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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912년의 집안 조사

1912년에는 도리이에 의한 집안 고구려 유적 2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의 조사는 「조선고적조사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집안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 성과가 만주에 대한 조사·연구 성과 목록에서 빠지고 조선 고적 조사와 관련된 목록에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여기서는 우선 도리이가 조선고적조사사업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1912년경의 도리이는 3차에 걸친 만주 조사로 제법 명성을 얻게 되어 여러 학회에서 강연하고 잡지에 기행문을 실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몽고에서 조사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프랑스의 중국 연구가인 샤반느에게 알려져서 『통보』에 소개되었고 그 덕분에 유럽 유학을 권유받기도 했다. 그러나 도리이는 그의 학문이 동양학이기 때문에 충실한 현지조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당장 유학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당시 도쿄에서 『세계(世界)』라는 잡지를 간행하고 있던 니미야[二宮]를 만나게 된다. 니미야는 당시 군부 중요 인물의 시베리아 횡단을 후원하고 야마가타[山縣] 공작의 비서와 같은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층과 면이 넓게 통하는 사람이었는데, 도리이는 이 『세계』에 몽골 여행과 관련된 글을 여러 차례나 싣고 있었다. 이는 러일전쟁 후 일본에서도 서양인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오지(奧地) 탐험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인기가 높아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 니미야가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寺內]와 아주 친밀한 사이였던 터라 조선에 대한 조사를 희망하던 도리이의 조사 의향을 전달한 것이 그가 조선고적조사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鳥居, 1953). 즉 데라우치의 배려로 집안유적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1910년 여름에 조선에 대한 간단한 예비조사를 마친 도리이는 1912년에 2차 조사를 감행한다. 조사단의 구성을 살피면 화가인 사토[佐藤]와 사진가인 사와 슌이치[澤俊一]가 도리이의 조사를 보조한 것으로 확인된다. 의주 경찰서에서는 고성건이 통역으로 파견되었고, 헌병대에서 후지이와 세키타니를 조사단에 합류시켜 주었다(鳥居, 1913). 특히 세키타니는 집안에서 조사 호위를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도리이는 1912년 10월 10일에 도쿄의 신바시를 출발해 16일에 경성에 도착했고 21일에 경성을 출발해 기차로 심양까지 간 후 다시 기차로 여순으로 가서 총독인 후쿠시마 장군에게 인사하고 그의 저택에서 숙박하였다(鳥居, 1913). 이후 후쿠시마의 지원으로 기차로 장춘으로 가서 주변을 조사하고 길림의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조사를 진행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건판사진자료(國立中央博物館, 1997)는 당시의 동선(動線)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1913년에 『동양시보(東洋時報)』에 실린 「만주(滿洲)에서 북조선(北朝鮮)으로의 여행」을 통해 조사 내용을 어느 정도 복원해낼 수 있다.
이를 분석하면 우선 여순 부근에 도착한 도리이는 그 부근의 선사시대 유물을 조사하고 철령으로 이동한다. 철령 발권산에서 각종 석기와 토기 등을 관찰하고 명도전(明刀錢)과 오수전(五銖錢)과 같은 유물을 조사하고 사진을 촬영하며 답사한 정황이 확인된다. 그런 다음 개원으로 가서 석탑과 성지(城地)를 수집하고 장춘으로 이동하였다. 개원과 철령 부근은 몽고와 남만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으로 판단하고 인종학적인 측면에서 선사 이전의 유물을 조사하는 한편 요금대의 유적도 살폈다고 한다(鳥居, 1913).
군에서 지원한 짐을 마차 3대에 나누어 싣고 도착한 장춘에서도 석기시대의 유적을 조사하고 서풍을 지나 길림성 매하구시(梅河口市)에 있는 해룡성으로 이동하면서 조사를 계속했다. 그런 다음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을 들러 토성을 조사하고 통화에 이르게 된다. 이때 통화현에서는 혼강의 전경과 고력성 산성(山城), 삼십청리 고성(古城)의 원경 등을 찍었다(國立中央博物館, 1997). 통화현을 지난 조사단은 환인현에 도착하여 여러 지점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 정황이 확인된다.
우선 고려묘자 고분군의 전경을 찍고 여러 곳에서 고구려 고분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묘자 부근은 14~15년 전에 대대적인 삼림채벌이 이루어진 곳인데 그 과정에서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석마합달과 조마자구구 등지에서 다수의 고구려 고분을 발견한 도리이는 오룡산성, 즉 오녀산성의 전경을 찍고 산성을 오르게 된다(國立中央博物館, 1997). 오녀산성에서는 혼강과 환인을 내려다보면서 전경사진을 찍고 우물지와 건물지를 조사하였다. 그런 다음 서문지와 산성의 동쪽 허리를 오가면 조사하고 동쪽 사면과 서쪽 사면의 고분군을 조사한다.
포수자(泡水子) 고구려 고분을 조사하면서 오녀산성의 원경촬영을 잊지 않았으며 흑혈자에서 고구려 고분을 조사하고 사진촬영하는 것으로 환인에서의 조사를 마무리한다.
조사 후 도리이는 환인에서 조사한 오녀산성을 고구려 국내성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위나암성의 ‘위나’와 현지 중국인들이 부르는 ‘오룡’이 같은 발음인 것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오녀산성 내에서 확인한 우물지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위나암성의 우물기사와 관련시켜 이를 확신하였다. 한편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서 환도성으로 지목한 홍석립자 주변을 조사하고 주변에 성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부이강과 혼강의 합류점에 있는 간만산 산성은 졸본성일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국내성과 졸본성이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할 것이기에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鳥居, 1913).
圖11_노령고개를 넘는 도리이 조사단 (東京大學綜合硏究資料館, 1991)
환인에서의 조사를 끝내고는 집안으로 향하는데, 신개하를 따라가다 1905년과는 달리 노령고개를 넘었다(圖11 참조). 그런 다음 압록강을 따라 걸어 외차구문을 지나 유수림자(楡樹林子)에 당도하여 그곳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유리건판은 유수림자에 이르기까지는 강연에서 도리이가 밝힌 동선과 그 순서가 잘 일치한다. 그런데 건판번호 ‘120176’부터는 촬영년도가 1913년으로 바뀌고 도리이의 조사 동선과 다른 것이 확인된다. 즉 1913년의 강연에서는 유수림자를 조사한 다음 12월 27일에 초산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鳥居, 1913), 사진자료는 장군총이 뒤를 잇는다. 당시 도리이는 유수림자에서의 조사를 마친 다음 1월 4일까지 초산에 머무르면서 주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고 위원(渭原), 고산진(高山鎭), 벌등진(伐登鎭) 등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1월 5일에 초산을 떠나 압록강변을 걸어 집안으로 들어간다(鳥居, 1913).
집안에서의 동선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으나 만약 국립중앙박물관의 건판 ‘120176’이 도리이 조사단의 촬영이라면 장군총을 가장 먼저 조사하고 그 다음 호태왕비, 태왕릉으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도리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13년에는 도리이가 아니라 세키노가 집안을 조사한 해이기 때문에 목록에 나오는 장군총 이하 사진의 조사 주체가 누구인지는 추가 확인작업이 필요하다.
도리이는 1913년의 강연에서 집안평원의 지리적 특징을 설명하고 호태왕비가 서 있는 동강(東崗)에서 마선구에 이르는 구역에 거의 1만 기에 가까운 고분이 있다고 하였다. 앞에서 살폈듯이 1905년의 조사에서는 1,400기 정도라고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집안평원을 비교적 꼼꼼히 조사했음을 뒷받침한다. 강연에서의 장군총에 대한 설명은 1905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벽면의 절석을 짜 맞추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잘라내고 돌을 끼워 넣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석실 벽면에 무엇인가를 그린 것처럼 잘 갈아냈다고 했다. 무덤 위에서 많은 수의 기와가 채집된다고 기록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는 비각을 세운 증거라고 하였다. 또한 주변의 대형묘를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이해하고 그 상부에서 채집되는 기와를 근거로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무덤 위에 비각을 세웠던 흔적이라 판단하였다.
또한 개원(開原)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조사한 수많은 고분에서 전실묘(塼室墓)를 발견하지 못한 사실과 집안에서 확인되는 1만 기 이상의 고분에서 전실묘가 없다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고구려 고분에는 전실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圖12_관구검 기공비의 탁본 (『조선고적도보』Ⅰ)
광복 후에 발굴되어 최근 연구자들의 주목을 모으고 있는 우산하 3319호는 기단식 적석총이지만 매장주체부가 전실묘이다. 1912년의 도리이가 이를 확인했더라면 아마도 크게 고민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대동강 유역의 고구려 고분과 비교 연구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이는 세키노 다다시가 1909년에 조사한 평양 서암리의 낙랑 전실묘를 고구려 고분이라 주장한 것을 다분히 의식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장군총에 이어 태왕릉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1905년에는 이를 장군총으로 불렀던 터이나 1913년의 강연에서는 이를 태왕릉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태왕릉과 비문의 서쪽에 절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샤반느의 사진자료 19에 보이는 기와건물일 가능성이 높다(서길수, 2006). 1912년 당시 태왕릉의 주변은 토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토벽의 동쪽에 붙어서 호태왕비가 서 있었다고 한다. 도리이는 태왕릉과 호태왕비가 인접해 있다는 점과 무덤에서 ‘大王(대왕)’이 들어간 명문전이 발견되는 점을 들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판단하는 인식 변화를 드러낸다. 1905년의 조사에서는 명문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일본군이 채집하여 제실박물관에 기증한 명문전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한 발언과는 다른 것이어서 도리이가 1912년에 태왕릉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명문전을 채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이번 일본 현지 조사에서 확인한 나라문화재 연구소 소장의 도리이 기증 문자전이 1912년의 조사에서 수집된 것임을 증명해 준다.
1912년의 조사에서는 환도산성과 국내성, 그리고 관구검 기공비가 출토된 소판석령에 대해서도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1913년의 강연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들 유적에 대해서는 1914년에 『사학잡지(史學雜誌)』에 발표한 글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환도성에 대해서는 그가 조사를 떠나기 이전에 발견된 관구검 기공비를 의식하여 그 출토지를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도리이는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지점이 환도성과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현지를 찾는다. 그런데 답사 결과 판석령은 한군데가 아니었다. 한 곳은 소판석령이고 다른 한 곳은 대판석령이었다. 그런데 이 대판석령이라는 곳은 통화에서 집안으로 나오는 길이고 소판석령은 환인에서 혼강과 부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경과하여 집안으로 오는 높은 고개라는 지리 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먼저 도리이는 수소문하여 비석 발견에 관여했다는 집안현의 병졸을 찾아내서 대동하고 대판석령을 올랐지만 그곳은 고비가 나온 곳이 아니었다(鳥居, 1914). 그곳에서 다시 청취조사를 한 결과 비석이 나온 곳은 반대쪽의 소판석령이라고 하였다. 결국 도리이는 대판석령의 뒤로 내려와 혼강과 부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흐르는 신개하의 상류지역으로 내려와 다시 산기슭을 올라 소판석령의 비석 출토 지점을 확인하였다.
비석의 출토 경위를 조사한 결과 소유자인 오광국은 러일전쟁 때 도로 개수 과정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으나, 오래 전에 소판석령 주위를 밭으로 경작하는 과정에서 비석이 출토되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당시 이를 발견한 농부는 비석의 글자를 알지 못했지만 신비하게 여겨 이를 출토지의 큰 나무 밑에 세워 두었다. 그 후 이 고개를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우르러 예배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 소문이 퍼지자 곧바로 지역 유지인 오광국이 비석을 손에 넣은 것이다.
비석이 출토된 곳은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관구검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보았다. 현지조사에서 도리이는 주변에서 또 다른 파편을 수습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본인도 주변을 조사하였으나 눈이 많이 쌓였던 터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석이 파괴된 것은 수도를 회복한 고구려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
관구검비의 출토지를 확인하고 그 지세를 둘러본 도리이는 그 곳을 문헌상의 환도산으로 확신했다. 그것은 관구검이 마차를 매단 말을 부려서 환도에 올랐다는 기록과 지세가 부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판석령에서 환도에 이르는 길에서 재갈과 화살촉 그리고 오수전을 채집한 사실도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데 힘을 보탰다.
소판석령을 답사한 도리이는 환도성의 위치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수정해서 환도성은 결코 소판석령이 있는 환도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산성하 고분군을 내려다보고 조성된 산성자 산성이었다. 산성자 산성을 답사한 도리이는 입지가 천혜의 요새이고 성의 내부에 석단이 있는 궁전지가 있으며 그 내부에서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또 성벽의 내부에서 연못지를 발견하고 망루의 흔적을 발견하였으며 수백 기의 고분이 성의 내부에 축조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성벽의 쌓는 방법이 지극히 고구려적이라 하여 환도성이 산성자 산성임을 확신하였다.
산성의 바깥에 수많은 고구려 고분이 축조되어 있는 사실도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켰을 때의 공격로는 성의 후방이라 보았다. 그리고 문헌에 등장하는 환도의 별성으로 집안의 석성(국내성)을 지목하였다.
도리이는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한때 집안의 석성으로 판단한 적이 있으나,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1912년의 현지조사를 토대로 올자산성, 즉 오녀산성을 국내성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 근거는 음운학상의 유사성에 있었다.
귀로는 1차와 달리 환인으로 가지 않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와 초산을 거쳐 신의주까지 답사한 것으로 알려진다(德島縣立博物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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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의 집안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