고 압록강변의 조사를 계속했다. 그 뒤 오회분의 근처에서 사신도가 있는 벽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조사를 감행하여 강서삼묘에 필적하는 훌륭한 벽화고분을 확인하게 된다. 이름하여 사신총이 그것이다. 이해에 새롭게 5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만주국 당국은 이에 대한 자세한 조사의 필요를 확인하고 1936년의 조사를 기획하게 된다.
1936년에는 외무성 문화사업부의 원조를 구해서 일만문화협회의 사업으로 조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의 조사단은 이케우치 히로시를 비롯하여 교토제국대학의 하마다 고사쿠, 우메하라 스에지, 동방문화학원 교토연구소의 연구원이던 미즈노 세이이치, 만몽문화연구원(滿蒙文化硏究員)이던 미카미 쓰기오를 조사원으로 하여, 1935년과 마찬가지로 좌우보간행회의 사이토와 오카자키가 촬영원으로 참가하여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조사가 이루어졌다.
일정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9월 30일: 모두루총, 환문총, 사신총, 삼실총을 조사했는데 담당 조사원은 하마다와 이케우치이다. 또 모두루와 환문총의 실측은 우메하라와 미카미가 담당하였다.
10월 1일: 태왕릉과 장군총, 천추총, 서대총을 하마다와 이케우치가 조사하고 태왕릉과 사신총의 측량을 우메하라와 미카미가 담당하였다.
10월 2일: 산성자 산성을 미즈노와 미카미, 이케우치가 조사하고 산성하 고분군을 우메하라가 조사하였다.
10월 3일: 통구성 즉 국내성을 미즈노와 이케우치가 조사하고 삼실총을 우메하라와 미카미가 조사하였다.
10월 4일: 장군총을 우메하라와 미즈노, 미카미, 이케우치가 공동으로 조사하였다.
특히 조사과정에서 고분의 도면을 작성한 것은 우메하라 스에지였는데, 지금 도쿄의 동양문고에는 그 원도가 남아 있다. 1936년의 조사에는 경성제국대학의 다나카 교수를 포함해 평양부립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 등 다수가 참가했다. 이때에도 조사단은 조선 측의 만포진에 숙소를 잡았으며 연일 압록강을 건너다니면서 조사를 수행했다. 하마다는 10월 2일에 먼저 자동차로 집안을 떠나고 나머지 조사원들은 모두 끝까지 남아서 조사를 수행했다고 한다.
『통구』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상권은 전체 유적의 개요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케우치가 원고를 작성하였고 하권은 하마다와 우메하라가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하마다와 우메하라의 역할관계를 고려하면 대부분의 원고작성을 우메하라가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편 1935년부터는 이와 별도로 경성제국대학의 후지타 료사쿠가 매년 집안을 답사했는데, 1936년에 평양 근교의 토포리와 내리에서 고구려 유적의 조사·경험을 쌓은 아리미쓰 교이치도 1940년 무렵에 집안을 처음 방문하였다. 후지타 료사쿠의 답사와 관련된 조사 내용과 성과는 그가 촬영한 유리원판을 소장한 성균관대학 박물관에서 검토한 바 있다(성균관대학교 박물관, 2006).
이 외에도 많은 연구자가 집안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되지만 193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집안의 고구려 유적의 조사에 대한 정리는 그 연구 보고서인 『통구』의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圖53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 도쿄대학 소장
圖54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4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4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4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4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기와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6]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5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7]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6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문자전 [6]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7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자료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7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자료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7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자료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7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자료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7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태왕릉에서 채집한 자료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8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채집한 유물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8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채집한 유물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8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채집한 유물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8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채집한 유물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8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과 태왕릉에서 채집한 유물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9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명문전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9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명문전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59 _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명문전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0 _1913년 임강총에서 채집한 기와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0 _1913년 임강총에서 채집한 기와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1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문자전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1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문자전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1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천추총에서 채집한 문자전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1]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2]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3]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4]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5]
- 도쿄예술대학 소장
圖62 _1913년에 세키노 조사단이 산성자 산성에서 채집한 와당 [6]
- 도쿄예술대학 소장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 후의 집안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