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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머리말

평양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마찬가지로 천도 이전의 수도였던 집안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 역시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일본인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비의 해석 문제를 포함하여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문제, 왕릉 피장자의 문제 등 고구려사 연구의 핵심 논쟁은 일본인 연구자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집안의 고구려 유적은 광개토대왕비가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일본인 연구자가 현지조사를 감행하였으며 다양한 형태의 조사활동이 이루어졌다. 물론 출토된 유물의 많은 수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서 열거한 고고학적 현안들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광복 후에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과 평양을 둘러싸고 전개된 엄중한 정치 정세는 한국 연구자들의 현지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가 드물었고 그나마 일본어로 작성된 점에 더해, 현지조사를 경험한 연구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점은 고구려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오랫동안 더디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중국과의 수교로 상황은 나아졌지만 중요유적과 출토유물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다. 일본에 반출된 고구려 관련의 고고자료가 아직도 그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고고자료들이 채집되어 반출된 정황과 당시의 조사 내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가장 먼저 고구려 유적을 촬영하고 학계에 보고한 사람이 프랑스의 중국학자인 샤반느(E. Chavannes)라고 소개되는 사실(서길수, 2006)은 그러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혹자는 조사 내용과 확보된 자료의 성격이 중요하지, 누가 먼저 조사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 외적인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전개된 초기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담당했던 인물과 함께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고구려 연구사의 흐름을 바르게 정리해 낼 수 없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이때 확보된 고고유물의 자료적 가치와 의의에 대한 판단도 주체적으로 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일본으로 반출된 고구려 관련 유물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목적과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전개된 일본인 연구자의 고구려 유적의 조사·연구 내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정리된 것으로 지난 해에 작성된 논고(정인성, 2008)에 연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집안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조사는 이미 1895년에 시작되어 광복 직전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한번에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17년까지 인류·고고학자 도리이와 건축·고고학자 세키노가 활발하게 조사한 이 지역에서의 조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1935년에 재개되는데 조사단의 구성과 조사 내용에서 두 시기가 서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선 1917년까지의 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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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10