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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구려 고분군의 답사

세키노는 1913년의 집안 조사에서 집안평야의 고분이 1만 기를 넘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는 토구자 산록, 집안에서 산성자로 이르는 길에 늘어선 고분군을 관찰한 것으로 확인된다. 마선구에도 계류(溪流)의 좌우와 동서 산록에 수천 기의 고분이 분포한다고 하였다. 또 한 지방에서 동일한 성격의 고분이 이렇게 많이 형성된 것은 그때까지 보지 못했다고 감탄하였다. 집안과 마선구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지는 구릉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평지를 이루고 이러한 지형을 의식하여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집안 고분군은 7~8 내지는 수십 기가 곳곳에 군을 이루어 분포하며 열을 이루는데, 이것이 옛날 동족 집단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한 이 지역의 고분들은 대개 서남으로 연도를 내고 삼실총의 경우 연도가 달린 남쪽에 주작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방향을 의식한 무덤 축조라고 보고 있다(關野, 1914c·1914d).
집안의 분묘를 관찰하고 세키노는 이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하나가 흙으로 분구를 만든 토총(土塚)이고 다른 하나가 돌로 쌓아서 만든 석총(石塚)이었다. 석총은 『위지(魏志)』에 ‘적석위봉(積石爲封)’이란 기사와 관련시키고 또한 여러 군집에서 석총과 토총이 군집을 이루는 현상을 바탕으로 이것이 시기차가 아니라고 보았다.
조사 당시 대부분의 고분이 후세에 파손되어 온전한 것이 없었는데, 석총 중에서는 토구자산 아래의 장군총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고 산성하 고분군 중에는 형제총(兄弟40 ·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Ⅱ -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關西地域소재 고구려 유물 1塚)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형제총이란 크기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모양의 석총이 나란히 배치된 현상을 주목한 세키노의 명명이다.
토총으로는 유산산록(楡山山麓)의 오회분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도 대개 석총에 비해 파괴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석총의 경우 축조 후 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석재를 이용하기 위하여 토민들이 돌을 뽑아내었고, 반면 토총은 전통적으로 무덤을 경원시하는 풍습 때문에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았다.

1) 장군총과 배총

장군총(將軍塚)이라고 알려진 고분은 세키노가 집안을 조사할 때도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고분이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동북으로 약 13~14정(町) 정도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다.
세키노는 장군총의 구조를 꼼꼼히 기술하고 있는데, 장군총에서 다수의 기와를 채집한 사실도 적어 두었다. 현재 일본의 여러 기관에 보관되어 있는 세키노·이마니시 기증의 기와들이 이때 채집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것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된다.
圖23_장군총의 실측도(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24_장군총의 원경
圖25_근경
圖26_세부
圖27_세부
圖28_석실 천장의 형태
圖29_석실 내부의 형태(이상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30_석실 입구
圖31_연도부 형태
이들 기와들이 장군총 위에서 출토되는 현상을 두고 세키노는 고분 내부로 빗물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하여 기단의 외연을 따라 확인되는 구멍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최하단에 세워서 걸친 대석(臺石)은 고분의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라 보았고, 고분의 정상부에는 콘크리트와 같은 것으로 지금보다 더 높은 흙만두를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샤반느는 상부 기단 외연을 따라 확인되는 구멍열을 고분 위에 기와를 씌운 지붕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 자리라고 판단한 바 있다. 도리이는 고분의 정상에 기와를 씌운 비각이 있었다고 말했으나 세키노는 이를 비판했다. 즉 고분을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서 난간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현장을 관찰한 세키노의 판단이었다.
세키노가 장군총을 답사했을 때도 석실은 이미 열려 있었는데, 이는 도굴자들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석실로의 출입은 너무 간단하여 연도와 현실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연도에는 원래 3군데에서 폐쇄흔이 관찰되었는데, 현실문은 돌로 된 여닫이문이고 바깥쪽의 두 개는 큰 돌로 폐쇄한 상태였다. 석실내부의 벽은 큰 돌을 가공하여 쌓았고 천장은 평행 내어쌓기를 하고 지붕을 덮었는데, 곳곳에서 석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벽면이 그다지 곱지 않은 것은 원래 전체 벽에 석회미장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석회와 관련된 판단은 도리이나 샤반느의 보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圖32_장군총에서 채집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기와(『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석재 관대는 2개인데 도리이와 마찬가지로 왕과 왕비의 것이라 판단했다. 도리이 류조는 이를 석관(石棺)을 올려두는 것이라 했지만 세키노는 목관(木棺)이라고 단언했다.
세키노는 석실내부의 축조 방법도 세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즉 석실벽은 교묘하게 잘 쌓았지만 벽석 내부는 크게 가공하지 않은 돌로 쌓았고 이를 콘크리트(아마도 석회)로 굳힌 것이라 보았다. 무덤의 기저는 천석을 돌려가며 깔았고, 그 밖으로는 묘역을 표현하는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關野, 1914c·1914d).
고분의 기단(基壇)에서 발견된 기와는 와당(瓦當)과 평와(平瓦)인데 당초문이 시문된 기와도 있다고 하였다. 세키노가 말한 당초문 기와가 어떤 것인지는 『조선고적도보』Ⅰ에 실린 사진자료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또 이들 기와가 일정부분 한와(漢瓦)의 느낌이 있고 제작법이 정교하며 음각된 글자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고적도보』Ⅰ에 실린 기와 사진을 보면 완전한 형태의 와당이 1점이고 지두압흔이 있는 암키와가 2점, 그 외 평기와가 15점 정도인데, 대부분의 기와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우선 원와당은 주연이 그리 높지 않고 2중 권선으로 8분할하여 각 구획에는 능선이 있는 연판이 배치되며 연판의 좌우에는 연자가 배치된다. 문양이 없는 주연의 아래에는 한 줄의 원권이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근년 전형적인 장군총형 와당으로 이해되는 형식이다.
圖33_장군총 배총의 스케치와 실측도(『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34_장군총 배총 근경(『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지두압흔이 있는 평기와는 둘 다 무문인데, 깨어진 단면으로 보아 점토띠를 붙여 올려서 성형한 것이다. 내면에는 선명한 포흔이 남는 것이 일반적이다. 암키와의 대부분이 문양이 지워지고 없지만 부분적으로 승문타날이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된다.
기와에 새겨진 음각은 건조 전에 이루어진 공정임이 확실하다. 확인되는 문자로는 ‘第三’, ‘漢’, ‘上二’, ‘川’, ‘下’등인데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발해 문자와가 글자를 새긴 도장으로 누르는 것이라면, 장군총 등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문자는 모두 소성 전에 도구로 그어서 새기는 것이 많다.
『조선고적도보』Ⅰ에는 장군총의 입면도와 매장주체부의 평면도 및 단면도가 실려 있는데, 필치로 보아 세키노나 야쓰이 등이 그린 것은 아니고 구리야마 혹은 조사를 수행했던 총독부의 건축 기사가 그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살피면 당초 연도 바닥에 흙이 차 있는 상태로 표현되어 있어 조사를 수행하면서의 굴착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圖35_태왕릉의 간이 실측도
圖36_태왕릉 전경
圖37_태왕릉 근경 (이상『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사진을 보면 고분에는 잡목이 무성한데 1905년에 도리이가 남긴 사진, 그리고 1907년에 샤반느가 남긴 사진과 거의 동일한 상태이다.

2) 태왕릉

태왕릉은 집안분지 서쪽의 토구자산에서 서남방으로 뻗어내리는 구릉에 위치하고 그 크기는 장군총을 크게 능가한다.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 붕괴되어 있었는데, 매장주체부에 해당하는 석곽이 일부 관찰되고 기단의 네 모서리에 해당하는 돌들이 관찰되는 정도라고 하였다(關野, 1914c·1914d). 세키노 일행은 매장주체부를 중심으로 하여 고분의 평면형을 그리려고 노력하였으며 석곽내부도 석재 결구상태도 도면으로 나타내고 있다(關野, 1914c 1914d).
세키노 일행은 태왕릉의 답사에서 도리이와 마찬가지로 ‘原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고 읽히는 문자전을 발견하였으며 다수의 기와도 채집하였다.
圖38_1913年 조사시 태왕릉에서 채집된 각종 유물 [1]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38_1913年 조사시 태왕릉에서 채집된 각종 유물 [2]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38_1913年 조사시 태왕릉에서 채집된 각종 유물 [3]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지금 일본에 남아 있는 태왕릉 관련 유물도 대개 이때 세키노 일행이 채집한 것이다. 『조선고적도보』Ⅰ에는 3점의 와당과 4점의 암키와 그리고 4점의 문자전이 실려 있다. 와당은 2종류로 훗날 다무라 고이치[田村晃一]와 다니 도요노부[谷豊信]가 고구려 왕릉출토 와당의 편년을 살피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되었으며 왕릉 비정 문제를 둘러싸고는 지금도 그 자료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고 있는 유물이다.
암키와의 단부에는 주름이 있는 목판으로 누른 자국이 남는 것과 내면에 포목흔이 뚜렷하게 남은 것이 있다. 포흔이 남는 암키와는 포흔 위로 상하 부분적인 마연자국이 남아 있다. 문자전은 대개 ‘願太王陵……’에 속하는 것으로 완형도 2점이다. 완형 문자전 2점 중 한 점은 도리이 류조가 가져온 것인데, 『조선고적도보』Ⅰ에 본부장(本府藏)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총독부박물관 즉 지금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고고학잡지』의 보고문에 소개된 자료는 이와는 다른 문자전이어서 세키노 일행이 상당히 많은 문자전을 채집하여 반출한 정황을 읽을 수 있다. 2007년에 이루어진 일본 현지 고구려 유물 조사에서 확인된 태왕릉 출토 기와 자료는 대부분 이때의 조사와 관련된 것이다.

3) 천추총

천추총(千秋塚)은 마선구의 계곡 좌안에 있는 평야에 위치하는 대총이다. 세키노가 조사했을 때 전부 붕괴되어 일부 매장주체부의 흔적과 기단의 흔적만이 보이는 상태라고 하였다.
원래 천추총의 형태는 장군총과 유사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조선고적도보』Ⅰ에는 추수가 끝난 밭 가운데 위치하는 장군총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고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기와들도 소개되어 있다(圖39·40 참조).
圖39_천추총 원경
圖40_천추총 출토유물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이때 채집된 와당(瓦當)은 2점인데, 태왕릉에 비해 주연이 높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중앙에 돌기가 있는 중방의 바깥으로 2조의 원권이 돌아가고 문양면은 6분할, 각 구역에는 연판(蓮瓣)이 배치된 것이다. 연판의 상위 좌우에는 연자(蓮子)가 위치하고 주연 아래에는 2조의 원권(圓圈)이 돌아간다. 측면에는 수키와가 부착된 상태이다. 다른 하나도 동일한 문양 구성이나 와당 제작에 사용된 거푸집은 다른 것이 분명하다. 평기와는 외면에 성형흔이 남지 않은 작은 편으로 4번에 걸쳐서 수평으로 그은 와부호가 관찰된다(圖40 참조). 이들 기와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되었으므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圖41_천추총에서 채집된 각종 유물
圖42_서대총 근경 (2008년 필자 촬영)
圖43_서대총 기단 형태 (2008년 필자 촬영)
천추총에서는 다수의 명문전(銘文塼)도 출토되었는데, 이미 알려진 ‘千秋萬歲永固(천추만세영고)’와 ‘保固乾坤相畢(보고건곤상필)’명문전이다. 『조선고적도보』Ⅰ에 게재된 것은 전자가 5점이고 후자가 2점이다. 후자의 ‘坤’은 실제 탁본을 보면 ‘川’을 닮았으나 ‘坤’으로 읽는 것이 맞다고 한다(關野, 1914c·1914d). 이 고분이 천추총이라 명명된 것도 이 명문전의 존재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물론 세키노 다다시의 작명(作名)이다.
도리이의 조사에서는 천추총에서 문자전을 발견한 기록이 없는 반면 세키노 조사단이 유독 많은 수의 명문전을 확보한 것을 보면 조사 과정에서 부분적인 굴착행위가 수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圖44_임강총의 표지석 (2008년 필자 촬영)
세키노는 천추총에서도 완형(完形)의 평기와가 발견되었고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도 기와들이 발견되는 점을 들어 이들 석총의 기단에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단마다 지붕을 씌운 결과라고 보았다. 또한 문자전의 귀퉁이가 잘려 있는 것은 각 기단에 기와를 덮고 여기에 전을 겹쳐 얹기 위한 가공이고 한편으로는 인접하는 전(塼)들과 용이하게 겹치기 위한 고안이라고 판단했다.

4) 기타 석총

1913년에 세키노는 이 외에도 임강총(臨江塚)과 오도신총(五道神塚), 서대총(西大塚) 등을 답사했다. 그렇지만 이들 개별 고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圖45_임강총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와 [1] (2008년 필자 촬영)
圖45_임강총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와 [2] (2008년 필자 촬영)
圖45_임강총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와 [3] (2008년 필자 촬영)
圖45_임강총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와 [4] (2008년 필자 촬영)
세키노는 산성하 고분군도 답사하였는데, 닮은꼴의 기단식 적석총을 형총과 제총으로 명명하기도 하고 그 형태를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사아천정총과 절천정총의 도면이 『고고학잡지』에 게재되어 있는데, 도면 자체는 필체로 보아 구리야마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조선고적도보』에는 임강총과 그곳에서 채집된 평기와의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임강총은 광개토대왕비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하는 고분이다. 출토된 기와는 외면에 굵은 승문타날흔이 관찰되는 것으로 단부는 타날이 지워진 상태이다. 서대총에서도 주름이 있는 도구로 눌러서 단부를 만든 평기와를 채집했다.
『조선고적도보』Ⅰ에 게재된 절천정총과 사아천정총의 도면은 『고고학잡지』에 게재된 것과 약간 다르기는 하나 자세히 관찰하면 구리야마의 도면을 약간 손질해서 그대로 게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두 고분의 도면을 보면 연도에 토사가 쌓여 있음을 알수 있다. 이는 평양에서의 일부 고분과 마찬가지로 유구 내부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은 채 도면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5) 오회분 3총과 2, 4총

세키노는 현재 오회분이라 불리는 고분군을 동북에서 서남으로 열을 지운 것으로 판단하고 전열(前列)을 3총과 2총으로 부르고 후열을 4총으로 명명하였다. 3총과 2총은 모두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대형이었는데, 세키노가 조사하였을 때는 이미 모두가 도굴을 당한 것이었다.
圖46_오회분의 원·근경 [1]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46_오회분의 원·근경 [2]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46_오회분의 원·근경 [3]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46_오회분의 원·근경 [4]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후열의 4총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것은 봉토가 삭평되고 그 전방(前方)도 삭토되어 현실로 들어가는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이 고분은 평면이 거의 방형이고 현실은 평면이 장방형으로 4벽을 모두 1장의 돌로 조립한 것이다. 천장부에서 약간의 평행내어쌓기가 인정되고 그 위에 1매의 천장석을 덮은 것이다. 이 고분은 『조선고적도보』에 그 간략한 도면이 제시되어 있다. 역시 필체로 보아 세키노가 그린 것은 아니고 구리야마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4총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고분(1총)은 그 정상부(頂上部)에 1장의 천장석이 있었다. 그리고 2총과 3총에도 천장에서 1매의 천장석이 발견되었다.
『조선고적도보』Ⅰ에는 오회분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3총의 3번째 고분은 분구 기저(基底)의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의 조사에서 오회분에 대해서는 4총 현실의 평면도와 단면도를 작성했을 뿐, 분포도나 고분의 외형을 그린 도면은 보이지 않는다.

6) 삼실총

4총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삼실총(三室塚)인데,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에는 현실이 붕괴되어 사다리를 이용하면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圖47_삼실총의 실측도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사다리를 이용하여 삼실총의 내부로 들어간 정황은 『조선고적도보』Ⅰ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사진을 살피면 연도에 토사가 가득 차 있어 입구를 통한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삼실총은 무덤방이 3개인 고분으로 연도에 접한 무덤방의 좌벽에 통로를 만들어 또 하나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남쪽으로 다시 연결 통로를 만들어 비슷한 규모의 무덤방을 하나 더 만들어 두었다. 무덤방이 3개이기 때문에 삼실총이라 이름지었는데, 이 역시 세키노 일행의 명명이다. 무덤방은 4번에서 5번 정도의 평행 내어쌓기를 한 다음 모서리에 삼각모줄임을 하고 그 위에 천장석을 덮은 구조이다. 무덤방은 벽면과 천장에 두꺼운 석회가 발린 상태였는데, 천장의 무너진 틈으로 관찰하건데 석회 뒤쪽의 석재는 적당한 크기의 자연석이었다고 한다.
圖48-1_삼실총 근경
圖48-2_삼실총 석실 내부
세키노가 조사하였을 당시의 고분은 제1 무덤방이 크게 붕괴된 상태였는데, 도굴된 흔적이 역력했다. 도굴로 파괴된 천장을 통해 빗물이 스며들었음은 물론 근처 부락민이 무덤방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에 제1 무덤방에 그려진 벽화는 그 보존상태가 현저히 나빴다. 다만 오른쪽 벽에 기마 무사 두 사람이 관찰되는 정도였다. 그 외 각 실의 벽화 중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으나 전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고분은 1935년과 1936년에 재조사되어 좀 더 충분한 설명이 추가되었고 1970년대에는 중국 조사팀에 의해 바닥면의 정리가 이루어져 인골과 철못,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1913년도의 조사에서는 이 외에도 오회분의 후방에서 산연화총을 발견하고 그 특징을 간단하게 보고했다. 『고고학잡지』에 실린 도면은 구리야마가 작성한 것이다. 산연화총은 세키노가 발견한 것이 아니고 이미 1907년도에 샤반느가 그 내부를 조사하고 촬영한 사진이 잡지에 공개된 바 있다(서길수, 2006). 물론 이 고분은 1889년에 이미 이운종이란 사람이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호태왕비를 탁본한 사실과 함께 용과 봉이 그려진 무덤에 대한 기록이 있다(서길수, 2006).
산성자 고분에서는 귀갑총과 미인총 등을 조사했는데, 이는 세키노 조사단을 통해서 그 존재가 학계에 처음 알려진 것이다.
조사가 끝난 후 1914년 2월에 발간된 『고고학잡지』에는 세키노가 태왕릉 등지에서 채집한 100여 점의 명문전과 와편을 세키노와 야쓰이가 고고학회에 기증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 중 추첨을 통해 회원들에게 전 5점과 기와 10여 점을 기증하였다고 하며, 당시 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학회 간부의 결의를 통해 학회에 금전을 기부한 회원들에게 기와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關野, 1914c).
圖49_산연화총의 실측도와 벽화 [1]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49_산연화총의 실측도와 벽화 [2]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圖49_산연화총의 실측도와 벽화 [3]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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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군의 답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