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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895년의 요동지역 조사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가장 먼저 학술적으로 조사한 사람은 도쿄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이다. 그가 집안을 조사한 것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1905년이다. 그런데 도리이가 만주지역을 조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요동지역을 일시 획득하자 25세의 젊은 나이로 현지 일본 주둔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요동반도를 종횡하는 답사 여행을 감행한다(圖1의 답사경로 참고).
1895년에 이루어진 요동반도에 대한 조사는 인류학적 조사뿐만이 아니라 지질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도쿄대학에서 아이누어를 연구하던 진보[神保] 박사의 요동반도에 대한 지질학적 연구에 도리이가 동행할 뜻을 비쳤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도쿄대학 인류학연구실의 스승인 쓰보이[坪井]에게 부탁하여 일본 인류학회의 파견이라는 형식을 갖추어 요동반도로 향하게 되었다. 그의 수기(手記;鳥居1953)를 참고하면 여행경비는 당시 잡지 『태양(太陽)』의 발행인인 박문관(博文館)의 오하시[大橋]가 30원, 국민신문사(國民新聞社)의 도쿠토미[德富]가 20원, 자작(子爵)인 아베 마사코토[阿部正功]가 50원을 원조하였다(鳥居, 1953). 경비를 걱정하는 도리이에게 도쿠토미가 육군병참부(陸軍兵站部)의 지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하였고, 도쿄대학 이과대학에서 대본영(大本營)에 요동을 조사하겠다는 원서(原書)를 제출하고 허가를 얻은 것을 보면 당시 연구자들의 요동 조사는 군 당국에서도 그 필요성이 크게 인정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일본 내에서 요동반도와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편이어서 조사여행을 떠나기 전에 도리이가 접할 수 있었던 자료는 도쿄지학협회(東京地學協會)에서 발행한 『만주지도(滿洲地圖)』와 일본군 참모본부가 공개한 『만주지지(滿洲地誌)』가 전부였다. 때문에 도리이의 조사는 사전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圖1_도리이 류조의 요동지역 답사 경로 (東京大學總合硏究資料館, 1991)
도리이의 요동행은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었다. 히로시마에서 어용선(御用船)을 타고 도착한 요동은 대련에서 가까운 유수둔(柳樹屯)이었다.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금주(金州)에 있었기 때문에 도보로 금주까지 이동했는데, 주변은 거의가 고량밭이고 그 사이로 민가가 띄엄띄엄 보였다고 한다. 8월 중에 금주에 도착한 도리이는 곧바로 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요동을 방문한 뜻을 전했고 이에 고급부관인 오니시[大西]라는 1등군의[軍醫]를 소개받아 그와 함께 제반 조사여행을 준비하였다(鳥居, 1953).
먼저 금주에서 도보로 여순까지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해군 소장(小將)의 배려로 군용선으로 산동성의 유공도를 짧은 기간 조사하기도 하였다. 금주로 돌아온 다음 본격적인 북방행을 시작하여 보란점(普蘭店)에 도착 복주(復州), 웅악성(熊岳城), 개평(蓋坪), 대석교(大石橋), 해성(海城)을 지나는 경로로 답사를 진행했다. 도리이가 요동에서 처음으로 고고유물을 발견한 것은 웅악성에서이다. 도중 보란점에서도 통역관이 석기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하였으나 당시 그가 일본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재질의 것이어서 믿지 않고 있던 터였다. 보란점에서 석창을 발견하면서 만주(滿洲)에도 선사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물적 증거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후 도리이의 연구방향이 정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鳥居, 1953).
또한 웅악성 근처에서 오수전 문양이 있는 전(塼)을 발견했는데, 당시 도리이는 이를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구려 종족이 남긴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1896년에 작성된 논문에는 1895년에 요동지역 답사에서 확인한 다수의 전곽(실)묘(算槨(室)墓)마저도 모두 고구려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鳥居, 1896a 1896c). 이는 『동경인류학잡지(東京人類學雜誌)』 123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鳥居, 1896a). 도리이가 이들 벽돌을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현지의 중국인들이 이를 고려전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다. 도리이는 웅악성을 포함한 발해만 부근과 황해 부근에서 다수의 문양전을 확인했는데 이를 『당서(唐書)』 고려전(高麗傳)에 나오는 와(瓦) 기사와 관련시켰다. 한발 더 나아가 북삼십리보(北三十里堡)의 곽대(墩臺)와 금주성(金州城)에서 확인된 문양전은 당장(唐將) 설인귀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요동으로 데려온 고구려 공인이 제작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이들 전(塼)으로 무덤과 건물과 성곽을 만들었다고 판단했으며, 같은 문양의 전(塼)을 사용해서 만든 무덤을 조선총[전실묘, 朝鮮塚(塼室墓)]이라 하였다. 또한 전실묘에서 출토된 토기류를 고구려 토기로 판단하여 이것이 일본이나 한반도 내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소위 축부토기(祝部土器)주 001
각주 001)
삼국시대의 경질토기나 일본 고분 출토의 스에키나 도질토기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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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 여기고 당시 조선에서 제작되던 토기(옹기류)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후 황해에 면한 홍수성(紅水城)에서 무문전(無紋塼)을 발견하고는 고구려의 전을 기하학 문양전과 무문전으로 2분하였으며(鳥居, 1896a), ‘五十’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문양전은 고구려가 중국 화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판단했다. 도리이는 요동지역에서 확인되는 문양전(紋樣塼)이야말로 고구려인과 관련되는 문양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자료가 된다고 판단하여 연구방법까지 제시했다. 즉 전의 문양면을 구성하는 문양요소를 여러 개의 단일분자(單一分子)로 분해하고 이들이 모아진 문양을 집합분자(集合分子)라고 하여 그것을 고구려 문양분자(紋樣分子)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현대 고고학의 유물 분류법에서 구사되는 속성분류와 이를 조합하는 형식분류법(型式分類法)과 통하는 점이 있어 놀랍다. 또한 고구려 전의 문양조합을 산포문양(散布紋樣), 병렬문양(竝列紋樣), 연속문양(連續紋樣)으로 구분하고 고구려인들이 가장 좋아한 문양은 병렬문양이라고 하였다(鳥居, 1896a).
뿐만 아니라 요동지역에서 발견한 많은 수의 석성도 고구려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이 역시 현지인들이 이를 고려성(高麗城)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고 또한 광개토대왕비 등에 성(城)과 관련된 기술이 많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확인되는 산성 역시 고구려성과 관련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요동지역에서 확인되는 전축(塼築)의 성(城)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성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도리이가 만주의 여러 유적을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시킨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운데, 당시 중국(청)과의 대립이 지속되는 정세에서 만주라는 공간을 중국과 구분하고자 했던 학문 외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도리이는 오늘날의 조선 인민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고구려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언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鳥居, 1896a).

  • 각주 001)
    삼국시대의 경질토기나 일본 고분 출토의 스에키나 도질토기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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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의 요동지역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